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쉐키나의 그림자 아래에 9. 징징거리는 일에 대한 경고

주형식 | 기사입력 2019/06/19 [19:29]
여호와께 대한 불평 그 자체는 그릇된 일은 아니다

쉐키나의 그림자 아래에 9. 징징거리는 일에 대한 경고

여호와께 대한 불평 그 자체는 그릇된 일은 아니다

주형식 | 입력 : 2019/06/19 [19:29]

며칠 동안 운전하고 가야하는 여행을 시작한 지 몇 시간이 지나자, 작은 목소리의 질문이 들려온다. “아빠, 다 왔어요?”

 

아니, 얘야, 우리는 이제 막 출발했잖아.”라는 답변이 주어진다.  

한 시간 후에 다시 같은 질문이 들린다. “아빠, 우리 거의 다 왔어요?”

 

아니, 훨씬 더 오래 걸릴 거야.”

30분 뒤에 투정 섞인 톤의 질문이 또 들린다.

 

아빠, 아직 다 안 왔어요?”

아직, 아니.”

그러자 훌쩍거리는 소리가 뒤따른다. “난 이 여행에 지쳤어요. 지금 집에 돌아가고 싶어요!”

 

필자가 미국에서 유학할 당시, 방학동안 짬을 내어서 가족들과 함께 대륙횡단여행을 하게 되었다. 필자의 집이 있던 시카고 근교에서 출발해서 와이오밍 주에 위치한 옐로우스톤 국립공원으로 가는 길은 사흘 내내 운전해서 가야 하는 길이었다. 필자의 어린 두 딸들이 차안에서 오랫동안 있게 되자 질문공세를 하기 시작했다. “아빠, 다 왔어요?” “아니, 얘야, 우리는 이제 막 출발했잖아.” 몇 시간 후에 다시 같은 질문이 들린다. “아빠, 우리 거의 다 왔어요?” “아니, 훨씬 더 오래 걸릴거야.” 한 시간 쯤 있다가 투정섞인 톤의 질문이 다시 들린다. “아빠. 아직도 멀었어요.” “이제 조금만 더 가면돼. 조금만 참아.”

 

이스라엘 백성들은 하나님의 언약궤가 앞서 가고, 구름이 그들 위에 운행하는 가운데 며칠 동안 행진하였다(10:33,34). 그러나 시내반도의 거친 지형을 여행하는 것은 여호와의 산 앞의 드넓은 평원에 진을 치고 있는 것보다 훨씬 어려운 일이었다. 그래서 어떤 이들이 불평하기 시작하였는데, 틀림없이 그들의 불편함에 대해서 모세를 비난하고 그의 지도가 현명한지에 대해 의문을 제기했을 것이다. 그들의 이러한 반응은 하나님의 주목을 피할 수 없었다. 그분은 이런 불평을 불쾌하게 받아들이셨는데, 왜냐하면 그분이 모든 것을 관할하고 계시며, 그분의 백성들을 위해 하실 수 있는 모든 것들을 하고 계셨기 때문이었다. 그리하여 그분의 불이 그들 가운데서 타올랐고, 진영 끝을 살라 손상을 입혔다(11:1; 3:2과 비교해 보라-떨기나무에 불이 붙었지만, 그것이 타지 않았음). 그러므로 모세는 그곳을 다베라, 불타는 곳이라고 이름 붙였다(11:3).

 

하나님의 불은 제단 위의 첫 희생제물을 불사른 때처럼(9:24), 백성들에게 우호적일 수 있었다. 하지만 이스라엘 백성들은 하나님께서 불쾌하게 되시면 그분의 불꽃이 무슨 일을 할 수 있는지 잘 알고 있었다. 그 불은 그분의 제사장 중 두 사람이 중요한 지시 사항을 따르지 않았을 때, 그들을 극적으로 처형했다(10:1,2). 그처럼 백성들 가운데서 타오르는 불은 백성들에게 엄청난 충격을 주었음에 틀림없다.

 

성경 본문은 여호와의 불이 진영의 외곽에서 무엇을 태웠는지 말하고 있지 않다. 하지만 중심부에 위치한 12지파들의 숙영지 밖에 있는 이 지역은 분명 잡족들이 장막을 치고 있었을 것이다. 그래서 그들이 으뜸가는 불평자들이었을 것으로 보인다.

