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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정태 박사의 한국종교학
장정태 박사의 한국종교학●소수서원 입지분석
최초의 서원인 소수서원의 연혁과 풍수적 고찰
기사입력: 2021/01/06 [08:57]  최종편집: ⓒ 매일종교신문
장정태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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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원 건축의 입지-마을과 인접해 있는 서원이 전체의 약 80%를 차지

 

서원의 입지는 대부분 산지형으로 구릉 유수형과 구릉 무예류형의 지형적 특성을 나타낸다. 특히 마을과 인접해 있는 서원이 전체 서원수의 약 80%를 차지한다. 구릉형이면서 마을과 인접해 있는 경우가 입지의 주요한 특성으로 나타난다. 또한, 서원의 공간형식은 강당 중심형과 사당 중심형이 대부분을 차지하고 있으며, 강당 중심형 중 강당과 사당이 병립하는 형태가 과도기적 형식으로 출현하고 있었다.

 

서원의 입지와 공간구성의 상관성을 분석한 결과, 마을 내에서의 위치는 강당 중심형이 다소 마을과 격리된 곳에 나타나고 있는 데 반해, 사당 중심형은 마을과 인접한 곳에 위치하는 입지적 특성을 나타내고 있다. 공간형식의 지역별 차이를 시대적 상황으로 해석해보면, 영남지방을 중심으로 강학이 주가 되는 강당 중심형이 은둔사상에 의해 마을과 격리된 채 수려한 자연경관이 있는 곳에 입지가 이루어진다. 반면 사당 중심형은 17세기 이후 제향우위 시대에 기호지방을 중심으로 문중이나 유림이 중앙 정계와 밀접한 관련이 있으며 마을 중앙에 입지가 이루어지고 있다.

 

서원 건축의 배치계획-강학 공간 앞, 제향 공간 뒤에 놓는 건축형식의 성립

 

서원 건축의 배치형태의 기본 골격은 중국의 서원 건축 등 유교 교육 시설에서 유래했다. 그러나 성균관이나 향교 건축 등을 통해 제도화된 기본개념을 토대로 지역별, 시대별로 변화하여 어떠한 형식을 갖추기 시작하였다. 서원 건축은 크게 강학 공간과 제향 공간이 결합한 기능적인 형식을 기본으로 한다. 강학 공간은 강당이 중심을 이루고 제향 공간은 사당을 중심으로 하는데 강학 공간을 앞에 놓고 제향 공간을 뒤에 놓는 건축형식이 성립되었다. 하나의 중심축선 위에 강당과 사당을 앞뒤로 놓고 좌우에 부속 건물들을 대칭으로 배열하는 유형이 일반화되었다.

 

성리학의 특성상 형식적이고 규범적으로 고착된 건축형식은 하나의 제도로서 작용하였다. 다만 초기의 서원들은 건축유형이 자리 잡지 않아서 비교적 다양한 모습을 보인다. 예를 들어 최초의 서원인 소수서원에는 중심축이라든가 좌우 대칭의 개념은 존재하지 않았고, 필요에 따라 임의로 건물을 배치하여 무질서하게까지 보인다. 19세기 이전에 조성된 현존 서원들은 건축적인 유형을 따르면서도 비교적 변화 있고 다양하게 구성됐지만, 19세기 이후 특히 20세기에 복원된 서원들은 거의 예외 없이 획일적으로 건축적인 규범을 따르고 있어서 변화를 찾아보기 어렵다.

 

서원 건축의 배치를 유형별로 나누는 데는 여러 가지 인자가 있는데 주된 결정인자는 묘학의 배치와 위계, 그리고 강학 공간의 구성형태이며 그 외 축, 진입방식 등도 분류요소로서 작용한다.

 

최초의 서원인 소수서원의 연혁과 풍수적 고찰 

최초의 사액서원이자 공인된 사립 고등교육기관

 

소수서원은 조선 중종 37(1542)에 풍기군수였던 신재 주세붕(1495-1554) 선생이 주도하여 지역 사람이 함께 건립했다. 한국에서 가장 먼저 설립된 서원이며 서원 교육 및 제향과 관련된 운영규정이 최초로 만들어진 곳이다. 고려말의 유형인 매선 안향 선생의 연고지에다 사묘를 세워 선생의 위패를 봉안하고 다음 해에 학사를 건립하여 백운동서원을 창건한 데서 비롯되었다. 명종 5(1550)에 퇴계 이황이 풍기군수로 재임하면서 나라에 건의하여 소수서원이란 사액을 받게 되어 최초의 사액서원이자 공인된 사립 고등교육기관으로 서원이 강학,제향 교류와 유식 등의 기능을 기본적으로 갖추어야 함을 제시했다.

