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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혼학 그 표준이론』 제8장 ‘주요 인간론’ -‘표준이론과 기독교 삼원론’

정영부 | 기사입력 2023/03/16 [08:59]

『영혼학 그 표준이론』 제8장 ‘주요 인간론’ -‘표준이론과 기독교 삼원론’

정영부 | 입력 : 2023/03/16 [08:59]

표준이론의 입장에서 삼원론의 정당성을 주장하는 이유로는 다음과 같은 것들을 생각할 수 있다.

1) 구약의 네샤마와 루아흐, 그리고 네페쉬, 신약의 프네우마와 프쉬케는 다 무엇인가. 영과 혼이 나뉘지 않았는데 말만 나뉠 리는 없다. 언어는 존재와 사실의 표상이다. 영은 창조 때부터 있었으니 네샤마나 루아흐란 단어도 필요하였다.(1)

2) 창세기(2:7)(2)는 하느님께서 네페쉬만 가지고 있어 동물과 마찬가지인 사람에게 특별히 하느님의 네샤마를 불어넣어 사람의 영혼이 생령(네페쉬 하야)’로 변화되었다고 한다. 따라서 아담의 혼은 영()이 있는 혼이고 다른 생물의 혼은 그냥 혼이다. 사람의 혼과 동물의 혼은 창조한 방법(3)부터 다른 것이다.

플라톤의 영향을 받은 유대계 철학자인 알렉산드리아의 필론(Philon Judaeus BC 15~AD 45)은 이를 매우 적절히 설명하였다. “사람에게는 두 종속의 인간이 있는데 하늘의 인간과 땅의 인간이 그것이다. 땅의 인간은 정신이 몸에 주입된 상태이지만 아직 적응이 안 된 상태다. 그는 사멸하는 존재로 죽은 인간이다. 하느님은 이러한 정신 안에 참 생명의 능력을 불어넣으셨다. 이로써 그는 살아있는 인간이 되었다. ‘참 생명의 능력이란 영()이다. 불어넣으셨다는 것은 숨을 불어넣는 주체와 그를 받는 객체 그리고 불어넣는 숨의 존재를 전제로 한다. 여기서 주체는 하느님이시고 객체는 정신이며 숨은 영이다. 이로써 객체인 정신은 하느님을 인식하기 시작하였다.(4)

한편 전통교설은 아담의 살아있는 혼(living soul)’에 쓰인 단어가 루아흐가 아닌 네페쉬이므로 살아있는 영이 아닌 살아있는 혼이 아니냐고 하며 영을 부인한다. 이에 대해 삼원론은 살아있는 혼이 의미하는 것이 바로 (spirit)을 가진 혼(soul)’이라고 응수한다.

3) 또 창세기 1장에서 하느님께서 사람을 별도로 만드시고 그에게 땅과 뭇 생명을 지배하도록 하신 사실은 사람의 혼은 짐승의 혼인 각혼과는 전혀 다른 지혼임을 의미한다. 그러니 2장의 네샤마는 영일 수밖에 없다.

4) 전통교설이 말을 바꾸어 성령이 혼을 영화(靈化)시키는 존재가 아니라 개인에게 임하는 개체라거나 성령이 사람에게 영을 심어 놓고 떠난다고 주장한다 하여도 문제다. 그럴 경우 영은 성령으로 인하여 인간에게 새롭게 주어진 요소(要素)이니 이때부터 영은 인간의 구성물이 되어 신자(信者)는 영혼육으로 구성되고 불신자(不信者)는 혼육으로 구성되는 일이 발생한다. 따라서 이렇게 주장하여도 영육이원론은 틀린 셈이다.(5)

5) 성경은 많은 구절에서 영과 혼과 육에 관하여 기록하고 있다.(6)

6) 기독교 영지주의의 영혼별개론에서 논한 대로, 살면서 선악을 행한 주체는 혼이며 영은 하느님으로부터 나온 존재이므로(7)영은 혼의 구원과 상관없이 죽으면 하느님에게 돌아간다. 그리고 셋째 하늘(the third heaven)에 대한 성경의 여러 구절들(8)은 셋째 하늘이 구원받고 죽은 사람들의 혼이 가서 안식을 누리는 곳으로서 하느님이 계시는 곳으로 묘사된다. 또한 성경은 여러 곳에서(9)혼을 육의 구성부분으로 보되 심판 시 악인이라도 그 영은 천국에 들고 혼을 포함한 육만 지옥불에 던져진다는 사실을 시사하고 있다.(10)

7) 성경 중에 내 마음그리고 내 영을 구별하는 부분들은 많다.(11)그중에서 영과 혼이 자아의 방에서 서로 대립하는 상황이 극적으로 드러나는 루카복음서의 부자이야기’(12)를 보자.

