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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국유사에 나타난 문무왕의 호법·호국 용 신앙

장정태 논설위원 | 기사입력 2018/05/29 [07:35]
고유의 용 신앙은 외래종교인 불교의 용 관념의 유입으로 급격한 변형

삼국유사에 나타난 문무왕의 호법·호국 용 신앙

고유의 용 신앙은 외래종교인 불교의 용 관념의 유입으로 급격한 변형

장정태 논설위원 | 입력 : 2018/05/29 [07:35]
고유의 용 신앙은 외래종교인 불교의 용 관념의 유입으로 급격한 변형    

신라는 천년동안 왕조를 이어온 나라다. 오랜 세월을 지나면서 신라인의 용 신앙은 다양한 모습으로 변화를 보이고 있다.     

신라에서 불교 공인 이후 삼국통일에 이르기까지 종교적 권위를 통해 왕권을 강화했다. 왕권이 불교의 권위를 이용하는 시기를 왕즉불 사상이 지배하는 시대라고 한다. 전륜성왕 사상으로 세속의 일과는 거리를 두는 종교집단의 권위를 세속의 권위를 위해 이용하는 시기라 할 수 있다.     

이와같은 시기에 등장하는 용은 호국용의 성격을 가지게 된다. 삼국유사에 등장하는 기록들을 살펴보면 대충 25건에 이른다.     

신라의 용은 우리 전래의 수신신앙의 용과, 중국에서 수용된 상상의 동물인 용, 그리고 불교의 전래와 함께 들어온 인도의 용이 서로 합하고 관련을 맺으며 존재하였고 시대의 흐름에 따라 변천하였다.     

삼국유사의 저자 일연의 기록에 의하면 용 신앙은 불교가 들어오기 전부터 실존해있던 신앙이다.    

사량리의 알영정 옆에 계룡이 나타나 왼쪽 옆구리에서 여자아이가 태어났다. 얼굴과 모습이 매우 고왔으나 입은 닭의 부리와 같았다.    

사로 6촌에 박혁거세가 출현한지 얼마 지나지 않아 사량리의 신성한 우물인 알영정에 계룡이 나타나 여자아이를 낳으니 이가 곧 알영이다. 그는 박혁거세왕의 왕비가 되어 함께 신라를 다스렸다. 이 계룡은 알영정이라는 우물, 즉 수신과 연관되고 있다.     

한편 불교의 수용은 고유의 용 신앙에 급격한 변화를 가져오게 된다. 용 신앙은 외래종교인 불교의 용 관념의 유입으로 변형되었으며, 전통적 용들은 불교의 일부로 수용되거나 종속되었다. 불교에 귀의한 용은 선룡 법행룡 보덕룡 등으로 인간 세상에 이익을 주는 존재로, 불교에 귀의하지 않은 용은 비법행룡, 악룡, 독룡으로 분류되었다. 불교적 입장의 선악 개념에 의하여 전통적인 용은 불교의 위력 앞에 교화되거나 퇴치됨으로서 불교신앙의 매개물이 되었다. 만어사의 독룡이나 혜통항룡조의 교룡, 또한 구룡사 옥룡사 보림사 등 사찰의 창건설화에서 불교 승려에 의해 굴복당하는 독룡은 대개 이러한 과정에서 나타나는 전통적 용의 퇴치 사례이다. 초기 신라인들은 용과 갈등을 보여왔다. 이후 신라왕권의 안정기에 접어들어서는 왕권과 국가를 위해 봉사하는 호국 용으로 변하게 된다.    
▲ 문무왕의 수중릉    
▲ 문무왕 수중릉 주변은 무속인을 위한 기도장소가 되었다.      

문무왕 “짐은 죽은 뒤 호국의 대룡이 되어 불법을 숭봉, 국가를 수호하겠다.”    

‘문무왕 법민’조와 바로 그 다음의 ‘만파식적’조에 있는 바를 합해서 문무왕의 호국 용에 대한 하나의 설화를 들 수 있다.     