 

영귀봉을 주산으로 삼고 죽계천을 임수(臨水)로 배치

 

우리나라 중심의 뼈대를 이루는 백두대간은 백두산에서 시작하여 동쪽 해안선을 끼고 남으로 뻗어 내려가다 태백산을 거쳐 남서쪽의 소백산으로 이어져 지리산으로 힘차게 전진하다가 순흥면 동북쪽에 작은 영귀봉을 만들었다. 소수서원이 자리 잡은 터는 영귀봉을 주산으로 흡사 신성한 거북이가 알을 품듯 엎드려 있는 형상으로 서원을 에워싸듯 평지 돌출형으로 영귀봉이 앉아 있는 그곳에 있다. 예로부터 풍수의 터 잡기에 기본적으로 나타나는 배산임수(背山臨水) 원칙에 의해 소백산의 정기를 받은 영귀봉을 주산으로 삼고 죽계천을 임수(臨水)로하여 소수서원을 배치한 형국이다.

 

<국과 파 분석>

소수서원을 끼고 도는 죽계천은 자연 흐름이 좌선수이고 패철 8층으로 수구(水口)를 보아 파()를 정확히 판별해 보면 손파(巽破)로 수국(水局)의 절파(絶破)가 된다. 즉 좌선수에 수국의 절파로 구분된다. 죽계천은 마치 허리에 옥대를 찬 것처럼 소수서원을 둥글게 감싸며 흘러가는 물로 오성수(五星水) 중에서 금성수(金成水) 형태로 부귀하고 충과 효를 다하는 자손이냐고 의로운 인물과 호남아가 태어나는 길수(吉水)로 알려져 있다

 

<내용의 분석>

소수서원의 주산인 영귀봉에서 혈장에 이르는 용맥을 패철 4층으로 판별해 보면 건해용(乾亥龍)으로 내룡 이 입수되다 해임용(亥壬龍)으로 방향을 틀어 문성공묘로 최종입수되었다. 소수서원은 문성공묘가 혈() 자리에 있는 음택 풍수 서원(陰宅 風水 書院)이다 이 혈 자리로 들어오는 용의 혈맥을 살펴보면 영귀봉에서 태(), () 상태로 모양을 보이면서 혈맥을 형성해 입수되었다. 영귀봉 정상에서 힘차게 뻗어 내려오는 용맥의 박환 상태는 비교적 양호한 상태로 청진하다고 할 수 있다. 그리고 과협의 상태는 뚜렷하지 않은데 용맥이 좌우 요동치면서 활기찬 모양으로 내려오다가 혈() 지점으로 입수(入首)되는 것을 볼 수 있다.

 

<수의 길흉분석>

향상(向上)으로 소수서원 입지의 향()을 판단해 패철층으로 득수(得水)와 소수 방위(消水 方位)를 측정해보면 길흉을 판단할 수 있다. , 정향(定向)을 놓고 좌선수라면 정향은 복국의 정묘향(丁墓向)이므로 향상으로 목국이라고 정한다. 다음에 득수방위를 측정하면 계축수(癸丑水)가 들어오고 갑묘수(甲卯水)도 들어온다. 즉 등수방위는 관대 수와 제왕 수가 들어오므로 구빈 황천수가 되며 신동이 태어나고 부자가 되는 길 수가 된다. 그러나 소수 방위는 손사방(巽巳方) 안병수가 되어 살인 황천수로 단명하는 흉수가 된다.

 

<향 분석>

소수서원의 입지는 계좌정향(癸坐丁向)으로 좌향(坐向)을 맞추어 놓았으나 자연의 흐름이 좌선수이고 양기가 수국의 절파인 손파로 빠져나갈 때는 정묘향인 을진향을 놓아야 정법이다. 을진향이란 동향으로 소수서원은 연화산을 바라보는 형태로 입지의 향이 바뀌어야 한다. , 영귀봉을 주산으로 하고 죽계천을 바라보는 배산임수의 형태로 입지의 좌향(坐向)이 이루어져야 올바르다. 이 경우 올바른 좌향은 신좌을향이나 술좌진향으로 좌수가 흘러 손 사방으로 나가니 수국의 묘향이 된다. ()에 이르기를 을향손유청부귀(乙向巽流淸富貴 을향을 하고 손방으로 나가면 부귀한다.)란 바로 이향이다. 발부발귀하고 인정이 대왕하며 복수 쌍전한다.