 

이스라엘 백성들과 함께 애굽을 떠난 이들 중 섞인 무리들(12:38)은 이스라엘 백성들도 아니었고, 그들의 피가 섞인 자손들도 아니었다(24:10). 확실히 하나님께서 그의 백성들을 위하여 능력과 은총을 발휘하신 일들은 그들에게 깊은 인상을 주었을 것이며, 그래서 그들은 이스라엘 백성들과 운명을 같이 하기로 결심하였다. 선택받은 야곱의 자손들 중에 족보가 없다는 사실이 하나님께는 아무런 문제도 아니었다. 그분께서는 그들이 이스라엘 백성들과 함께 언약의 축복들을 찾는 것을 허락하셨다. 하지만 하나님께서는 일단 그들이 하나님을 따르기로 결심한 이후에는 언약 공동체의 다른 사람들처럼 동일하게 그분의 지도력 아래 살아갈 것을 기대하셨다.

 

섞인 무리들은 이스라엘 백성들처럼 노예 생활의 혹독함을 경험하지 못했었다. 그래서 그들은 가나안으로 가는 길에 마주친 고초와 힘든 신체적 활동에 익숙하지 않았을 것이다. 더욱이, 그들의 세계관과 종교적 성향은 대부분 애굽인들과 이방인들과 같았다. 애굽의 문화와 사고(思考)는 또한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영향을 끼쳤으며, 그들은 그들의 독특한 유산의 중요한 측면들을 잃어버리고 말았었다. 하지만 그들은 하나님의 백성으로서 그들의 뚜렷한 정체성을 다소나마 보존하기에 충분할 정도로 다른 이들과 분리된 상태로 남아 있었다. 이 섞인 무리들은 이러한 것조차도 없었다. 그래서 여호와는 그들에게 낯설었으며, 그들은 아직 그분께 대한 충성심을 개발시키지 못했다.

 

다베라는 이스라엘 공동체가 불평을 늘어놓은 첫번째 장소는 아니었다. 바로의 군대가 홍해에서 지평선 위로 어렴풋이 나타나자, 그들은 여호와께 울부짖었고(14:10), 모세에게 이렇게 말하였다. “애굽에 매장지가 없으므로 당신이 우리를 이끌어 내어 이 광야에서 죽게 하느뇨 어찌하여 당신이 우리를 애굽에서 이끌어 내어 이같이 우리에게 하느뇨 우리가 애굽에서 당신에게 고한 말이 이것이 아니뇨 이르기를 우리를 버려두라 우리가 애굽 사람을 섬길 것이라 하지 아니하더뇨 애굽 사람을 섬기는 것이 광야에서 죽는 것보다 낫겠노라”(11,12).

 

애굽에 있는 무덤들이라니? 물론 애굽에는 무덤들 천지다. 그 무덤들 중 어떤 것들은 예나 지금이나 여전히 세계에서 가장 유명하다. 즉 피라미드들이다. 애굽은 죽음을 숭배한 땅이었다. 애굽의 초태생을 친, 여호와께서 내리신 10재앙 중 마지막 재앙은 그들이 숭배할 더 많은 죽음을 안겨주었고, 무덤들이 더 생겨나게 해 주었다(12:29,30).

 

애굽에 매장지가 없으므로라는 말은 그저 매장할 목적으로 그들을 애굽에서 데리고 나왔기에 모세는 바보라고 비난하는 수사적 표현이었다. 그것은 모세가 후에 너무나 많이 듣게 될 비난이었다. 즉 그의 리더십이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재앙을 안겨주고 있다는 것과, 바로의 지배 아래 노예생활을 하다가 죽는 편이 훨씬 더 나았을 것이라는 것이다. 떠나 있으면 그리움은 더해진다. “당장 집으로 돌아가고 싶어!”라고 생각한다.

