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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기 지역내 설화와 전설이 역사가 된 원효의 발자취

장정태 논설위원 | 기사입력 2020/04/07 [21:18]
화쟁의 올바른 인식만큼이나 중요한 원효 창건설화 연구

경기 지역내 설화와 전설이 역사가 된 원효의 발자취

화쟁의 올바른 인식만큼이나 중요한 원효 창건설화 연구

장정태 논설위원 | 입력 : 2020/04/07 [21:18]

화쟁의 올바른 인식만큼이나 중요한 원효 창건설화 연구

 

한국 철학사의 큰 업적을 남긴 원효의 사상은 화쟁이다. 화쟁(和諍)에서 화()누그러뜨린다.’로 화쟁은 배타적 언어 다툼을 누그러뜨리는 일종의 치유행위로 간주한다. 원효의 오도송의 근본 내용은 일체유심조(一切唯心造). 이 오도송은 삼국유사에 기록되지 않았지만, 원효를 대표하는 사상이다.

 

이 깨달음의 일어난 곳은 진산(현 성환과 천안 사이) 무덤이라고 전해지고 있다. 이 위치를 놓고 일부 연구자들과 불교계 일각에서는 특정 지역을 중심으로 하는 성역화 작업을 하고 있다. 그러나 오랫동안 지역연구를 한 향토사학자들은 그들이 주장하는 곳이 아니라는 의견을 내놓고 있다.

 

본 연구는 오랫동안 다툼으로 남아있던 원효와 의상의 출발지이며 최종 종착지인 중국 남양만 당항성을 정확하게 찾아내려는 시작이다. 이울러 원효를 존경하는 후대인들이 경기도 관내 여러 곳에 신화와 전설로 스님을 찾고 있다. 창건 사찰부터 머물러 수행한 사찰까지 수없이 많은 사찰이 난립하고 있다.

 

경기도 평택에 있는 수도사(대한불교 조계종 제2교구 본사인 용주사 말사)가 오도송을 밝힌 성지라는 주장을 불교계 일부에서 하고 있다. 그러나 경기도 관내 향토사학자들은 이곳 수도사 주장은 부적합하다는 주장이 있다. 그 첫 번째 이유로 배를 이용하기 위해서는 항구와 인접한 곳이야 한다. 두 번째 사람들이 머물 수 있는 공간으로써 무덤이 존재해야 하는데 그 흔적이 없다는 주장이다. 현재 공동묘지와 같은 무덤군이 수도사 지역에서 발견되지 않는 점도 주의 깊게 살펴보아야 한다. 성인 남성 두 명이 머물 수 있는 공간이 존재다. 이 정도 규모의 토묘가 조성되기 위해서는 주변에 일정 규모의 국가와 왕족, 귀족집단이 존재해야 한다. 그러나 현재 두 가지 조건이 충족되지 않고 있다.

 

이처럼 경기도 내에는 원효와 관련성을 주장하는 대표적인 사찰 수도사를 중심으로 10여 개 사암이 있다. 이들 사임을 중심으로 원효의 길 답사 행사가 행정부와 교단이 중심으로 하는 행사가 있었다. 행사에 동원되었거나 참여한 사찰들은 당해 사찰 홈페이지, 안내판을 중심으로 그 진위를 살펴보았다. 우리가 이들 자료를 중심으로 연구한 바에 의하면 당해 사찰에서부터 자신들의 주장이 정확하지 않음을 밝히고 있다. 그 외 여러 자료에서도 이들의 주장을 뒤 받침하고 있다. 그런데도 바로 잡히지 않는 현실에 대해 새로운 경종을 울리기 위해 연구되었다.

 

화쟁이란 주제와 함께 원효의 창건설화를 중심으로 한 연구는 화쟁의 올바른 인식만큼이나 중요하다. 설화를 설화로 인정하기 위한 기초연구자료의 시작은 전국에 산재하여 있는 원효와 관련된 사찰을 재정비할 필요성을 느꼈다.

