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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풍수지리설의 사상적 근원③중국 풍수와 불교가 혼합되어 비보풍수로 발전

장정태 논설위원 | 기사입력 2018/12/28 [07:53]
풍수 이론 도입, 한국 풍수 발전시킨 도선 국사

한국 풍수지리설의 사상적 근원③중국 풍수와 불교가 혼합되어 비보풍수로 발전

풍수 이론 도입, 한국 풍수 발전시킨 도선 국사

장정태 논설위원 | 입력 : 2018/12/28 [07:53]
<한국 풍수지리설의 사상적 근원 연재순서>
①풍수는 땅의 생명을 연구하는 학문
②자손의 부귀영달 바라는 마음이 아니다
③중국 풍수와 불교가 혼합되어 비보풍수로 발전    

풍수 이론 도입, 한국 풍수 발전시킨 도선 국사   
    
우리나라 풍수참위설(風水讖緯說)의 시작은 신라 말과 고려 초에 걸쳐 살았던 도선(道詵)에게서 찾을 수 있다. 우리나라는 지역마다 자생 풍수가 있었으나 학문적인 체계로는 정립되지 않았으며, 중국의 풍수 이론을 도입하여 한국 풍수를 발전시킨 도선 국사가 『도선비기(道詵秘記)』라는 이름의 풍수비기를 저술했다. 그는 ‘음양비보설(陰陽裨補說)’에 따라 전국의 역처(逆處)를 찾아 비보사찰(裨補寺刹) 3,800곳을 세우게 했으며, 풍수 지리적으로 결함이 있는 곳에는 탑을 세워 보완했는데, 이를 ‘비보탑’이라 하였다. 대표적인 비보탑으로는 오대산 월정사의 ‘팔각구층석탑’(국보 48호)이 있다. 풍수가들은 일찍부터 월정사를 부처님의 법이 번창할 터전으로 지목하였다 한다. 『삼국사기』에 의하면 월정사의 석탑이 불당 중앙에서 동편으로 약간 치우쳐 있어 처현 스님이 중앙으로 옮겨 놓았는데, 그때부터 절에 영험이 나타나지 않았다. 그런데 지관이 어느 날 이를 보고는, ‘탑을 세울 곳이 아닌데 왜 동쪽으로 옮기지 않느냐’라고 하여, 원래 위치로 옮겨 놓으니 다시 영험이 나타났다고 전한다. 현재 월정사 팔각구층석탑은 중앙에서 동으로 약 170cm정도 비껴 서있어 이 기록과 일치하고 있다.

고려의 수도를 송악에 세운 것도 풍수참위설에 의한 것이었으며, 일단 국운이 기울고 세상이 불안해지면 지덕(地德)이 쇠했다 하여 또 천도를 선동하기도 하였다. 인종(仁宗) 때 묘청의 서경천도설(西京遷都說)이 바로 그 대표적인 것이라 할 수 있다.     

왕조가 쇠락하여 불안한 시대에도 이러한 풍수도참설이 성행했는데 대체로 지배계층에서 자신들에게 유리하도록 여론을 조작한 경우가 많았다. 임진왜란과 병자호란을 겪고 극도로 혼란스러웠던 17세기 이후에는 일반 백성들에게 신앙을 불러일으킨 새로운 풍수도참설들이 유행했다. 근대 이후에도 기독교계를 제외한 대부분의 신흥 종교들이 전통적 민간 신앙인 도참 신앙과 무속 신앙에 기초한 풍수사상을 도입하고 있다.    
▲ 고려 시대의 풍수는 불교를 중심으로 도선 국사가 중국 풍수를 우리 실정에 맞게 체계화한 ‘비보 풍수’가 성행했다. 사진은 순천시 선암사의 도선국사 영정.    

풍수와 불교가 혼합되어 비보풍수로 발전    

풍수에서도 시대별 특징을 보인다. 고려 시대의 풍수는 불교를 중심으로 도선 국사가 중국 풍수를 우리 실정에 맞게 체계화한 ‘비보 풍수’가 성행했으며, 조선 시대에는 유교 사상의 ‘효’를 중요시하면서 묘지를 조성할 때 주로 응용되는 ‘음택 풍수’가 강조되었다. 이처럼 풍수는 시대에 따라 유행하던 ‘이론’과 주로 관심을 갖던 점에서는 약간씩 차이를 보이고 있지만, 자연을 중심으로 하는 인간의 생활 터전에서의 조화와 상생을 근간으로 하고 있다는 점에서 공통점을 가지고 있다. 태조 이성계가 조선을 개국하고 천도를 계획하면서 풍수상의 길지인 무악(毋岳)과 계룡산을 두고 고심하다가 한양을 수도로 결정하기까지는, 결국 자연과 인간의 삶터를 생활의 최적 공간을 기준으로 선택했던 것으로 보인다.     

조선 시대 이름난 풍수사로는 승려로는 무학 대사(無學大師), 서산 대사(西山大師), 성원 대사(性圓大師), 일지승(一指僧), 일이승(一耳僧) 등을 들 수 있으며, 학자 출신으로는 계룡산 천도를 헌상(獻上)한 권중화(權仲和), 경복궁의 좌향을 남면(南面)시킨 정도전(鄭道傳), 세종 대에 집현전에서 풍수를 가르친 정인지, 『필원집기(筆苑雜記)』를 저술한 서거정(徐居正), 안동에서 비보 풍수(裨補風水)로 각종의 구제 사업을 벌인 맹사성(孟思誠)과 정북창, 성유정, 남사고, 박상의, 이지함, 윤선도, 이서구 등을 거론할 수 있다.    

