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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불교(증산신앙) 종단의 종교 혼합현상③서백일의 용화교

장정태 논설위원 | 기사입력 2018/11/26 [07:26]
자신을 신격화, 강증산의 사상을 교묘히 유합해 종교왕국을 꿈꿔

한국불교(증산신앙) 종단의 종교 혼합현상③서백일의 용화교

자신을 신격화, 강증산의 사상을 교묘히 유합해 종교왕국을 꿈꿔

장정태 논설위원 | 입력 : 2018/11/26 [07:26]

자신을 신격화, 강증산의 사상을 교묘히 유합해 종교왕국을 꿈꿔
     

<연재 순서>
①종교적 혼합의 의미와 역사
②김형렬의 미륵불교
③서백일의 용화교
④김계주의 무을교    

본 교를 창종한 서백일(1893-1966)은 전남 구례 출신으로 본명은 한춘이며 호는 진공, 청죽, 현무, 해월 등 여러 가지를 갖고 있었다. 그는 11세 되던 1923년에 전남 승주에 있는 선암사에 입사 수도생활을 하다가 1931년에 전남 구례군 간운면 구고미에 ‘금산사미륵불교포교소’라는 간판을 걸고 차경석의 제자였던 조제승과 함께 ‘미륵불교’를 포교했다.

서백일도 처음 보천교의 신도로 있을 때에는 증산을 구천상제로 신앙하였지만 뒤에 자신이 창교할 때에는 증산을 미륵불로 신앙하였다. 그가 처음 창교할 때에 ‘금산사미륵불교포교소’라는 간판을 걸게 된 것은 이러한 신앙이 뒷받침되어 있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서백일의 미륵불 신앙은 미륵불로 태어난 강증산이 신술적으로 죽음을 가장하고 실제로는 살아 있어서 광덕도, 지리산 등에서 서백일에게 앞으로 다가오는 삼재팔란을 막아내고 후천용화세계를 맞이할 의통과 도통을 전수하었다.는 것이다.

서백일은 평소 “역사의 순환과정에서 볼 때 불운(佛恩)이 아니라 선운이다. 앞으로 미륵불 시대가 온다. 나는 선(仙)을 맡아서 미륵불이 출세하도록 길을 닦아주는 역할을 한다”고 말한 것으로 그는 증산교를 바탕으로 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이 교단의 본부(김제군 금산면 청로원 성화대)를 중심으로 하는 3리 내에서만 구제될 수 있다고 하여 신자들은 가산을 방매하여 교단에 바치고 이곳에 이주하였던 것이다. 이 밖에도 서백일은 미륵불의 대명이라 하여 신도들에게 내리는 법문을 수시로 발하여 교인들을 유혹 하였다.

불상을 모신 것도 실제로 신앙하는 부처님은 증산교에서 증산의 영체라고 보는 금산사의 미륵불이었다. 이와 같이 강증산 미륵불을 신봉하기 때문에 불전에 불공하는 예식은 불경을 외우는 것이 아니라 <태을주><시천주><오주><도통주><운장주> 등 증산교에서 수련하는 도통공부를 하는 것이다.

1935년 하동으로 이주 포교할 때에는 ‘일련정종 포교소’ 간판을 걸고 불단에는 일련정종의 만다라를 봉안 南無妙法蓮華經(남묘호렌게교)를 불렀지만 그때에도 실제로 믿는 부처님은 증산미륵불이었다.    
▲ 서백일의 용화교(종)의 경전은 「용화보전」을 비롯, 「만법전」, 「현부실기」, 「팔량경」, 「심판서·공덕문」, 「특관불화론」, 「미륵성전」, 「진공묘유경」, 「성화진경」, 「미륵무불경」, 「미륵상생경」 등을 소의경전으로 하여 불교를 표방하고 있으나 실제로는 증산계를 모체로 하고 있다.     © 매일종교신문

서백일의 용화교(종)의 경전은 포광 김영수 선생이 지어준 「용화보전」을 비롯, 「만법전」, 「현부실기」, 「팔량경」, 「심판서·공덕문」, 「특관불화론」, 「미륵성전」, 「진공묘유경」, 「성화진경」, 「미륵무불경」, 「미륵상생경」 등을 소의경전으로 하여 불교를 표방하고 있으나 실제로는 증산계를 모체로 하고 있다. 특히 「성화진경」은 그대로 증산의 일대기를 기록한 것에서 더욱 두드러진다.    
 
특히 용화교의 주요 경전가운데 「만법전」 「得觀佛化論」 「각세진경」 「현무실기」 「성화진경」 등 7-8종의 비밀경전을 만들어 일반신도에게는 공개치 않고 최고 간부만이 갖게 하였다. 그 비밀 경전에서 엿볼 수 있는 것은 자신을 신격화하고 강증산의 사상을 교묘히 유합시킴으로써 금산사 어구 용화동을 근거로 종교왕국을 꿈꾸었던 것이다.

서백일은 1948년 지리산 화계에서 14세에서 15세되는 소녀들을 모아 수좌공부를 시킨다고 하면서 사보살 놀이, 팔선녀를 가르친다고 하면서 가무를 시켰다. 이것이 뒤에 악명 높은 수좌제의 시작이었다. 그는 교단이 확장되어 감에 따라 미륵불이 출세할 때 미륵불을 모실 사람은 105명에 한정된 수의 여자인데, 이들을 수좌라는 이름으로 교단의 한 기구를 만들었다.