삼국사기에서 문무왕은 평소에 늘 지의법사에게 말하기를, “짐은 죽은 뒤 호국의 대룡이 되어 불법을 숭봉하고 국가를 수호하겠다.” 하였으므로 지의법사는 ”용은 축생인데 축생의 보를 받으려고 하십니까?‘하니 왕은 “나는 영화를 오래 누렸으므로 세간이 싫고, 나쁜 업보인 축생이 되더라고 그렇게 하고 싶다”고 하였다. 그러한 문무왕이 자기의 사후에 불교식으로 장례를 마친 후 그 유골을 동해 입구에서 산골하였다.     
▲ 감은사지 동탑          

문무왕 서거 이후 즉위한 신문왕 2년 동해변(대왕암 건너 보이는 기슭)에 감은사를 세웠다. 이 감은사는 본래 문무왕이 왜구으로부터 나라를 지키기 위해 세우기 시작했던 절인데 완성을 보지 못하고 서거를 한 이후 그의 아들 대에 완성을 보았다. 감은사는 대왕의 뜻처럼 호국 용이 된 문무왕이 머무는 사찰로 명명되었다. 그것은 금당 아래 섬 돌밑에 용이 들어와 쉴 수 있는 작은 구멍을 동쪽을 향해 파놓음으로 용이 되었다는 문무왕의 전설이 현실 속에서 재현되는 의미를 가지게 된다.     

신문왕 2년 5월 초하루 동해 해관으로부터 “동해 가운데 조그만 산이 하나 감은사를 향해서 떠와서는 물결을 따라 오락가락 한다.”는 보고를 받았다. 이 소식을 접한 신문왕은 곧 일관에게 점을 치게 하였다.     

“성고(문무왕)께서 지금 바다의 용이 되셔서 삼한 즉 신라를 진호하는데, 삼십삼천의 하나인 김유신공과 함께 국가수호의 보물을 내놓으려고 하는 것입니다. 전하께서 바닷가에 나가신다면 반드시 큰 은혜를 얻을 것입니다.”    

이와 같은 일관의 말을 듣고 신문왕은 그 달 7월에 이견대로 가서 그 산을 바라보고, 사람을 시켜서 산세를 자세히 살펴오게 하였다. 그 산 모양은 거북이의 머리와 같고 그 위에는 대나무 하나가 나 있는데 낮에는 둘이 되었다가 밤에는 하나로 된다는 것이다. 그날 밤 왕은 감은사에서 잤으며 그 이후 7일 동안 천지가 진동하며 비바람이 쳐서 캄캄하므로, 16일에야 맑게 개어 왕은 바다로 해서 그 산으로 들어가니 한 용이 검은 옥대를 받치면서 영접을 하는 것이었다. 여기서 왕은 용과 대화하기를 ”왕께서 이 대나무를 가져가서 피리를 만들어 불면 천하가 태평할 것이다, 지금 성고께서 바다의 대용이 되시고 유신이 천신이 되어 이들 두 성인이 한마음으로 이 귀한 보물을 내어서 왕께 바치도록 한 것입니다.“라고 말하고 사라졌다.     

왕은 돌아와 그 대마무로 피리를 만든 것이 만파식적이며 이것은 신라를 지켜주는 귀물이라고 전해진다.     

문무왕이 되고자 했던 용은 그저 부처를 호위하는 팔부중의 하나일 뿐으로 부처보다 하급의 지위에 해당한다. 신라사회를 3개의 통치유형으로 구분하여 살펴보면 상고기 신라의 용은 알영과 석탈해의 사례와 같이 건국설화나 국왕과 결합한 고유신앙의 초기 水神의 형태를 보여준다. 이후 불교의 수용으로 호법룡이 등장하면서 전통적 龍神은 불교에 수용되어 간다. 중고기의 호법룡은 동시에 호국룡의 기능을 하였는데 이는 당시 왕실의 불교 수용이 왕즉불 사상과 같은 호국적 성격을 띠고 있었던 것과 일치한다. 중대에는 불교적 성격을 벗어난 새로운 성격의 호국룡이 등장한다. 문무왕은 부처가 아니라 호국룡이 될 것을 택하였다. 하대에 이르면 원성왕대에 초라한 3龍을 끝으로 호국룡은 사라지고 국가 통치체제에서 벗어난 지방의 용들이 활동이 나타난다. 이는 신라 지배층의 쇠퇴와 지방민들의 성장을 반영한다.    

삼국유사에 등장하는 용의 모습-호법, 호국, 호법·호국 양면성, 악룡    

삼국유사에 등장하는 용의 모습 중 하나는 불교를 배경으로 등장한 호법용의 모습이다. 이는 원한을 가진 악룡이 있었는데 이 악룡이 부처님의 설법을 듣고 불교에 귀의하여 불법을 수호하기로 마음먹었다는 내용이 대부분이다.     

둘째는 나라를 수호하는 용이 있다. 이 용은 불법을 수호하는 용과 비슷한 면이 있지만 목적은 확연히 다르다. 호국룡은 국가와 국토를 수호하는 용의 역할을 강조하여 부르는 명칭이다. 호국룡의 경우는 불교와도 관계가 있지만, 전형적인 불교신앙의 용보다는 우리 토지와 국가를 수호하는 전통적 용의 유형에 더 근접할 것으로 생각한다. 국가를 수호하는 것은 본래 국왕과 지배세력의 임무이다. 호국의 용들은 성격상 국가의 집권세력과 왕권과 밀접하게 관련을 맺게 되며 정치적인 상황의 변화와도 무관하지 않다. 문무왕의 예가 바로 그것이다.     