 

또 비유로 저희에게 일러 가라사대 한 부자가 그 밭에 소출이 풍성하매 심중에 생각하여 가로되 내가 곡식 쌓아 둘 곳이 없으니 어찌할꼬 하고 또 가로되 내가 이렇게 하리라 내 곡간을 헐고 더 크게 짓고 내 모든 곡식과 물건을 거기 쌓아 두리라. 또 내가 내 영혼에게 이르되(I shall say to myself) 영혼아 여러 해 쓸 물건을 많이 쌓아 두었으니(as for you, you have so many good things stored up) 평안히 쉬고 먹고 마시고 즐거워하자 하리라 하였더라.”(루카 12:16~19)

 

위 루카복음서 12장에서 내가 내 영혼에게 이른다는 말은 자신의 영이 자신의 혼을 타자(他者)로 보고 있다는 사실을 전제하고 있다. 몸 안에 영이 있는 사람의 경우 그 사람의 자아는 주인이 영이다. 그런데 지금 부자의 자아의 방을 차지하고 있는 것은 이 아니라 으로 보인다. 부자의 자아를 차지하고 있는 혼은 이런 사실을 잘 알고 있다. 보통의 경우 자아가 혼에 오래 점령되어 있다 보면 혼은 자신이 자아의 주인인 것으로 착각하고 영의 존재를 무시하거나 영을 수호령이나 천사 정도로 취급한다. 영 또한 사람에 깃들어 인두겁을 쓰게 되면 몸과 마음 특히 마음에 속박되게 되고, 속박이 심해지고 굳어지면 나중에는 자신이 진정한 자아의 주인인지도 잊는다.(13)그런데 성경의 부자는 이제 곳간이 가득 찼으니 앞으로는 참되게 도를 닦으며 살자라고 한다. 이 말은 자아의 방을 차지하고 있는 욕심쟁이이자 감정꾼이며 정신꾼인 혼이 영에게 한 말이다. 부자의 혼은 그동안 속세의 욕망을 채우며 허송세월한 것이 자신에게도 불행이고 영에게도 미안한 일이라는 것을 잘 알고 있다. 그래서 이제 벌 만큼 벌어 혼의 욕심을 다 채웠으니 혼은 영에게 자아의 방을 비워 주고 행랑에 내려가 살겠다고 다짐하는 것이다. 이 부자의 영은 그동안 자신이 몸과 마음의 주인임을 알고 있으며 어떻게 하든 혼을 설득하고 압박하여 자기 권리를 찾고자 한 듯하다. 그러나 만부득이 뜻을 이루지 못하고 있던 차에 혼이 드디어 거드름을 피우며 자아의 방을 영에게 내주겠다고 한 것이다. 이는 2.5단계 자아의 전형적 상황이다. 이런 이야기는 2.5단계 이상의 사람에게는 거의 매일, 아니 상시로 일어나는 일인 것이다. 그러나 부자가 다음 날 죽지 않았다면 필연코 그랬을 것처럼 혼이 이런 결심은 작심삼분(作心三分)이다. 혼이 자아의 방에 번개 치듯 등장하면 영은 다시 여지없이 물러났을 것이다. 그래서 하느님께서도 그날 밤 주저 없이 쓸모없는 그의 삶을 그만 거두어 가신 것이 아니었겠는가.(14)이러한 표준이론적 해석에 따라 위의 성경말씀을 풀어 쓰면

 

