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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치란의 종교가 산책●인도의 종교와 불교 이야기-41

보검 이치란 스님 | 기사입력 2020/10/19 [08:27]
중국 명나라 무슬림 정화 장군의 해양 대원정

이치란의 종교가 산책●인도의 종교와 불교 이야기-41

중국 명나라 무슬림 정화 장군의 해양 대원정

보검 이치란 스님 | 입력 : 2020/10/19 [08:27]

 

▲ 인도네시아 정부에서 발행한 중국 명나라 정화장군 인도네시아 항해 기념우표.    


중국 명나라 무슬림 정화 장군의 해양 대원정   

28년간 7차례 대선단 이끌고 남해 인도양 30개국 원정

대형선박 60여척과 각종 선박 2백 여척으로 선단구성

말라카 해협 인도양 횡단, 페르시아 홍해 아프리카까지

21세기 실크로드 일대일로육상.해상 네트워크 형성 

 

인도에서 시작한 종교문화 담론은 중국 명나라 정화 장군의 동남아시아 해와 인도양 페르시아만, 홍해, 아프리카 동안 탐험 원정에 까지 미치고 있다. 동남아시아의 종교나 문화를 언급하면서 자연스럽게 대두되는 화제가 중국 명나라 정화장군의 남해 원정이다.

▲ 복건성 천주 해양박물관에 있는 정화 제독의 밀랍동상.  

 

정화(鄭和, Zhèng Hé 1371~1434)는 본명이 마삼보(馬三寶)). 대개 중국의 무슬림들은 성씨를 마씨로 사용하고 있다. 중국의 전통 무슬림 기록에 따르면 중국 이슬람의 역사는 4명의 이슬람 스승들이 지금의 방글라데시 치타콩에서 마니푸르를 통과하여 중국에 접근, 중국에 아랍 대사관 설치를 요청한 것으로부터 시작된다고 말하고 있다. 이슬람 이전의 아라비아와 중국의 남해안 사이에는 일찍이 무역이 있었으며 아랍 해양 무역상들이 이슬람으로 개종했을 때 번성했다고 한다.

 

당나라 때는 해양과 육상 실크로드를 통해서 중국과의 교섭이 적극적으로 이루어졌다. 지금도 중국에는 많은 무슬림들이 거주하고 있는데, 중국 무슬림 계보는 다소 복잡한 양상을 띠고 있다. 중국에는 후이족(回族, Huízú)이 있다. 소수 민족으로, 중국 최대의 무슬림 민족 집단이다. 후이족은 언어와 유전형질은 한족과 유사하지만 이슬람교를 믿는다는 점이 별개 민족의 근거가 된다. 중국 전 국토에 고루 퍼져 살고 있으며, 인구는 약 천만 명으로 소수민족 중에서 좡족 다음으로 많으며, 중국에 사는 이슬람 인구의 대략 절반을 차지한다.

▲ 정화 제독의 인도양과 아라비아 해의 대원정의 주요 항로와 기지 지도.  

 

후이족의 기원은 대외 무역이 성했던 당나라 시대에서 원나라 시대까지 중앙아시아나 인도양을 거쳐 건너 온 아랍계·페르시아계의 외래 무슬림과, 그들과 통혼하여 개종한 중국인으로 형성된다. 후이족 공동체는 보통 모스크인 청진사(淸眞寺)를 중심으로 운영되며 중앙아시아 수피파의 영향으로 명상전통도 있다. 언어는 중국어를 사용하지만, 이슬람 관련 종교용어는 아랍어, 페르시아어, 투르크어에서 비롯된 어휘를 차용하여 쓴다. 성명은 한족과 큰 차이가 없지만, 예언자 무함마드의 이름에서 따온 ()’씨 성이 흔하다. 정화의 원래 이름인 마삼보(馬三寶)도 그러한 예이다. 후이족은 한족 등과 어우러져 함께 살지만 이슬람 율법에 따른 생활을 하여 한족과는 식습관이나 관혼상제 등의 습속이 아주 다르며, 이 차이가 후이족이 별개 민족 집단으로 구분되는 근거가 된다.

▲ 정화의 원정에 참여했던 범선들을 묘사한 17세기 중국의 목판화.    


닝샤후이족(宁夏回族)은 중국 서부의 자치구에 산다. 중국 북서부 황토 고원에 있는 후이족의 자치구로 황하가 이 땅의 광대한 지역을 통과하며 만리장성이 자치구의 북동부 경계를 따라 세워져 있다. 닝샤는 중국의 공인된 소수민족인 후이족의 고향이며, 성도는 인촨 시(銀川市).