이병도는 풍수지리설에 대하여 “대개 풍수는 도읍(都邑), 궁택(宮宅), 능기(綾基)의 지(地)를 복상(卜相)하는 데 쓰이는 일종의 관상학(觀相學)인 까닭으로 이를 지상학(地相學) 또는 상지학(相地學)이라고 하는 편이 좋을 것이다. 일본인 송본아명(松本雅明)이나 최병헌(崔炳憲) 등도 풍수지리설은 위치선정에 따른 생기(生氣)와 사기(死氣)에 따라 인간의 길흉화복(吉凶禍福)이 초래된다.”고 설명하고 있어 풍수의 신빙성을 인정하고 있다. 이에 반하여 최홍준은 풍수적 자연관을 도가 사상과 유가 사상을 도입하여 체계화하였으나 과학적 근거가 빈약한 사상 체계로서의 『택리지』 이전의 풍수는 지리학의 논리적 기초로서 부족하다고 비판했다.    

그러나 다수의 학자들이 풍수지리의 긍정적인 기여를 인정하였는데, 최창조는 “풍수지리(風水地理)설이란 음양론과 오행론을 기반으로 주역의 체계를 주요한 이론구조로 삼은 중국과 우리나라의 전통적인 지리과학이다”고 주장했다. 황종찬은 “사람들이 자연환경적인 경험을 바탕으로 하여 기후 변화와 땅의 이용에 따라 다양한 사례들을 일정한 확률로 통괄함으로써 거주환경을 선택하고 처리하는데 하나의 지표로 활용케 하는 학문”으로 정의했다. 김승완은 풍수지리를 음양오행설을 기반으로 하여 용⦁혈⦁사⦁수를 요소로, 학과 기를 본질로, 동기감응의 천리를 본으로 하여 땅과 인간의 조화를 도모하여 추길척흉(諏吉斥凶)을 목적으로 하는 자연환경과학이라고 정의한다. 이렇듯 풍수지리사상은 취락의 입지 선정에 관한 방법론이라고 볼 수 있는 것이다. 또한 망자의 영면(永眠)을 위한 길지선정(吉地選定)을 목적으로 땅이 가지고 있는 신비한 생명력을 믿고 이를 생활에 적극적으로 활용하고자 하는 인습의 하나이다.     

풍수지리설을 과학으로 인식하지 않고 철학이나 믿음의 체계로 이해할지라도 풍수는 1960년대 이후 현대 지리학의 새로운 패러다임으로 등장한 환경 지각적 접근의 연구 대상이 될 수 있으므로, 지리학 분야의 매우 중요한 연구 영역이 될 수 있다. 서구에서는 1960년대에 이르러 형태주의적 관점에 입각한 지리학 연구가 활기를 띠게 되면서, 기존의 환경론에서 드러나는 단순하면서도 기계론적인 사고에서 벗어나서 복잡 미묘한 인간 형태를 더 잘 이해할 수 있는 새로운 패러다임을 제시하고자 하는 운동이 제기되었다. 따라서 외부 ‘현실세계’와 인간의 마음속에 내재하는 ‘현실세계의 상(像)’ 사이의 미지의 영역을 탐구하는 지리학의 환경 지각적 연구에, 개인이나 집단의 의사 결정과 가치 체계를 이용하게 되었다.    

한국의 풍수지리설에서는 전통적인 지리 사상으로, 최창조의 한반도에 고대부터 거주해 온 한민족이 지니고 있는 일종의 ‘근원적 토지관(土地觀)’, 김연옥의 ‘자연관(自然觀)’, 최일의 ‘마을 주민의 장소관(場所觀)’, 이몽일의 한민족의 ‘유기적 자연관(有機的 自然觀)’ 등을 거론하고 있다. 또한 풍수지리의 연구는 지역 지리학과 지리 교육적인 면에서도 매우 중요한 의미를 가진다고 볼 수 있다.     

우리나라에서 풍수지리가 본격적으로 연구되기 시작한 것은 조선총독부의 촉탁으로 재직하던 일본인 무라야마 지준(村山智順)이 이왕직 궁중 지관 등의 도움을 받아 『조선의 풍수(朝鮮の風水)』를 저술하면서부터이다. 그는 이 책에서 풍수의 기원에 대해 다음과 같이 기술하고 있다.     

“옛날부터 중국에서는 그 주민들의 생활상 바람(風)과 물(水)에 대해 관심을 가지게 되었다. 추운 북풍은 북부 중국 일대를 크게 위협하였고, 비를 머금고 불어오는 남풍은 남중국의 하천을 범람시켰다. 북풍을 막고 흐르는 물을 관리하는 일은 옛날부터 그곳 주민들의 생활에서 중대한 일이었다. 주거지를 안전하게 하고, 삶을 즐기려면 우선 첫째로 바람과 물의 재해[禍]를 입지 않을 만한 땅을 골라서 집을 지어야 했다. 그래서 땅을 고르는 필수 요건으로 바람과 물을 관찰하는 습관이 생겼다. 토지를 점쳐 고르는 것을 풍수관(風水觀)이라 하고, 땅의 모양[地相]을 보는 것을 풍수를 본다고 했다. 따라서 주택이든 묘지이든 땅의 기세나 모양을 보는 모든 행위를 풍수라 불렀다. 이후 땅을 보아 터를 고르는 술법[術法, 相地法]이 묘지나 주택에 한정됨에 따라 풍수라는 말도 이 양자에 한정되게 되었다.”    

무라야마 지준에 의하면 자연 재해 즉 풍재(風災)나 수재(水災)를 피함은 고대 중국에서 거주지를 선정할 때 첫째 조건이었으며, 이로부터 길지를 선정하는 것을 풍수라 부르게 되었다고 주장했다. (삼국유사문화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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