소출이 풍성한 밭을 소유한 한 부자가 있었다. 그의 혼이 생각하여 가로되, “곡식을 쌓아 둘 곳이 넉넉지 아니하니 어찌할꼬? 옳다! 내 곡간을 헐고 더 크게 지어, 내 모든 곡식과 물건을 거기 쌓아 두리라.” 하였다. 그러고 나서 부자의 혼이 그의 영에게 이르되, “영아! 내가 수고하여 여러 해 쓸 물건을 많이 쌓아 두게 되었으니, 이제 온 집안이 평안히 쉬고 먹고 마시고 즐거워해도 되겠다. 그리고 이제 나는 욕심을 다 채웠으니 더이상 앞서서 설치지 않으려 하노라. 그러므로 내일부터는 네가 자아의 방에 들어와 집의 주인 노릇을 하렴. 나는 자아의 방을 비워 주고 행랑으로 내려가련다. 거기서 나는 하느님 말씀대로 살리라.” 하였더라.

 

마태오 1039(15)역시 유사한 맥락에서 해석이 가능하다. 제 목숨을 얻으려는 사람은 목숨을 잃고, 나 때문에 제 목숨을 잃는 사람은 목숨을 얻을 것이다.”무릇 자기에 집착하는 자는 自己를 잃을 것이요, 자기를 잃고 나를 따르는 자는 自己를 찾을 것이다.”라고 해석될 수 있다.(16)

표준이론입장에서 보면 여기서 목숨이나 자기는 혼이고 또 다른 목숨이나 自己는 참자아, 참나, 영과 일치된 자아, 또는 영 그 자체다.(17)이에 따라 마태오 10:39를 다시 해석하면 제 목숨을 얻으려는 사람은 자아의 방에서 혼을 쫓아내고 영을 받아들여 자아의 방에 영이 거하는 참자아로 변화(메타노이아)하라.”라는 뜻이다. 불교식으로 말하면 無我하라이다.

마태오 10:39자기 목숨을 얻으려는 사람은 천국을 잃을 것이며 나를 위하여 자기 목숨을 내어놓는 사람은 천국을 얻을 것이다.”라는 식으로 순교적이고 교회적인 해석을 한다면 이는 올바른 해석이 아니다.

 


 
 

<註釋> 

1)

1. (, spirit)에 해당하는 단어는 히브리어로 루아흐(ruach), 또는 네샤마(neshamah)이며 희랍어로는 프네우마(πνεύμα Pneuma)이다. 또 혼(, soul)은 히브리어로 네페쉬(Nephesch), 희랍어로는 프쉬케(psyche)이다.

2. 라이프성경사전에서 은 사람과 짐승 등 모든 피조물들에게 공통적으로 있는 정신적인 영역이다(2:19). 반면, ‘은 하느님과의 관계에서만 이루어지며 하느님의 부름에 반응하고 응답한다. 또 혼은 정신적 측면을 가리키지만 그것이 육체와 분리되어 독립적인 것이 아니라 항상 육체와 함께하고 또한 육체를 대표한다(마태 16:26). 그러면서도 혼은 육, 영과 함께 전 인격을 형성한다. (루아흐)은 인간 속에 내재된 신적 요소로서 하느님과 관련된 정신 영역을 일컫는 말로 쓰이기도 하고, 또 인간의 사고나 이해, 감정, 태도, 의지 등을 포함하는 기능들의 폭넓은 범위를 일컫기도 한다. 그렇다면 루아흐와 네페쉬는 언어적으로 지극히 일반적인 개념의 영과 혼 개념이다. 특히 혼은 생명’, ‘기력이니 생기체요, 정신적인 영역이니 정신체이다. 생기체와 정신체 역할을 한다면 그것은 혼이다.

 

2)

1. Genesis 2:7. And the LORD God formed man of the dust of the ground, and breathed into his nostrils the breath of life; and man became a living soul.

 

2. 창세기 2:7. 여호와 하느님이 땅의 흙으로 사람을 지으시고 생기를 그 코에 불어넣으시니 사람이 생령이 되니라(개역성경).