 

▲ 수도사  

 

수도사는 경기도 전통사찰 제28호 지정된 사찰로, 852(신라 문성왕 14) 염거가 창건하였다. 그러나 이곳이 661(문무왕 1) 원효가 해골 물을 마시고 득도한 곳이므로 염거가 창건하기 전에도 작은 암자가 있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1592(조선 선조 25) 임진왜란 때 불에 탄 것을 곧 복원하였고, 1911년 불에 타 폐사로 남아있던 것을 1960년 영석이 중창하였다. 1965년 정암이 중수하여 오늘에 이른다.

 

 

*자재암;대한불교 조계종 제25교구 본사인 봉선사의 말사이다.

 

봉선 본·말사지』「자재암조에 의하면 654(신라 무열왕 1) 원효 스님이 창건하였다고 전한다. 그 후 내력은 알 수 없으나 전하는 바로는 고려 시대에 들어와서 974(광종 25) 각규대사가 태조의 명으로 중창하고 소요사라 했다. 그리고 1153(의종 7)에는 화재로 소실된 것을 이듬해 각령이 대웅전과 요사만을 복구하여 명맥만을 이어왔다.

 

▲ 삼막사    

 

*삼막사; 대한불교 조계종 제2교구 본사인 용주사의 말사이다.

 

<사지>에 의하면 677(신라 문무왕 17)에 원효대사가 창건하였으며, 신라말에 도선국사가 중건하고 관음사라 부르다가 고려 시대에 왕건이 중수한 후 삼막사라고 개칭했다고 한다. 1394(태조 3)에 무학 왕사가 머물면서 국운의 융성을 기원한 곳으로 인해 1398년 태조의 왕명으로 중건되었다.

 

*흥국사; 조계사 말사.

 

1300여 년 전인 서기 661(신라 문무왕 원년)에 당대 최고의 고승인 원효 스님께서 북한산 원효암에서 수행하시던 중 북서쪽에서 상서로운 기운이 일어나는 것을 보시고 산에서 내려와 이곳에 이르시게 되었고 서기를 발하고 계신 석조약사여래 부처님을 보신 원효 스님께서 인연 도량이라 생각하여 본전에 약사부처님을 모시고 상서로운 빛이 일어난 곳이라 앞으로 많은 성인이 배출될 것이다.’하시며 절 이름을 흥성암이라 하고 오늘의 흥국사를 창건하였다.

 

▲ 원효암    

 

*원효암; 한국불교 태고종 소속 사찰

 

661년 신라의 고승 원효대사가 좌선 수행한 곳에 창건하였다는 설도 있으나 1713(숙종 39) 북한산성을 축성하고 산성 수비를 위해 승대장 성능이 원효를 기리기 위하여 창건하고 원효암이라고 하였다는 것을 정설로 보고 있다.

 

위 내용만으로도 원효 스님과 연관 없는 사찰이 여럿 있음을 알 수 있다. 명확한 연구가 필요한 시점이다.

 

지난 2015년 경기도에서 발행한 <‘끝에 놓인 행복을 따라 경기도 원효성지순례>길 자료집에 등장하는 상운사, 원효사, 신륵사, 망해암, 염불사 등 포함하여 연구할 것이다.

 

*상운사; 대한불교조계종 직할 사찰

 

상운사는 상서(祥瑞)로운 구름 속의 사찰이란 이름의 상운사는 북한산의 대표적인 사찰 가운데 하나로 원효봉, 영취봉, 백운대, 만경대, 노적봉 등 수려한 봉우리들이 병풍처럼 둘러친 곳에 세워져 있다. 전하는 얘기에 의하면 상운사는 신라시대에 원효 스님이 당나라 유학을 포기하고 다시 돌아오는 길에 북한산에서 잠시 수행을 할 때 창건할 때 창건되었다고 한다. 그러나 이러한 사실을 뒷받침할 만한 자료가 없어, 현재로서는 여기에 관계된 내용은 설화적인 것으로 받아들일 수밖에 없다.