 

모세를 비난함으로써 이스라엘 백성들은 그가 하나님의 명령을 좇았을 뿐이라는 사실을 무시하였다. 그리하여 그들은 하나님은 바보라고 참으로 넌지시 비친 것이다. 두말할 필요 없이 그것은 위험한 모욕이었다. 여호와께 대한 불평 그 자체는 반드시 해서는 안 되는 그릇된 일은 아니다. , 다윗 그리고 하박국 같은 하나님의 백성들도 비애, 스트레스, 좌절감, 심지어는 맹렬한 분노를 표출하기도 하였다(3; 109; 1:1-2:1). 하나님의 지혜와 사랑에 대한 우리의 신뢰는 흔들릴 수 있지만, 그분은 극심한 스트레스가 우리를 혼란스럽게 할 수 있음을 이해하신다. 우리가 우리의 문제들을 그분께 가져가면 우리의 심리상태가 어떻든지 간에 우리는 우리의 삶 가운데 그분의 리더십을 인정하는 것이며, 그분은 우리를 도울 수 있으시다.

▲ 러시아 태생의 화가이며 판화가 마르크 샤갈의 ‘홍해를 건너감’  

 

홍해에서 이스라엘 백성들은 대단히 심각한 위험에 직면하자 하나님께 울부짖었다(14:10). 그런 반응은 지극히 정상적이었다. 하지만 모세에게 비난의 화살을 돌렸을 때 그들의 불평은 추악한 방향으로 전개되었는데, 이는 그들이 하나님의 리더십을 부정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11,12).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분은 그러한 모욕을 눈감아 주시고, 그들을 극적인 방법으로 구출하셨다(19-30). 그분은 그들이 믿음에 있어서 아기들이었던 연고로 참아주셨으며, 그분의 전략은 소기의 목적을 달성하였다. “이스라엘이 여호와께서 애굽 사람들에게 베푸신 큰 일을 보았으므로 백성이 여호와를 경외하며 여호와와 그 종 모세를 믿었더라”(31).

 

하지만 안타깝게도 이것이 그들의 마지막 불평이 아니었다. 홍해와 시내산 사이에서 이스라엘 백성들은 물과 음식이 떨어졌을 때 모세 (또는 모세와 아론에게)에게 몇 번 더 불평했다. 그 때마다 하나님께서는 극적으로 그들의 필요를 충족시켜 주셨으며, 그들을 징계하지 않으셨다(15:22-25; 16:2-36; 17:1-7). 이런 일들 가운데 마지막 사건에서 이스라엘 백성들은 여호와께서 우리 중에 계신가 아닌가?”라고 질문함으로써 여호와를 시험하였다(17:7). 여기에, 그들이 불평할 때마다 그들이 넌지시 비쳤던 기본적인 질문이 있었다. 이제 여기서 그것이 노골적으로 표현되었다. 그들은 그들이 무슨 일을 하고 있었는지 알고 있었으며, 그 다음 번에는 그런 일에 대한 책임을 져야 할 것이었다.

 

그 일은 다베라 사건이 있은 지 일 년 후에 일어났다(11:1). 하나님께서는 그 일 년 동안 이스라엘 백성들을 위하여 많은 일들을 하셨다. 그분은 그들이 르비딤에서 아말렉에게 승리를 거두도록 도우셨고(17:8-16), 시내산에서 그분의 십계명을 반포하셨으며(20), 모세를 통하여 추가적인 법들을 발표하셨고(21-23), 피로 맺어진 관계로서 그들과 언약을 체결하셨으며(24), 성막의 건립을 위한 계획들을 주셨고(25-31), 금송아지를 경배함으로써 그들이 언약을 깨버린 후에(32) 그 언약을 새롭게 하셨다(33; 34). 이스라엘 백성들이 성막 건축을 마치자 여호와께서는 그리로 이주해 들어가셨(35-40). 그분은 예배와 정결(1-17), 그리고 거룩한 생활양식(18-27)에 대한 상세한 지시들을 마련해 주셨다. 그분께서는 백성들과 그들의 진을 조직화하셨고, 가나안 정복을 위한 준비를 하는데 있어서 더 많은 지시 사항들을 주셨다(1-10). 그러는 사이에 그들은 하나님께서 매일매일 그들에게 주시는 기적을 통하여 그들의 음식을 하나님께 전적으로 의지하였다. 그것은 만나의 공급이었다(16).