다음은 삼국유사에 나타난 호법용과 호국용의 양면을 드러낸 사례이다. 호국룡의 본래 성격은 국가의 수호신이므로 불교의 호법룡과는 그 성격이 반드시 일치하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중고기의 신라에서는 불국토 사상에 따라 호법과 호국이 서로 일치하는 경우도 있다.     

황룡사 9층석탑(제 27 선덕왕대)條의 대화지 룡과 그의 장자인 황룡사 용이 불법수호자이다. 이 조에서 자장의 이상은 보리를 구하려는 개인적 이상과 신라의 평온과 삼국의 통일이라는 국가적 이상으로 구분된다. 개인적 이상은 문수보살에 의해 성취되며, 국가의 이상은 두 용에 의해 가능하게 되는 것이다.     

명랑신인(제 27 선덕왕대)조에는 명랑의 이상은 불교 弘布라는 불교적 이상과 신라의 평온이라는 국가적 이상으로 대별된다. 여기서 해룡의 역할은 두 가지를 다 가능하게 하는 것이다.    

셋째는 호국룡과는 반대로 악룡도 묘사된다. 악룡은 불법을 수호하는 호법룡의 전신이거나 아니면 그저 악행을 일삼는 용이다. 이러한 예의 대표적인 예가 수로부인을 납치한 해룡이다.    

어산불영(가락국 수로왕대)條의 독룡(毒龍)은 훼방자로 묘사된다. 이 條에서 수로의 이상은 가락국의 평온이라는 국가적인 것이다. 이러한 것은 부처의 위력에 의해 쉽게 성취된다.     

혜통강용(제32 효소왕대)條에서 혜통의 이상은 해원(解寃)이라는 개인적 이상, 불교홍포라는 불교적 이상, 신라의 평온이라는 국가적 이상으로 대별된다. 이러한 것은 불교적 주술에 의해 성취된다.    

수로부인(제 33 성덕왕대)조에서 수로부인의 이상은 신라의 평온이라는 국가적인 것이다. 이러한 것은 제의에 의해 또는 군중의 노래에 의해 성취된다.     

이러한 3가지는 용이 훼방자로서 국가적 이상을 위협한다는 공통점을 가지고 있다. 그러나 처음과 두 번째는 악독룡의 폐해가 두드러지게 나타나며 이를 불력에 의해 해결하는 반면 세 번째에서는 이러한 폐해가 미미하게 드러나 군중의 노래에 의해 해결하고 있다는 차이가 보인다.     

불교의 해수관음 신앙과 한국의 용신앙의 융합    

네팔에서 발생한 불교는 지역의 토착신앙인 나가(naga)가 용으로 번역되었다. 중국에 불교가 전래되면서 나가는 불교적인 용과 한국 토착신앙으로 용이 결합되는 혼합적 용 신앙으로 발전하게 된다.     

이와 같은 주장은 필자가 2014년 전국해양문화학자대회에서 발표를 통해 주장했다. 불교의 해수관음 신앙과 한국의 용신앙의 융합을 연구한 것이다.    

한국에서 용신이 보이는 지역으로 해안지방이다. 농경문화가 받아들였던 용의 이미지는 가정의 행복, 장수복록, 다남,무병 등을 기원하는 용왕제(굿)으로 신앙된다. 고구려 소수림왕 2년(372) 불교가 전래되면서 삼국시대 불교가 지배적인 종교가 되면서 용왕보다 부처, 보살에게 비는 기원의 형태로 바뀌게 되었다는 주장이다.     

전통사회에서 용은 사슴의 뿔, 소의 머리, 뱀의 몸, 물고기의 비늘, 독수리의 발톱, 임과 턱 아래 수염을 하고 있는 형상으로 비를 내리게 하고 요괴나 귀신을 제압하는 능력이 있다. 장원급제, 입신출세, 만사형통, 등 상서로운 의미와 더불어 제왕을 상장하기도 하고 불교에서도 호불신으로 여겨지고 있다. 즉 신령의 귀물이요 권위의 상징인 동물이다.     

우리 조상들은 용이 인간과 가까운 곳에 살고 있다고 믿었다, 바다나 큰 강은 물론 집 우물이나 작은 개천, 큰 바위 아래치성을 드리는 샘터에도 용이 있다고 생각했다. 조상들은 이런 생각과 함께 용을 믿고 신앙을 발전 시켰다. 땅 위의 일은 산신령이 주관하고 하늘이나 바다는 용이 지배한다고 생각했다. 하늘의 천재지변이나 뇌우를 관장하는 용은 용신으로, 바다를 관장하는 용은 용왕으로 신격화하였던 것이다.    