 

3) 창세기 1장에서 창조된 생명체의 혼은 있어라하여 생긴 것이고, 창세기 2장에서 사람은 하느님께서 이에 더하여 네샤마를 친히 불어넣으셨다. 1장과 2장이 같은 사건의 반복이 아닌 것이다. 따라서 삼원론 입장에서는 사람에게 이전에 이미 지혼은 있었고 새로이 불어넣으신 것은 영()이다. 표준이론으로 해석하면 삼원론의 네샤마는 영이다(미주 181 ‘창세기와 기독교 인간론’ 8. 참조).

 

4) 1. Hellenistic Jewish philosopher인 필론은 여기서 플라톤 전통의 개념을 사용하였다. 플라톤에서 살아있는 인간은 혼이 몸에 주입되어 하나가 된 상태이고 죽은 인간은 혼과 몸이 분리된 상태다. 필론은 이 개념을 응용하여 살아있는 인간의 상태를 언급한 뒤 이에 하느님의 역할을 더하여 하느님께서 정신에 참 생명의 능력을 불어넣어 정신으로 하여금 살아있는 인간’(생령, 네페쉬 하야)이 되게 하였다고 설명한다(필론, 알렉산드리아의 필론 작품집Ⅰ」, 문우일 옮김, 154쪽 참조).

2. 플라톤은 인간을 누스와 Psyche() 그리고 Soma()로 구성된다고 하였으며 누스는 일자(Hen)로부터 온 영이다. 그렇다면 필론은 네샤마를 누스로 해석하고 네페쉬를 프쉬케로 본 것이다.

 

5) 표준이론도 10%의 사람만 영혼육이니 앞뒤가 맞지 않는다고 하겠으나 이에 대한 의론은 3.1.3. ‘일반적인 삼원론과 표준이론을 보라.

 

6) 삼원론적인 인간관을 보이는 성경구절과 기독교 영혼육 삼원론의 내용

 

1. 성경구절

1) (데살로니가전서 5:23) 평강의 하나님이 친히 너희로 온전히 거룩하게 하시고 또 너희 온 영과 혼과 몸이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 강림하실 때에 흠 없게 보전되기를 원하노라

2) (히브리서 4:12) 하나님의 말씀은 살았고 운동력이 있어 좌우에 날선 어떤 검보다도 예리하여 혼과 영과 관절과 골수를 찔러 쪼개기까지 하며 또 마음의 생각과 뜻을 감찰하나니

3) (고린도전서 14:15) 그러면 어떻게 할꼬 내가 영으로 기도하고 또 마음으로 기도하며 내가 영으로 찬미하고 또 마음으로 찬미하리라

(NIV)15. So what shall I do? I will pray with my spirit, but I will also pray with my mind; I will sing with my spirit, but I will also sing with my mind.

(KJV)15. What is it then? I will pray with the spirit, and I will pray with the understanding also : I will sing with the spirit, and I will sing with the understanding also.

 

2. 이러한 구절에서 추론되는 기독교 영혼육이론의 해석은 다음과 같다.

1) 육은 우리가 먹고 마시고 움직이고 생활하는 역할을 하고 혼은 우리의 생각과 감정을 다스리는 지성과 이성, 양심 등(소위 知情意)의 역할을 하며 영은 하느님과 교통하는 靈交의 역할을 한다.

2) 창세기 2:7에서 하느님으로부터 받은 네샤마를 통해 사람의 몸에 들어온 영은 아담의 죄와 허물로 죽었는데(잠들었는데) 예수님을 믿고 성령을 받아 예수님과 더불어 의로운 영으로 다시 살아난다(깨어난다).

3) 사람은 靈交를 통하여 몸에 예수님의 성령이나 사탄의 악령이 들어온다. 이들은 죽은 영을 살리고 또 혼에 작용하여 혼의 구성물인 감정 지식 의지를 재료로 생각과 느낌과 깨달음의 의식을 만들어 마음이란 그릇에 담는다(조천석, ‘성령의 삶을 살라참조).

 

3. 이러한 해석은 표준이론에서 혼이 감성, 욕망, 지성을 가진다는 사실과 양심이 사단과 지혜 그리고 예지의 기능을 가진다는 사실에 어느 정도 부합한다. 그러나 정작 혼의 생기체로서의 기능은 빠뜨리거나 육의 기능으로 이해하고 있고 더구나 영의 기능인 직관을 혼의 기능으로 보고 있다.