 

더 이상 이스라엘 백성들은 도주한 노예들의 오합지졸이 아니었다. 그들은 그들이 자발적으로 맺은 하나님과의 언약에서 그들 편의 의무를 다하는 일에 있어서 하나님께 책임을 다해야 할 훌륭하게 조직된 국가가 되었다. 그분은 그들을 방어해 주시고, 먹여주시고, 물을 공급해 주시고, 그들 가운데 거주하셨다. 그 결과 그들은 다음과 같은 질문을 넌지시 비치는 것이라 하더라도 더 이상 그렇게 할 아무런 변명거리도 없었다. “여호와께서 우리 중에 계신가, 계시지 아니한가?”

 

이 모든 것은 다베라에서의 그들의 불평에 대하여 주님이 나타내신 반응의 배경이다. 거기서 여호와께서는 백성들의 투덜거림에 대하여 첫번째로 징계를 내리셨다. 이러한 배경지식없이 이 이야기만 읽는다면 여러분은 여호와께서 가혹할 정도로 과잉반응을 하고 계셨다는 인상을 받을 수 있다. 실제로는 그분께서는 자비롭게도 그들이 곧장 잊어버리지 말도록 경고장을 주신 것이다.

 

아이러니하게도 하나님의 불이 진정된 것은 이스라엘 백성들이 모세에게 도움을 간곡하게 부탁하고, 그가 그들을 위하여 기도했을 때였다(11:2). 대개의 경우 그들의 불평은 모세를 겨냥한 것이었다. 욥의 친구들이 그러하였던 것처럼(42:7-9), 그들은 자신들을 위하여 중보하는 일을, 그들이 상처를 주었던 바로 그 사람에게 의존하고 있다는 것을 발견하였다. 그들은 하나님께서 그들의 회개를 받아들이시기 전에 자신들이 잘못했다는 것을 모세에게 겸비하게 고백해야 했다.

 

우리가 사람들에게 잘못을 저질렀다면 그저 곧바로 하나님께로 감으로써는 그들과의 화해를 회피할 수 없다. 예수께서는 그러므로 예물을 제단에 드리다가 거기서 네 형제에게 원망들을 만한 일이 있는 줄 생각나거든 예물을 제단 앞에 두고 먼저 가서 형제와 화목하고 그 후에 와서 예물을 드리라고 말씀하셨다(5:23,24). 이것은 생소한 개념이 아니었다. 하나님이 지시하신 것들에 의하면 거짓된 맹세로 다른 사람의 물건을 사취한 이스라엘 백성들은 그들이 잘못 취한 것에 20퍼센트를 더해 돌려보내어 회복시켜야 할 책임이 있었다(6:1-5). 이러한 배상제도는 자연스럽게 부당하게 대우한 사람에게 자복할 것을 요구하였다(5:5 참조). 그 사람과의 일들을 바로잡은 후에야 죄인은 여호와께 희생제물을 드리고 용서를 받도록 허락되었다(6:6,7).

 

삭개오는 하나님께 용서를 얻는 일은 다른 이들에 대한 우리의 의무에 대하여 파산을 선포하는 것이 아님을 깨달았다. 그는 이렇게 약속하였다. “주여 보시옵소서 내 소유의 절반을 가난한 자들에게 주겠사오며 만일 뉘 것을 토색한 일이 있으면 사 배나 갚겠나이다”(19:8). 예수님은 그의 약속을 받아들으시고, 이렇게 대답하셨다. “오늘 구원이 이 집에 이르렀으니 이 사람도 아브라함의 자손임이로다 인자의 온 것은 잃어버린 자를 찾아 구원하려 함이니라”(9,10).

 

참으로 자복은 우리 영혼에게 좋은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 백성들이 하나님의 불을 피했던 다베라에서 이 교훈을 가르치셨다. 그분은 또한 그분의 불이 우리의 이웃-행성 지구 행성-으로 옮겨와서 그분의 독생자의 중보를 거절하는 이들을 소멸시키기 전에 그것을 배울 기회를 나머지 인류에게 주고 계신다(4:14-16; 7:25; 요일 1:9; 14:9-12; 19:20; 20:9-15; 21:8). 

 

주형식 목사는 다수의 교회와 교단행정직에서 봉사를 하다가 미국 미시간주에 위치한 Andrews Theological Seminary에서 목회학 박사(Doctor of Ministry)를 취득한 후 귀국하여 현재 묵동교회 담임목사로 재직 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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