불교경전에서의 용-천인이나 인간보다 용에게 귀의하도록 허락해

불교경전 속에 등장하는 용에 관한 것은 헤아릴 수 없이 많다. 용은 호법팔부신중의 하나다.     

붓다와 용의 만남을 『불본행집경』에서는 “이 때 용왕이 붓다에게 나아가 다리 아래에 예의를 갖추고 나서 ‘붓다여 저의 이 궁전은 옛날부터 일체제불에게 보시하였습니다. 붓다께서는 저를 보살펴 주는 마음으로 보시를 받으시고 이 궁전에 머물으십시오.”라고 했다. 구유손불 ․구나함불․ 가엽불(拘留孫佛 ․拘那含佛․ 迦葉佛)등의 과거불에게도 궁전을 보시하여 인연이 깊다는 것이다. 즉 불법과는 오랜 인연이 있다는 것이다. 이와 같은 인연이 있으니 “오늘 붓다께서 저를 위해 잠시 저의 궁전에 머무시고 이 궁전을 과거의 세 붓다께 보시하였는데, 오늘 네 번째로 저를 위하여 저의 청을 받아 주신다면, 네명 붓다께서 저의 궁전을 받으시는 공덕이 구족하게 될 것입니다.”라고 하였다.     

이때 붓다께서 그의 청을 받아들여 곧 가라용왕 궁전으로 들어가, 가부좌를 하여 7일 동안을 일어나지 않고 해탈의 즐거움을 받으시고 7일이 지난 뒤에 정념 정지의 삼매로 일어나셨다고 전해지고 있다.     

그리고 용왕에게 말하기를 ‘용왕아 너는 나의 곁으로와 삼귀와 오계를 받아 너의 생애에 대안락을 얻도록 하라’고 하셨다. 그러자 용왕은 “붓다의 가르침을 따라 마음에 어김이 없을 것이며 붓다의 말씀대로 하겠습니다”라며 곧 붓다를 향하여 합장하고 붓다와 법과 승단에 귀의하였으며, 다시 붓다에게 계를 받았다. 세간 중에서 최초로 우바세의 이름을 얻었으며 축생 가운데서 가장 먼저 삼귀의를 설해 받은 것이 바로 가루왕이다.    

붓다가 성불한 이후 아직 이 세간의 어느 누구에게도 불법의 참 진리가 설하기 전에 천인이나 인간보다 먼저 축생에 속하는 용에게 귀의하도록 허락하고 있다. 그러나 이것은 단순히 최초의 수식어가 아니라 오래전 구나함불․ 가엽불(拘留孫佛 ․拘那含佛․ 迦葉佛) 등의 과거불로부터 인연이 있었음을 말하고 있는 것이다.    

한반도라는 지역을 각각 지배하고 있던 고구려, 신라, 백제가 신라 주도의 통일이 되었다. 오랫동안 독립된 국가체제를 유지해온 국가의 구성원들은 통일이후 갈등을 보이게 된다. 새로운 지배세력에 편입된 신라는 종교적으로는 원효와 민속불교계통 승려들을 중심으로 정신적 통합을 시도하고 있었다. 이와 같은 노력에도 불구하고 갈등은 정권을 위협하는 수준에 이른다. 이를 권력으로만 지배할 수 없는 신라의 입장에서는 당시 민간에 널리 신앙되고 있던 용 신앙과 불교 그리고 통일의 대업을 이룬 무장 김유신을 통한 강권적 지배를 위해 그가 문무왕과 함께 하고 있다. 그리고 그들이 준 신물이 적의 침략으로부터 지켜줄 수 있는데 그것은 용이라는 신물이라는 의식을 통해 지배를 모색하고 있다. 문무왕, 신문왕 2대의 걸쳐 붓다의 도움과 민간신앙의 용신앙을 통해 국가와 왕실이 보호되고 있다는 논리를 호국용 신앙으로 설명하고 있다. 이와 같은 종교와 정치권력의 지배는 거대한 종교집단과 통치집단간 결합을 통해 새로운 신권국가를 지향하고 있다. (삼국문화유사원장)    

*(후기) 문무왕이 호국 용이 되었다는 전설 때문에 10여년 전부터 무속인들 사이에는 용궁기도처로 이곳을 찾고 있다. 한적한 어촌마을에서 관광객을 상대로 작은 회집을 운영하던 사람들이 가게를 개조하여 무속인들을 상대로 굿당을 겸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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