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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치란의 종교가 산책●인도의 종교와 불교 이야기-⑮

이부평 기자 | 기사입력 2020/04/23 [07:43]
인도에서의 유대교 역사 2천 년

이치란의 종교가 산책●인도의 종교와 불교 이야기-⑮

인도에서의 유대교 역사 2천 년

이부평 기자 | 입력 : 2020/04/23 [07:43]

 

▲ 유대인의 의식용 도구와 경전    


인도에서의 유대교 역사
2천 년    

 

유대교(Judaism)는 유대인들의 '신앙과 철학이며 삶의 방식'이다. 현대의 유대교는 유대종교의 일부인 바리새파만이 전해져 현재의 유대교가 되었다. 과거 유대종교의 유파인 사두개, 바리새, 에세네, 젤롯 등의 다양한 유대종파가 있었으나, 기원후 1세기 이후에 단절되었다. 이후 바리새 유파만이 남아 현재의 주류 유대교를 형성하였다. 현재 유대교는 바리새파의 해석 전승에 따라 정경인 타나크(히브리 성서)에서 시작되었고 탈무드와 같은 원본으로 탐구되어 왔다. 유대교는 유대인들에 의하여 계승 유지 전파되고 있다. 전 세계 신도 수는 약 1,500만 명가량 되는 것으로 파악되고 있다. 주로 미국과 이스라엘에 집중되어 있다. 미국에 7백만 이스라엘에 67십만 정도 되며, 프랑스 캐나다 영국 등지에 분포되어 있다. 유대교는 유대인의 종교이기 때문에 유대인이 있는 곳이면 세계 어느 곳에도 존재한다고 봐야 할 것이다. 유럽이나 미국의 유대인들은 타 종교에도 관심이 많은 것도 또 하나의 관심이다.

▲ 기원 후 68년에 인도 남부 코친에 도착한 유대인 순례단.  

 

인도에도 유대교가 있다고 한다면 다소 의외라는 반응이겠지만, 인도의 유대인 역사는 매우 오래되었다. 인도의 유대인이나 유대교는 소수이긴 하지만 역사가 길다고 해야겠다. 인도에서는 반유대주의도 없었다. 반유대주의는 유대인들을 향한 차별과 증오를 말하는데, 셈족 전체를 겨냥하지 않고 오직 유대인들을 목표로 하는 특징을 지니고 있다. 그렇지만 인도에서는 소수인 유대인들에 대한 인도 다수인들의 차별이나 횡포가 없었다. 인도에서의 유대인들은 주류 문화와 별 충돌 없이 잘 섞이면서 적응한 것으로 보인다. 어떤 유대지식인은 자신들의 조상이 유다왕국시대에 인도에 왔다고 언급하면서 잃어버린 10지파(씨족) 가운데 하나의 후예라고 까지 말하고 있다.

▲ 기원전 9세기 유다왕국(남북)의 지도.    

  

카슈미르 스리나가르에 가면 믿거나 말거나 예수님 무덤 까지 있다. 예수님께서 부활한 이후 인도에 와서 나머지 생애를 보냈는지 아닌지에 대한 정확한 역사적 기록을 찾을 수는 없지만, 그리스-인도 시대나 로마-인도 시대가 분명히 존재했었고, 인도나 중앙아시아에서 실크로드를 타고 중국에서 지중해까지 무역이 이루어지고 있었음은 역사적 사실이다. 또한 이집트에서는 홍해를 통해서 아라비아 해와 인도양으로 진출하여 무역을 했다. 분명히 육상이나 해상으로 무역교류가 있었기 때문에 유대인의 인도 진출은 가능한 일이라고 본다.

 

현재 인도에는 2만여 명의 유대인이 살고 있다. 1948년 이스라엘 건국으로 많은 인도 유대인들이 고향으로 돌아갔기 때문이다. 인도 코친은 인도 아 대륙의 남부 케랄라 주의 항구 도시이다. 코치라고도 부른다. 코친 유대인은 솔로몬 왕 시대에 무역 차 코친에 왔으며 이 때 유대교도 함께 왔다고 한다. 코친 유대인들은 말라바라고도 부른다.

▲ 1913년대 코친의 백인 유대인 거주 지역  

 

▲ 1936년대 코친 유대인 어린이들.  

  

솔로몬 왕 시대에 유대상인들이 인도 코친에 왔다고 한다면 참으로 오래전의 일이다. 물론 아주 고대 시대부터 이집트에서는 홍해를 지나 아라비아 해를 건너서 인도 아 대륙과 무역을 한 것으로 전해진다. 페르시아도 아주 고대시대부터 아라비아 해를 가로지르면서 무역을 한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솔로몬 왕은 이스라엘 왕국의 제3대 왕으로 기원전 971년부터 931년까지 40년간 유다와 이스라엘 민족을 다스렸다.

