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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대세계불교60●인도불교<6>

이치란 | 기사입력 2018/06/08 [06:44]
부처님과 보리수 3대에 얽힌 사연

현대세계불교60●인도불교<6>

부처님과 보리수 3대에 얽힌 사연

이치란 | 입력 : 2018/06/08 [06:44]
▲ 스리랑카 아누라다뿌라 마하메가 정원에 있는 제2세대 보리수.     

인도의 현대불교를 소개하면서 5회에 걸쳐서 보드가야의 보리수와 대탑에 집중해서 글을 썼다. 아직도 몇 회가 더 남았다고 생각하면 된다. 인도불교사에서 보드가야의 대탑사원과 보리수는 그만큼 상징성이 있는 곳이다. 싯다르타 고오타마가 이 보리수 아래서 도를 이루었기 때문에 이 보리수는 성수(聖樹)로 여겨진다. 정작 부처님 자신은 제자들에게 무엇에 집착하는 망집(妄執)을 버리라고 가르쳤다. 어딘가에 집착하면 바로 볼 수 없고 바른 생각을 할 수 없기 때문이다. 이런 불교사상과 정신은 중국에 오면 특히 선종에서는 방하착(放下着)으로 강조된다. 불교가 중국에 수용 된지 1천여 년이 지나면서 불교는 확실하게 중국적인 불교로 변용된다. 다시 보리수 이야기로 돌아가면, 싯다르타 고오타마가 앉았던 보리수는 성수가 되어서 제자들은 물론 후세에 불자들의 귀의 대상이 되었다. 그런데 이 보리수의 운명은 순탄하지가 않았다.     

지금의 보드가야 보리수는 본래 보리수로부터 3대에 해당된다. 제1세대 보리수는 12세기경 무슬림의 인도 침입 때 이미 잘려져서 사라져 버렸다. 이후 보드가야에서 기원전 288년에 남쪽으로 뻗은 가지를 옮겨 스리랑카 아누다라뿌라에 심었던 것을 다시 가지를 이식하여 오늘날의 보리수로 자란 것이다. 이렇게 본다면 현재 인도 보드가야 대탑사원 안에 있는 보리수는 2백년 정도의 수령(樹齡)을 갖고 있고, 스리랑카의 보리수는 2300여년의 수령을 지니고 있다. 2천5백 년 전의 원래 보리수는 무슬림들의 도끼날에 사라져 버린 것이다. 그러므로 지금 보드가야 보리수는 제2세대 보리수에서 다시 이식해 온 제3세대 보리수라고 할 수 있다. 그래서 세계 최고의 보리수는 스리랑카 아누라다뿌라에 있다고 보면 되는데, 지금 보드가야의 보리수는 스리랑카의 보리수에서 이식해 온 것이므로 제1세대 보리수와 수맥(樹脈)이 연결되는 것이다.     

일반인들은 무슨 나무가 그렇게 중요하냐고 할지모르지만 불교에서는 중요하다. 보리수는 각수(覺樹=깨달음의 나무)라고 해서 견성성불(見性成佛)의 상징적 성수로 승화된 성물로 보는 것이다. 그 자체야 하나의 나무에 불과하지만 종교적 신앙적 차원에서 의미가 부여가 되어 있는 것이다.      
▲ 인도의 한 불교행사에 참석한 한국불자들이 보리수 아래서 기념촬영을 하고 있다.  