 

상운사의 실질적인 창건은 1722(경종 2)에 승장(僧將) 회수(懷秀) 스님에 의해서이다. 1745년에 성능(聖能) 스님이 편찬한 북한산성의 지리지인 북한지(北漢誌)에 의하면 북한산성 안에는 중흥사(中興寺), 태고사(太古寺), 용암사(龍巖寺), 보국사(輔國寺), 보광사(普光寺), 부왕사(扶旺寺), 원각사(元覺寺), 국녕사(國寧寺), 상운사(祥雲寺), 서암사(西巖寺), 진국사(鎭國寺), 봉성암(奉聖庵), 원효암(元曉庵) 등 모두 13개의 사찰이 있었으며, 이중 중흥사와 태고사를 제외한 나머지 사찰들은 북한산성을 축성한 이후 산성의 수비와 관리를 위해 창건하였다고 전한다. 창건 이후 상운사는 승군이 주둔하는 사찰로 그 명맥을 이어왔다.

 

현재 상운사는 사찰의 규모는 그다지 큰 편이 아니지만, 한때는 130여 칸에 달하는 건물이 세워져 있었다고 한다. 경내에 있는 오래된 향나무는 아이를 못 낳는 분에게 아이를 낳게 해주고, 영험 있는 약사부처님이 있는 절로도 유명하다고 한다. 빼어난 주변 경관으로 인해 불자들뿐만 아니라 많은 등산객이 즐겨 찾은 곳이기도 하다.

 

*원효사; 대한불교조계종 제25교구 본사인 봉선사의 말사

 

원효사는 경기도 의정부시 도봉산 기슭에 있었다. 뛰어난 자연환경으로 말미암아 도봉산 기슭에는 무수히 많은 사찰이 자리 잡고 있으며, 그중에서 망월사(望月寺), 회룡사(回龍寺) 등과 함께 원효사는 도봉산의 대표적인 사찰로 손꼽히고 있다. 구전에 의하면 이곳은 신라 선덕여왕 때 원효 스님이 수도한 곳으로, 지금의 나한전이 바로 스님이 기도했던 토굴이라 전한다. 또한, 이곳은 원효 스님 이후에도 많은 선승이 깨달음을 얻기 위해 정진하였던 곳이기도 하다.

이를 증명하듯 불기(佛器)를 비롯해 깨진 그릇, 수저, 기왓장 등 고려 시대와 조선 시대의 유물들이 다수 출토된 바 있다. 이중 주목되는 유물은 숭령보중(崇寧寶重)’이라 새겨진 동전으로 숭령이라는 연호는 송나라 휘종(徽宗) 때인 1102년에서 1106년 사이의 5년간 사용된 것으로 이때 만들어진 화폐이다. 그러나 애석하게도 현재 남아있는 문헌 자료에서는 이곳에 절이 있었다는 기록은 찾아지지 않는다. 현재의 원효사가 제창된 것은 1954년의 일이다. 비구니 우일 스님이 이곳의 석굴을 발견하고 수도하면서 절을 세우게 되는데, 원효 스님이 안거하며 기도하던 곳이라 하여 절 이름을 원효사라 하고, 이를 기리기 위해 경내에는 원효 스님의 동상을 세웠다.

 

원효사는 신라 선덕여왕 때 원효대사가 머무르며 수도했던 도량으로 전하고 있지만, 구체적인 자료는 확인되지 않고 있다.

 

원효사 소장 묘법연화경은 닥나무로 만든 21(72)으로 보존상태가 양호하여 불복장에서 출토된 것으로 보인다. 글자가 굵은 글씨체로 정성 들여 정서 되어있어 마치 인쇄를 한 듯 깔끔하고 보존상태도 양호하다.

 

이 경전은 1626(조선 인조 4) 유교적 규범이 엄격한 궁중의 상궁에 의해 만들어진 불경이라는 점에서 귀중한 자료이며, 한글로 필사되어 당시의 한글 보급과 한자에 쓰인 한글 표음법 연구에도 중요한 자료로 평가받고 있다.

 

▲ 신륵사  

 

*신륵사; 대한불교 조계종 제2교구 본사인 용주사 말사

 

예로부터 전하는 이야기에 의하면 신륵사는 신라 진평왕 때 원효대사가 창건한 것으로 되어있다. 어느 날 원효대사의 꿈에 흰옷을 입은 노인이 나타나 지금의 절터에 있던 연못을 가리키면 신성한 가람이 설 곳이라고 알려준 후 사라졌다. 그 말에 따라 연못을 메워 절을 지으려 하였으나 뜻대로 잘 안 되었다. 이에 원효대사가 7일 동안 기도를 올리고 정성을 들이니 9마리의 용이 그 연못에서 나와 하늘로 승천한 후에야 비로소 그곳에 절을 지을 수 있게 되었다. 그러나 이는 이곳에 절을 짓기가 어려웠던 사실을 전하는 전설일 뿐 정확한 문헌 사료가 없어 창건의 유래를 확실히 알기는 어렵다.