 

4. 기독교 삼원론에서 영과 육은 명종 후 어찌 되는가? 성경에 이에 대한 명확한 구절이 없어서인지 삼원론에서는 이에 대해 통일된 설명이 없고 다만 다음과 같은 내용으로 정리될 수 있다.

1) 구약시대에는,

(1) 착한 사람의 영은 살아나서 하느님께로 가고 혼은 저승(schéol)으로 가되 구렁텅이 건너 낙원(림보, limbus(*))쪽으로 갔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돌아가셨을 때 3일간 저승에 가시어 혼들을 구원하여 그들을 하느님이 계신 하늘나라인 셋째 하늘로 데려갔다.

(2) (악한 이에게 영이 있을 경우는 별로 없어서 구약에 명언은 없지만 선인, 악인을 불문하고 그의 영은 천국으로 가고) 악한 혼은 루카 16:19의 부자처럼 쉐올의 험한 곳으로 갔다. (예수님 이후 쉐올은 하데스(hades)로 대체되고 폐쇄되었다는 말도 있지만, 이들은 최후의 심판 때까지 거기서 기다려야 논리적이다.)

 

2) 신약시대에는

(1) 영지주의적 영혼육삼원론

구원받은 성도의 영은 하느님께로 가고 육은 흙으로 가며 혼은 셋째 하늘(**)로 올라갔다가 예수님이 재림하실 때에 셋째 하늘에 있는 혼과 흙으로 간 육이 결합하여 최후의 심판을 받고 영원한 천국에 들게 된다.

구원받지 못한 사람도 영은 하느님께로 간다. 이때 은 지옥에 있다가 육과 결합하여 최후의 심판을 받고 다시 지옥으로 간다. 영은 이때도 하느님께로 돌아간다. 혼뿐 아니라 육에도 고통을 주기 위해 정해진 판정을 다시 하는 셈이다.

 

(2) 일반적 영혼육삼원론

구원받은 성도의 영과 혼은 일체가 되어 하느님께로 가고 생기체와 육은 흙으로 간다. 예수님이 재림하실 때 흙으로 간 육도 구원받아 영혼육이 재결합하여 완전한 인간이 되어 천국에서 영생한다.

구원받지 못한 영과 은 명종 시 즉시 같이 지옥(하데스)에 떨어졌다가 심판 날이 오면 영혼육이 다시 결합하여 최후의 심판을 받고 함께 지옥(게헨나)으로 가서 영벌을 받는다.

그러나 여러 차례 밝힌 바와 같이 표준이론에서 영은 천국의 시민권자요 영생하는 존재다. 또 영이든 혼이든 원죄 때문에 죽거나 사는 일은 없다. 심지어 영은 아예 죄를 지을 수도 없다. 영이 不擇하는 일도, 하느님과의 교제가 끊어지는 일도 없다. 있다면 여러 가지 이유로 장성(長成)하지 않고 멈춰 있는 또는 발전이 늦은 상태에 있는 영이 있을 뿐이다. 이 상태는 영이 자기의 心身(은 마음 즉 혼이므로 심신은 몸과 혼)을 다스릴 기능이 약한 상태다. 따라서 이러한 영이 지옥에 가는 일은 없다(미주 125 ‘심판 시 악인이라도 그 영은 천국에 들고 혼과 육만 지옥불에 던져진다는 의미를 가진 성경구절참조). 게다가 저승에 지옥이란 곳은 없다. 지옥이 있다면 이승에 있다. 따라서 일반적 영혼육 삼원론은 기독교의 다른 교리와 논리적으로 어울리지 않는다.

 

5. 기독교가 이런 복잡한 영혼육의 인간론을 가지게 된 이유는, 우선 역사적으로는 성경의 형성과정에 영향을 준 종교와 사상들(조로아스터교의 최후심판론과 영육일체론 그리고 여러 고대 그리스철학들, 윤회론과 영지주의 등) 간의 불일치 그리고 성경내부에서의 내용 불일치, 구약과 신약의 영과 혼 관련 용어의 혼용 등인데 기독교의 탄생배경을 감안할 때 자연스러운 결과이며 중요한 것도 전혀 아니다.