▲ 홍해, 아라비아와 인도양의 지도.    

 

솔로몬은 평화란 뜻을 갖고 있다. 솔로몬 왕은 다윗 왕의 아들로서 이집트 왕녀와 결혼하여 동맹을 맺고, 국내 건설과 국경 방위에 힘썼다고 하며, 예루살렘 신전을 비롯한 장대한 도시를 건설하는 한편, 외국과의 통상을 맺어 이스라엘 전성기를 이루어 '솔로몬의 영화'라고 칭송되었다. 그는 지혜가 뛰어났으며, 문학에도 뛰어나 이스라엘 문학의 시조라 일컬어진다. 이런 정황으로 미루어 볼 때, 유대인 상인들의 인도 정착은 의심의 여지가 없다. 그렇지만 보다 구체적인 유대인의 인도 정착은 기원전 587년 예루살렘 포위로 솔로몬 사원이 파괴되고 혼란이 오자, 이때 일부 유대인이 인도 코친으로 향했다는 것이다. 일차 사원 파괴는 유대-바빌로니아 전쟁(기원전 601586)때이지만, 역사적 기록은 없다고 하는데, 이때 공격자는 신바빌로니아 칼데아 왕조의 2대왕인 네부카드레자르 2((재위: 기원전 604~562)였다. 수도 바빌론에 바빌론의 문, 마르두크 지구라트, 바빌론의 공중 정원 등의 건축물을 세운 왕으로 유명하며 구약성서 다니엘서에서는 유대와 예루살렘을 정복한 왕으로 기록되어 있다.

 

그러나 기록이 확실한 것은 기원후 701차 유대-로마 전쟁 때 2번째 사원 파괴 때, 상당 수의 유대인(상인)들이 인도 코친의 코둔갈루르(크랑가노레) 항구에 정착했다고 한다. 이미 이집트나 페르시아는 홍해와 아라비아 해를 통해서 인도와의 교류가 있었고, 기원후 1세기가 되면 중동지역과 인도는 무역 루트가 개설되어 있고, 거점 지역에는 인적 물적 교류가 빈번했으며 문화 종교교류 또한 자연스러웠다고 본다.  

▲ 기원 후 1세기 경, 지중해, 홍해, 아라비아 해와 인도양으로 연결되는 무역 네트워크 지도.  

 

▲ 코둔갈루르의 힌두사원에서 열리고 있는 축제의 한 장면.    

 

오랫동안 코둔갈루르는 인도의 이스라엘로 불러져 왔다. 코친의 유대교 사원의 예헤스켈 라치비 랍비의 기록은 이 같은 역사의 내력을 알려 주고 있다. 유대인들은 코친에 정착하면서 무역을 자유롭게 하고 힌두 왕들과도 평화롭게 지냈으며 자치권까지 부여받아서 어느 정도 자율권까지 얻었다고 한다. 유대교 회당이며 사원인 시나고그도 건립할 정도로 자유로운 생활을 누렸다고 한다.

▲ 케렐라 주 코치 항구에 있는 유대마을과 유대교 사원.    

 

인도 케렐라 주 코치에 가면 유대타운과 사원을 볼 수 있다. 유대인이 언제부터 확실하게 인도에 왔는지는 알 수 없지만, 이곳에서는 기원전인 솔로몬 왕 시대부터 왔다고 한다. 인도 첸나이(마드라스)에 가면 산토메 성당이 있는데, 예수의 12제자 가운데 한 분인 도마의 무덤 위에 세웠다고 하여 성지가 되어 있다. 사도 도마도 이곳에 오기 전에는 케렐라의 코친을 거쳐서 왔다고 하며 동방견문록저자인 마르코 폴로도 이곳 코친을 들려서 아라비아 해를 건넜다고 한다. 이 분야의 연구가 우리나라에서는 잘 이루어지지 않고 있지만, 아프리카 사우디아라비아 이란 인도는 고대 시대부터 탐험과 교류가 있어왔었음을 말해 주고 있다.

▲ 유대 역사가 요세푸스(기원후 37년∼100년).    

 

역사가들은 솔로몬 왕 시대에 유대인의 인도 코친 정착은 전설이라고 말하지만 꼭 그렇게만 볼 문제는 아니라고 본다. 한 때 고대 유대 영지주의자들 사이에 인도와의 교류가 있었고, 인도나 페르시아의 구루들이 이스라엘 지방에 까지 왔었다는 기록이 있는데 앞으로 더 연구해 볼 과제이다. 제사장이면서 역사가인 요세푸스의 저서인 유대전쟁사, 유대고대사에 인도의 유대인에 대한 시원한 언급이 없다고 해서 낙망할 일은 아니라고 본다.

▲ 보검<세계불교네트워크 코리아 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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