 

절 이름에 관한 유래로는 다음과 같은 두 가지 전설이 전해지고 있다. 하나는 고려 우왕 때 여주에서 신륵사에 이르는 마암이라는 바위 부근에서 용마(龍馬)가 나타나 사람들에게 피해를 주자 나옹선사가 신기한 굴레를 가지고 그 말을 다스렸다는 설화에서 유래했다는 설이 있다. 또 다른 하나는 고려 고종 때 건너편 마을에 용마가 나타나 걷잡을 수 없이 사나우므로 사람들이 붙잡을 수 없었는데 이때 인당대사(印塘大師)가 나서서 고삐를 잡으니 말이 순해졌으므로 신력으로 제압하였다고 하여 신력의 신()과 제압의 뜻인 륵()을 합쳐서 신륵사라고 하였다.

 

예로부터 농경사회에서 용은 물의 변화 신으로 여겨져 왔다. 이처럼 용과 관련된 설화는 신륵사가 강가에 있으므로 해서 생겨난 것으로 해석될 수 있다. 홍수와 범람이 잦은 남한강의 자연환경과 지역적 단점을 극복하기 위하여 옛 선인들이 이 절을 세우고 강을 돌본 것에서 이러한 설화가 생긴 것으로 해석할 수 있을 것이며 그 속에서 한국의 자생풍수에 따른 비보 적인 의미 역시 부여되었다고 볼 수 있다.

 

조선 초기 학승인 신미의 제자였던 김수온은 '여주는 국토의 상류에 위치하여 산이 맑고 물이 아름다워 낙토라 불리었는데 신륵사가 이 형성의 복판에 있다'라고 칭송하였다. 이렇듯 풍광이 뛰어난 그곳에 있는 신륵사는 남한강 상류인 여강의 물이 감싸 안은 나지막한 봉미산 남쪽 기슭에 자리 잡은 고찰이다.

 

일반적으로 많은 사람이 깊숙한 산속에 자리 잡은 것에 비해 신륵사는 푸른 물줄기와 드넓은 모래벌판, 그리고 넓은 들판을 바라보고 있는 그곳에 있다.


고려 때에는 신륵사 내 등대 위에 서 있는 전탑 때문에 벽절이라 부르기도 했다. 신륵사는 창건 이래로 보제존자 나옹화상과 같은 고승 대덕이 지냈던 곳이며 더불어 그 외관이 뛰어난 사찰로 이름이 높았습니다. 조선 후기 문인 김병익은 에서 신륵사의 명성을 다음과 같이 서술하였다.

'절을 세우고 폐하는 것이 세상의 가르침이 될 수 없거니와 유학자로서도 이를 위하여 노력할 일은 아니지만, 절은 폐하지 못하는 이유는 그 고적이 명승지로 이름 높은 곳이기 때문이다. 신륵사라는 절은 고려 시대의 나옹이 머물러 있었으며 항상 아름다운 경치는 물론이고 또한 높은 탑과 오래된 비가 늘어진 것이 예스러워 목은을 비롯한 여러 문인이 시로써 그 아름다움을 칭송하였다. 여주는 산수가 청수하고 그윽하고 또한 평원하고 조망이 좋으며 이와 더불어 신륵사는 높고 서늘한 것이 겸하여 있으니 그 경치가 절승한 지경과 같다. 오직 이 두 가지 이유로 온 나라에서 일컬어 온 지가 이미 천 년이나 되었으니 비록 내가 절을 세우지 못할망정 폐할 수 있겠는가.'