 

6. 그러나 한편 위의 진술에 나타난 기독교 삼원론에서의 혼의 정체는 대단한 것이다. 우선 혼에게 표준이론보다 높은 지위를 부여하였다. 살아서는 영교(靈交)의 기능을 제외하고 영혼의 거의 모든 기능을 한다. 자유의지로 선악을 선택하여 행하며 자신뿐 아니라 영의 발전문제에까지 책임과 권한을 가지고 있으며 나아가 몸 전체를 지배한다. 명종 후에는 심판을 받는 주체가 되고 천국으로 가거나 지옥에서 심판을 대기한다. 또 이 의견은 영은 오직 혼을 통해서만 성령을 만날 수 있다는 생각(미주 206 ‘신지학의 모나드 영혼론참조)과 합하여 신지학적인 혼소멸론과도 연결된다.

 

7. 이처럼 삼원론이 기독교 내부에서 자신의 주장을 세우려면, 자체의 논리도 정립하여야 하거니와 수천 년간 외부정치와 내부이해관계 속에서 많은 사연 끝에 수립된 기존 이원론의 교리와 절충하고 타협할 부분이 많을 것이라 아직 갈 길이 멀어 보인다.

 

8. 결론적으로 성경을 통하여 인간론에 대한 통일된 이론체계를 도출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그러나 성경을 통하여 예수님의 말씀과 삶의 진정한 모습을 파악하는 것은 어렵지 않다. 나머지는 예수님이 아니라 후대의 교회가 필요에 따라 만든 것이니 적절히 가려 읽으면 될 일이다.

 

(*) 림보는 아브라함이나 라자로 같은 구약 시대의 착한 조상들이 가는 쉐올의 낙원구역이기도 하지만 나중에 가톨릭에서는 세례를 받지 못하고 죽은 유아의 경우처럼, 원죄 상태로 죽었으나 죄를 지은 적이 없는 사람들이 잠을 자며 머무르는 곳을 의미한다.

(**) 여기서 셋째 하늘(the third heaven, 고후 12:2)이란 구원받고 죽은 사람들의 혼이 가서 안식을 누리는 곳으로 하느님이 계시는 곳이다(마르코 16:19, 사도행전 1:11, 데살로니카전서 4:16~17, 디모데오후서 4:18). 사람들이 천국이라고 말하는 곳이다(the paradise, 고후 12:4). 살아서 하늘로 올라간 에녹(창세기 5:24), 엘리야(열왕기하 2:11)도 셋째 하늘에 있다. 그러나 셋째 하늘이 구약의 림보처럼 성도들이 잠들어 있는 곳이라는 해석도 있는 듯하다. 아니면 신약시대에도 림보는 성도들의 혼이 최후의 심판 때까지 잠자는 곳일지도 모르겠다. 이 문제는 기독교에서는 죽은 교우들이 최후의 심판날까지 잠을 잔다는 진술이 성경과 기도문, 성가 등에 많이 등장한다는 사실과 관련하여 검토할 필요가 있다(5.5.5. ‘기독교의 저승관참조).

 

7) 요한복음 3:6, 히브리서 12:9, 마태오복음 26:41 참조

 

8)

1. 고후 12:2, 마르코 16:19, 사도행전 1:11, 데살로니가전서 4:16~17, 디모데후서 4:18,

2. 구약의 에녹(창세기 5:24), 엘리야(열왕기하 2:11)도 셋째 하늘에 있다.

 

9) 요한계시록 21:8, 고린도전서 5:5, 베드로전서 4:6, 마태오복음 10:28

 

10) ‘기독교 영지주의의 영혼별개론은 윤회를 부인하니 영은 살아서 성취한 자아나 영성의 수준과는 상관없이 명종 후 바로 하느님과 합일한다. 다만 혼은 영성의 수준에 따라 천국이나 지옥으로 간다. 영과 혼이 전혀 다른 실체임을 전제로 한 이론으로 윤회를 더한다면 표준이론과 매우 흡사하다.