그러므로 이 보리수 신앙은 인도는 물론 세계의 모든 불교 국가에서는 성수로서 보호받는다. 원래 인도 보드가야 보리수가 스리랑카에 오게 된 사연은 인도 亞 대륙을 통일했던 마우리아 왕조의 아소카 대왕의 딸인 상가미따(Saṅghamittā 281〜202BC)에 의해서다. 상가미따(상가미트라)는 아소카 대왕의 첫째 왕비 사이에서 출생한 딸이었다. 아소카 대왕의 자녀들 가운데는 출가자가 몇 명 있었는데, 오빠인 마힌다도 출가하여 비구가 되었다. 아소카 대왕은 인도를 천하통일하고 불교를 국교로 삼아서 불교사상과 정신을 통치이념으로 채택, 불교를 널리 전도하도록 했다. 스리랑카에도 불교를 전하게 되었는데 당시 스리랑카 전도 총 팀장이 마힌다(285∼205 기원전)장로였다. 마힌다 장로는 아소카 대왕의 아들이었다. 이에 여동생 비구니였던 상가미따는 오빠의 배려로 스리랑카에 보드가야에서 보리수 가지를 가지고 가서 이누라다뿌라의 마헤마가 정원에 이식했다. 그리고 스리랑카에 비구니 승단을 설립했다. 상가미따는 그 당시 10명의 비구니와 함께 동행 했다.

이렇게 해서 스리랑카 승단에 비구니 승가가 형성되고, 보리수 신앙도 보편화 했다. 물론 스리랑카에도 보리수나무가 많이 있지만, 이 보드가야에서 이식해 온 보리수가 신앙대상이 되고, 스리랑카 섬 전역 사원에 퍼지게 된 것이다. 인도 보드가야에 있는 원조 보리수가 무슬림들의 손에 베이자, 보드가야에는 한동안 불교가 존재하지 않았다. 또한 보드가야 대탑사원도 파괴되어 부처님이란 존재 자체마저 망각하게 되었고, 힌두교란 거대한 신앙범위 안으로 흡수되고 말았다. 이후 중세시대에 버마의 통치자의 후원으로 보드가야 대탑복원이 시도되었지만, 불발에 그쳤다. 인도와 스리랑카가 영국 식민지가 되면서, 보드가야는 다시 주목받게 되고 따라서 보리수 신앙 또한 살아나게 된 것이다. 그렇다보니 자연스럽게 보리수의 역사를 추적하게 되고 어떤 보리수가 오리지널이냐 하는 문제가 대두되어서, 결국 스리랑카에 있는 보리수 가지에서 다시 보드가야에 이식하게 되어서 오늘날의 보리수로 성장, 많은 사람들의 신앙대상으로 각광을 받고 있다.     

보드가야를 찾는 불자들은 당연히 이 보리수에 관심을 갖게 되고 대탑 자체보다도 보리수에 집중하게 되는 것은 어떤 상징성 때문이다. 보리수 아래서 무상대도(無上大道)를 성취했기 때문이다.
▲ 인도를 통일했던 아소카 대왕의 딸인 상가미따 비구니. 스리랑카에 보리수나무를 이식했다. 2천 3백 년 전.     
▲ 현재 5천여 명의 비구니승단을 형성하고 있는 스리랑카 비구니 스님들이 1년에 한 번씩 모여서 총회를 개최하고 있다.        

상가미따 비구니는 스리랑카에 비구니 승단을 설립했지만, 결국 스리랑카 승단은 무너지고 말았다. 1천년 이상 공백상태였던 비구니 승단을 다시 일으켜 세워준 나라 불교가 바로 한국불교다. 1996년 12월 5일 인도 사르나트에서는 한국 스님들이 주도하는 비구니 수계식이 열리고 있었다. 매우 역사적인 순간이었다. 11명의 스리랑카 여성들에게 비구니 구족계를 설하는 의식이 거행되고 있었는데, 그것은 바로 상가미따를 포함한 11명의 비구니들이 스리랑카에 보리수와 비구니 승단을 설립했기 때문에 그 상징적 의미로 11명에게 비구니 구족계를 수여하고 있었는데 그 중심에는 한국불교가 있었다. 이후 스리랑카에는 5천여 명의 비구니들이 스리랑카 전역에서 포교활동을 벌이고 있다.
보검 이치란 박사(원응: 동방불교대학 총장)
해동세계불교연구원장(www.haedongacademy.or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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