 

▲ 망해암    

 

*망해암; 대한불교조계종 제2교구 본사인 용주사(龍珠寺)의 말사

 

절에서 전하는 내력에 따르면 신라 문무왕 때 원효대사가 창건했다고 하는데 유물이나 문헌으로 고증된 사항은 아니다. 기록에 따르면 1407(태종 7) 한양의 백호(白虎)에 해당하는 관악산의 산천기맥(山川氣脈)을 누르기 위해 왕명으로 몇몇 사찰을 중창할 때 함께 중건하였다고 한다. 1803(순조 3) 홍대비(洪大妃)의 시주로 중창하였고 1863(철종 14) 대연 화상이 중수하였다. 19506·25 전쟁으로 소실되었는데, 이후 현대식으로 신축하였다. 용화전 내에 조선 초기의 석불입상이 봉안된 점을 고려하면 망해암은 조선 전기에 건축된 사찰로 추정된다. 경내에는 근래에 건립한 법당과 범종루, 요사 등이 있다. 용화전에는 화강암으로 조성된 석불입상과 약사불이 봉안되어 있다.

 

망해암과 관련해서 다음과 같은 전설이 전한다. 조선 세종 때 조세를 운반하던 배가 월미도 부근을 지날 때 심한 풍랑으로 인하여 전복될 지경에 이르렀다. 선원들이 당황한 채 죽음을 기다리고 있는데, 갑자기 뱃머리에서 어떤 승려가 나타나 그들을 진정시키고 인도해 무사히 위기를 넘겼다. 풍랑이 잠잠해진 뒤, 한 선원이 고마운 마음에 승려가 사는 절이 어디인가를 묻자 관악산 망해암에 있다고 대답한 뒤 홀연히 사라졌다. 선원들이 한양에 도착하여 은혜를 갚기 위하여 망해암을 찾았으나 승려는 없고 그와 용모가 아주 흡사한 불상만이 법당에 봉안되어 있었다. 그들은 깨달은 바가 있어 나라에 상소를 올려 이 사실을 알렸는데, 이를 가상히 여긴 세종은 매년 공양미 한 섬씩을 불전에 올리도록 하였고 이러한 공양은 조선 후기에까지 지속하였다고 한다. 용화전에 봉안된 안양 망해암 석불입상은 머리 위에 원형 보개를 착용하였으며 무릎 아랫부분은 마루 밑에 묻혀있다. 석불입상의 보개 하단에는 성화십오년사월일조성(成化十五年四月日造成)’이라는 명문이 음각되어 있는데, 이를 통해서 1479(성종 10)에 건립되었음을 알 수 있다. 현재 머리와 보개는 검은색으로 칠해져 있으며 상호와 신체부는 흰색의 안료로 도색되어 있다. 머리는 마모되었지만, 나발을 갖추고 있다. 머리 위에는 큼직한 육계가 있고 육계 상면에는 원형의 두터운 보개가 있다. 머리의 정면 중앙에는 계주가 표현되어 있다. 상호는 방형에 가까운데 이마에는 금속재로 백호를 표현하였다. 눈꼬리가 치켜 올라간 양 눈은 반개하여 아래를 보고 있다. 코와 입은 두툼하게 조각하였다. 양 귀는 크게 만들었으며 귓불을 길게 내려뜨리고 있다. 법의는 통견으로 두껍게 처리하여 신체의 곡선미를 볼 수 없다. 불상의 후면은 평면으로 다듬은 후 아무런 조식을 하지 않았다. 왼손은 가슴 앞으로 올려 엄지와 검지를 맞대고 내장하였으며, 오른손은 오른쪽 다리로 내려 외장하였다. 이 석불입상은 조선 전기 석조불상연구에 있어서 중요한 자료로 평가되고 있다.

 

▲ 염불사    

 

*염불사; 대한불교조계종 제2교구 본사인 용주사(龍珠寺)의 말사

 

연주암, 삼막사와 함께 관악산의 3대 사찰로 꼽힌다. 926년 고려 태조가 후백제를 공격하기 위하여 삼성산을 지나갈 때 좌선 삼매에 든 농정대사의 법력에 탄복하여 안흥사를 창건하도록 명하였는데, 이것이 염불사의 전신이라고도 한다.