 

무슬림 출신인 정화 장군의 스토리에 집중해서 이야기를 풀어가 본다면 그는 명나라 왕조 시대의 장군이자 환관, 무관, 제독, 전략가, 탐험가, 외교관, 정치가다. 영락제의 심복으로 왕의 명에 따라 남해에 일곱 차례의 대원정을 떠난 것으로 널리 알려져 있다. 환관의 최고위 직인 태감(太監)이 되었기에 중국에서는 삼보태감이란 이름으로 알려져 있다.

 

정화의 함대는 동남아시아, 인도를 거쳐 아라비아 반도, 아프리카까지 항해하였고, 가장 멀리까지 도달한 지점은 아프리카 동해안의 말린디(케냐)였다. 그가 지휘한 함대에서 가장 큰 배인 보선(寶船)은 전체 길이가 120미터가 넘는 대형 선박이었다.

 

무역, 전쟁, 종속 또는 지배를 통해 다양한 대초원 부족 및 제국과 중국의 오랜 상호 관계는 중국 내에서 지속적으로 큰 이슬람 공동체를 위한 길을 열었다. 이슬람의 영향은 중국 문화에 동화된 다양한 대초원 민족에서 비롯되었다. 무슬림은 몽골 제국을 관리하기 위해 페르시아와 중앙아시아에서 중국으로 옮겨진 행정관, 장군 및 기타 지도자로 봉사하기도 했다. 이슬람이 중국에 정착하는 데는 역사적인 우여곡절은 있었지만, 이슬람은 중국에서 공식적으로 인정되는 종교 중 하나가 되었다.

 

정화는 무역과 탐험의 목적으로 남해원정을 7차례나 하면서 동남아시아의 여러 지역에서 숭배의 대상이 되었다.

▲ 베트남 호치민 시에 정화장군을 숭배하여 세워진 옹본 사당 사원.    

 

동남아시아의 중국인 디아스포라 사이에서 정화 장군은 민속적으로 숭배의 인물이 되었다. 필리핀 베트남 말라카 인도네시아에는 그를 숭배하는 사당사원이 건립되어 중국인 이민자들의 귀의처가 될 정도로 인기가 있다.

▲ 말라카에 있는 삼보공 사당 사원.  

 

▲ 인도네시아 수라바야 시에 있는 정화 모스크 이슬람 사원.    

 

정화 제독은 항해 중에 일정 기지에 모스크를 짓고 마호메트를 숭배하는 의식을 가졌다. 본인 스스로는 메카까지는 직접 순례한 기록은 없지만 마지막 항해 때는 선원들을 그곳까지 보낼 정도로 신앙심이 깊었다. 그는 중국과 이슬람 국가 간의 관계 발전에 중요한 역할을 했다.

 

동남아시아에도 무슬림들이 상당하다는 것을 알게 된다. 말레이시아 인도네시아에 가보면 중앙아시아의 무슬림 국가들과 별다를 바 없다. 중앙아시아도 한 때는 페르시아의 조로아스터교와 불교가 왕성했지만, 현재는 이슬람교 국가가 되었다. 인도네시아나 말레이시아도 한 때는 힌두교와 불교가 석권했으나, 현재는 이슬람 국가가 되어 있다. 아무리 위대했던 종교도 잘 계승 유지하지 못하면 개종의 경우를 당하고야 만다. 과거에는 정치 군사적인 배경이 가장 큰 이유가 되었겠지만, 지금은 어느 한 종교의 지도자들이 신념상의 해이나 안일한 생각으로 자칫 소홀하면 교세가 급전직할 수 있다는 교훈을 갖게 된다.

▲ 페어뱅크의 《케임브리지 중국사》영문판.    

 

▲ 조지프 니담의 《중국의 과학과 문명》 영문판.  

 

중국학자였던 미국 하버드 대학의 존 킹 페어뱅크(19071991)나 영국 케임브리지 대학의 조지프 니담(1900~1995)과 같은 역사가들은 1950년대 정화의 대원정에 큰 평가를 내리면서, 중국이 정화와 같은 탐험 정신을 이어가지 못하고 명나라나 초기 청나라 정부가 해금(海禁) 칙령을 내림으로써 중국이 바다에서 멀어지고 유럽의 기술 발전으로부터 고립되었다는 생각을 대중화했다.

▲ 중국 광동성 광주 대불사에서 열린 해양실크로드 컨퍼런스에 참석한 필자 보검스님. 신라의 혜초스님이 인도행을 하기 전에 머물던 사원이기도 하다.  

  

현대 서구의 중국 역사가들은 중국 해상 무역이 정화 이후에 완전히 중단되지 않았다면, 중국 선박은 19세기까지 동남아 무역에 계속 참여했으며, 중국과 인도 및 동 아프리카와의 활발한 중국 무역은 청 시대 이후에도 계속되었을 것이라고 지적하고 있다.  

 

정화의 뒤를 잇는다는 뜻에서 시진평 정부는 일대일로라는 거대한 프로젝트의 해양실크로드정책을 실시 중이다.

보검<세계불교네트워크 코리아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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