서백일이 미래에 미륵을 모실 시녀의 숫자로 105명으로 한정한 것은 이 수좌들은 미륵불을 모시는 시녀일 뿐만 아니라 중생을 제도하는 권능이 주어진다고 하면서 서백일 자신이 교육을 직접 담당한다고 하였다.    

증산은 종이 한장에 유‧불‧선 세자 옆에 각각 니구, 서역, 고현이라고 쓴 것을 불사르고, 그 종교를 거두고, 그것들의 정수만을 복합하여 무극대도를 열으셨다. 이렇게 함으로써 미륵의 출세를 기다리고 극락세계에 들기 위한 사십팔원을 올려서 세간에 혹세무민하여 세간에 해를 끼치는 불법은 그치고, 그 자리에 만민들이 가활할 수 있는 곳이 된다. 또, 불법의 백팔 염주가 뜯어 고쳐지므로써 불법은 제대로 조화되는 것이니, 백오는 동지에서 청명까지 백오이고, 한식이 백육일이 되는데 백오가 한도수이고, 그 후부터 새로운 것을 의미하는 슷자이다. 따라서 그 수는 생장운이 끝나고 성숙운에 들어가는 뜻을 지니고 있다. 그러므로 불법운은 다하고 새로운 조화운으로써 새 천지가 열리는 것이다.    

또한 용화교의 교주 서백일이 제시한 105명의 숫자도 증산의 가르침에 근거하였음을 알 수 있다.   

1962년 4월 16일 전주지법 박신화 판사는 위계에 의한 간음죄로 구속기소된 서씨에게 징역 1년6개월을 선고...... 66년 3월 용화교 남자수좌였던 소윤하씨에게 피살됐다.    

교주 서백일이 이같은 추문때문에 비명에 죽자 당시 일반사회의 비난과 조소는 극에 달했고, 많은 신도들과 대부분의 수좌들은 조계종 등 다른 불교 종파로 옮겨 가버렸다. 몇 명 남지 않은 여수좌와 아직도 용화세계에 대한 미련을 버리지 못하는 신도들을 데리고 제2대 교주가 된 김복록은 전주 완산동 원각사에 본부를 정하고 교단을 이끌고 나갔다.

서백일은 생전에 자신의 종교단체를 일제시에는 일련정종에 편입시켰듯 해방후에는 종교활동의 편익을 도모하기 위해 불교교단에 편입시키려는 노력의 일환으로 대한불교 조계종 석청담 스님을 뵙고 종단등록을 시도하였으나, 청담스님은 다음과 같이 거절하였다.    

불교는 무소득이요. 상주법의 이치가 있는데 서교주의 용화교는 그게 없었다. 그러니 불교가 아닌 불교의 탈을 쓴 유사종교, 유사불교라고 할 수밖에 없다...... 서교주가 불교를 모른다는 말을 하지 말아달라.고 당부했다. 그래서 나는 자진해서 그런 말은 않겠으나 누가 용화교가 어떤 종교냐고 묻는다면 불교는 아니라고 하겠다고 했다.    

그후 많은 변화를 거듭하여 현재는 구악을 일소하고 건전한 하나의 불교종단으로 바른 신행을 하고 있다는 견해도 일부 있다.    

서해월의 용화교와 현재의 대한불교 용화종은 큰 차이가 있음을 알리고 싶다. 서교주가 죽고 나서 대한불교 용화종은 변신을 거듭해서 지금은 용화교의 탈을 벗고 본래적인 불교종단으로 발전하고 있다. 독자들은 이점 착오없기를 바라며 이 책에 기록된 사실들은 어디까지나 서해월 교주 생전의 용화교 시대에 일어난 일임을 부기해둔다. 교주 서해월이외의 어떤 인물도 교주의 비행과 관련없고 오직 서교주에 국한함을 밝힌다.    

서백일 사후 용화교(宗)에서의 그에 대한 예우는 다음의 내용에서 어느 정도 파악될 수 있다.    

이절의 구천대에는 미륵부처가 중앙에 안치되어 있고 그 옆에는 어디선가 많이 본 듯한 인상을 가진 금빛으로 도금된 불상 하나가 있었다. 그런데 웬일인지 그 불상은 수염까지 길게 늘어뜨리고 머리는 민대머리였다. 자세히 살펴보니까 용화교주 바로 그의 불상이였다.    

주 경전에 대해서는 막연하게 석가세존이 설한 「소설경」을 소의경전으로 하고 있는 용화교는 비교적 오랜 활동을 해온 종파이지만 본존인 미륵불과 종조 진표율사, 그리고 종지 사이에 교리적인 연계가 모호하여 교리의 체계가 서 있지 않은 종파로 규정하고 있다.

현재 용화교의 주요행사로는 부처님 오신날, 성도, 열반재, 우란분재, 석존출가일, 진공선사탄생기념일(음1.6), 열반일(음3.6) 관음재일기도(매월 24일), 신년산림기도(음1.3)등이 있다. 주요 종단 행사를 통해 보면 진공 서백일과의 관계는 명확하지 않음이 들어난다.
(삼국유사문화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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