 

또한 원효(元曉), 의상(義湘), 윤필(尹弼) 3인이 창건하였고, 이들이 염불하던 곳이어서 염불암이라고 불렀다는 설도 있다. 현재의 사찰 건물은 1910년 이후에 지어졌으며, 625전쟁을 겪으면서 퇴락한 것을 1956년 중수하였다. 영조(재위 17241776) 때 간행된 가람고에 염불암의 존재를 확인할 수 있는 기록이 나오지만, 당시 사찰 상황에 대해서는 알 수 없으며, 염불사의 부도에 적힌 기록을 통해 18세기 후반에서 19세기 초까지 매우 번성했음을 알 수 있다.

 

1904년과 1927년에 중수한 기록이 있으며 1930년에 세심루, 1932년에 산신각을 신축하였다. 1956년 대웅전과 산신각을 중수하고 요사를 지었으며 1969년에 미륵불을 세웠다. 1992년 대웅전을 크게 중창하고, 2000년에는 나한전을 신축하였다. 기암절벽이 병풍처럼 두르고 있어 풍광이 뛰어난 염불암은 현재 대웅전, 나한전, 염불전, 영산전, 칠성각, 독성각, 범종각 등의 전각으로 이루어져 있고 부도(3), 미륵불, 오층 사리탑, 삼층석탑, 염불암 공덕비 및 사적비, 지장보살상, 용왕상, 포대 화상 등이 조성되어 있다.

 

정면 5칸ㆍ측면 3칸 규모의 대웅전 내부 불단에는 석가모니불을 주불로 하여 문수보살과 보현보살이 협시된 삼존불이 모셔져 있고, 불단 상부에 화려한 닫집이 달려 있다. 오른쪽 벽면에는 신중단, 왼쪽 벽면에는 영단을 만들었다. 나한전은 정면 3칸ㆍ측면 3칸 규모로 석가모니불을 중앙에, 좌우에 협시보살을 모셨고, 불단 좌우에 오백 나한상을 모셨는데 십육 나한은 천장에 가까운 최상단에 배치되어 있다. 대웅전 왼편에 자리 잡은 염불전은 정면 3칸ㆍ측면 3칸 규모로 칸살이가 매우 넓어 규모가 꽤 크다. 염불전 왼편 담장 너머에 서 있는 3기의 부도는 1810년과 1816년 조성한 것으로 돌기둥 형상을 하고 있다.

 

677(문무왕 17) 원효(元曉), 의상(義湘), 윤필(尹弼) 3인이 창건하였다는 설이 있다.

 

신라 문무왕 원년에 창건된 3개 사찰은 원효암, 흥국사, 상운사

 

신라 문무왕 원년(661)에 창건된 사찰은 원효암, 흥국사, 상운사 3개 사찰이다. 원효는 의상과 함께 당나라 유학길을 포기한 시점에 한해 3개의 사찰을 창건하는 첫 삽을 뜨고 있다. 상운사는 당나라 유학을 포기하고 다시 돌아오는 길에 창건한 사찰로 주장되고 있다. 의상과 유학을 포기한 지점으로 현재 한강 이남 지역에 있는 항구 주변으로 추정할 때 이와 같은 주장이 성립된다.

 

북한산 원효암 사찰 자료에는 이곳은 신라 문무와 원년(661)에 창건되지 않았다. 조선 숙종 때 승 대장 성능이 원효를 기리기 위해 창건되었다. 그러나 북한산 원효암에 머물던 원효가 상서로운 서기가 일어나는 곳을 찾아 창건했음을 주장하고 있다.

 

동시 다발적으로 불사가 가능할 수 없다는 가설과 함께 당 유학을 포기한 원효가 그들의 주장처럼 불사를 하기 위해 경기도 지역에 머물러야 한다. 작은 토막 불사라도 백제, 고구려 옛터에서 재정 부분은 현실적으로 어렵다는 가설을 한다면 결국 신라 특히 경주 중심 왕족, 귀족에 시주에 의지할 밖에 없다. 당시 원효는 신라 공주와 결혼한 왕의 사위 신분이다. 신라 중심의 통일은 무력에 의한 통일이다. 이후 그의 활동 근거지는 신라를 넘는 데 많은 어려움이 있을 것이라는 전제도 이번 연구에 중요한 설정이다.

 

▲ 장정태 삼국유사문화원장(철학박사. 한국불교사 전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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