 

11) 기독교에서 이분법을 주장하는 이유

 

성경은 곳곳에서 영과 마음()을 구별하고 있다. 루카 12장의 부자 이야기에서처럼 자신이 자신에게 말한다는 정도의 문학적 표현을 넘어선 진지하고 엄연한 내용이 많은 것이다. 그럼에도 현재 기독교에서 이분법을 주장하는 이유는 다음과 같이 분석된다. 인간의 구성요소를 영혼육으로 볼 경우

1. 교리 간에 충돌이 생기고

2. 기본 교리가 복잡해져 신자교육이 어려워지며

3. 창세기 어디에도 혼과 영을 따로 창조하였다는 말이 없고

4. 유대교의 영육일체론을 수용할 여지가 없어지며

5. 성경은 영과 혼을 서로 교체 사용하고 섞어 사용하는 등으로 무질서하여 영과 혼이 두 개의 완전히 독립된 다른 것이라는 확신을 주지 않는다.

6. 또한 성경은 비물질적인 것이 중요하다는 메시지일 뿐 비물질의 구성요소를 설파하는 논문이 아니고

7. 이분법은 이미 오랜 세월 동안 도그마로 입지를 굳혔다.

라는 점에서 기독교에서는 영혼육 삼원론을 인정하기가 곤란하다.

 

12) 누가 12:16~ 부자의 비유

 

(개역한글)

16 또 비유로 저희에게 일러 가라사대 한 부자가 그 밭에 소출이 풍성하매

17 심중에 생각하여 가로되 내가 곡식 쌓아 둘 곳이 없으니 어찌할꼬 하고

18 또 가로되 내가 이렇게 하리라 내 곡간을 헐고 더 크게 짓고 내 모든 곡식과 물건을 거기 쌓아 두리라

19 또 내가 내 영혼에게 이르되 영혼아 여러 해 쓸 물건을 많이 쌓아 두었으니 평안히 쉬고 먹고 마시고 즐거워하자 하리라 하되

(NIV)

16 And he told them this parable : The ground of a certain rich man produced a good crop.

17 He thought to himself, ‘What shall I do? I have no place to store my crops.’

18 Then he said, ‘This is what I'll do. I will tear down my barns and build bigger ones, and there I will store all my grain and my goods.

19 And I'll say to myself, “You have plenty of good things laid up for many years. Take life easy; eat, drink and be merry.”

 

13) 어린아이는 자신의 독립된 본성을 아직 자각하지 못하며, 아직 자의식이 없으므로 자신을 마치 다른 사람처럼 부르기도 하는데 그건 부자이야기와는 다른 이야기다. 어린아이는 자기 자신에게 이런 식으로 말한다. “철수는 착한 아이야.” “영희는 이걸 갖고 싶어 해.” (루돌프 슈타이너, 신지학참조)

 

14) 이어지는 20절에서 하느님께서는 어리석은 자여 오늘 밤에 네 영혼을 도로 찾으리니 그러면 네 예비한 것이 뉘 것이 되겠느냐.” 하셨다.

 

15) 마태 10:37~

 

(개역한글)

37 아비나 어미를 나보다 더 사랑하는 자는 내게 합당치 아니하고 아들이나 딸을 나보다 더 사랑하는 자도 내게 합당치 아니하고

38 또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좇지 않는 자도 내게 합당치 아니하니라

39 자기 목숨을 얻는 자는 잃을 것이요 나를 위하여 자기 목숨을 잃는 자는 얻으리라

 

(NIV)

37 Whoever loves father or mother more than me is not worthy of me, and whoever loves son or daughter more than me is not worthy of me.

38 and whoever does not take up his cross and follow after me is not worthy of me.

39 Whoever finds his life will lose it, and whoever loses his life for my sake will find it.

 

16)

1. 도올의 Q 복음서 해설 중 Q 58자기집착과 자기상실 참조

2. 도올에 따르면 성경에 목숨으로 번역된 원어는 프쉬케(Ψυχή)’인데 이는 자기(Self)’의 뜻도 있으니 여기서는 자기로 번역함이 더 포괄적 의미를 전한다고 한다.

 

17) 영만 잃는 것이 아니라 혼 자신도 망치게 되니 自己에 혼을 포함시켜도 상관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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