 

동쪽에는 강당을 서쪽에는 사당을 세워 서쪽을 으뜸으로 삼은 소수서원

 

소수서원은 통일신라 시대 숙수사터를 이용하여 배치한 서원이다. 숙수사 법당의 좌향은 애초에는 신좌을향으로 동향이었다. 즉 영귀봉을 배산으로 죽계천을 임수로 한 전형적인 배산임수의 형국이었다. 그러나 후에 소수서원의 강당을 배치하면서 좌향을 정향으로 하여 남향으로 방향을 잡았다. 이 경우 내룡은 해임(亥壬)으로 불배합룡이고 수국의절파인 경우 좌선수이지만 불배합용이므로 득수하지 못하고 즉, 좌득좌파로 좌측의 물이 혈을 감싸 안고 흐르지 못한 채 무정하게 좌측으로 빠져버려 자연이 올바르게 순환하지 못하는 좌향이 된다. 소수서원의 문성공묘는 풍수의 혈 자리에 자리한 음택풍수 서원이 된다. 이때는 문성공묘를 중심으로 우측의 영귀봉을 우백호로 삼을 수 있지만, 좌청룡 자리에는 가 존재하지 않는다. 따라서 강당이 좌청룡의 역할을 하여 장풍이라는 풍수의 원리를 만족하게 된다.

▲ 동쪽에는 강학 공간인 강당을 서쪽에는 제향공간(왼족 사진. 문성공묘)을 세워 서쪽을 으뜸으로 삼은 소수서원.    

 

서원 건축에는 학교 기능과 제사 기능을 담당하는 강당과 사당이 있다. 중국에서는 전학후묘라 해서 강당을 앞에 세우고 사당을 뒤에 세운다. 우리나라 대부분 서원도 이 방식을 따랐지만 소수서원은 동학서 묘로서 동쪽에는 강당을 서쪽에는 사당을 세워 서쪽을 으뜸으로 삼는다. 우리나라 전통 위차법(位次法)인 이서위상을 따랐다. , 서쪽의 사당 공간이 동쪽인 강당 공간보다 위계가 높다고 할 수 있다. 사당 공간에서 문성공묘 뒤로 전시청과 영정각이 위치하고 고직사는 서원을 지키고 관리하며 생활하는 노비들의 공간으로 서원 강학 공간 밖에 위치하는데 이때의 배치는 배향하는 선현의 연고지와 반대되는 곳에 있다. 배향하는 인향의 순흥마을은 소수서원 남쪽에 위치하므로 고직사는 서원의 북쪽에 배치되었다. 강당 뒤로는 직방재와 일신재의 교수 숙소가 있는데 우백호 쪽의 원장 숙소인 직방재가 교수 숙소인 일신재보다 높은 위치에 있다. 유생들이 공부하며 기거했던 학구재와 지락재는 답사영(踏師影)을 피해 직방재와 일신재 뒤로 배치했으며 학구 재는지 악재보다 강당의 높이가 높아 선배의 숙소로 사용했다. 또한, 공부를 열심히 하라는 뜻으로 건물의 입면도 자로 지어져 있다. 장서각은 서책을 보관하던 곳으로 좌우지선(座右之先)의 예를 따라 직방재와 일신재 우측에 자리하고 있다.

 

다른 서원들의 설립운영에 영향-지방 士林들의 정치·사회 활동의 중심 역할도

 

최초의 서원인 소수서원은 종합적인 계획에 따라 입지 및 배치를 한 것이 아니라 숙수사지 터를 이용하였다. 즉 사당인 문성공묘를 남향으로 먼저 세우고 동향했던 숙수사 법당의 기단을 그대로 이용하여 강당을 배치하되 좌향은 남향으로 하였다. 그러나 올바른 좌향은 신좌을향이나 술좌진향으로 배치해야 자연의 흐름에서 최적의 양기를 선택할 수 있다. , 술좌진향으로 좌향을 정할 때 용상팔살에 걸리지 않도록 특히 조심해야 한다. 초기에 비록 일정한 형식없이 어떤 중심축을 설정하지 않고 자유롭게 전각들을 배치하였으나 나름대로 풍수의 건물 간잡이 원리와 유교의 예제로 상당부분 원칙에 충실하며 배치에 임하였다.

 

1541(중종 36) 풍기군수(豊基郡守)로 부임한 주세붕(周世鵬)이 이듬해 이곳 출신 유학자인 안향(安珦)을 배향하기 위해 사묘(祠廟)를 설립하였고, 1542년 유생 교육을 겸비한 백운동서원(白雲洞書院)을 설립한 것이 이 서원의 시초이다. 1544년에는 안향의 후손인 안축(安軸)과 안보(安輔)를 추가 배향하였다.

 

1546(명종 1) 경상도 관찰사로 부임한 안현(安玹)은 서원의 경제적 기반을 확충하고 운영 방책을 보완하는데 주력하였다. 그는 사문입의(斯文立議)를 마련하여 서원의 향사(享祀)에서부터 학전(學田)과 서적의 운용 및 관리, 노비와 원속(院屬)의 관리 등 서원의 운영·유지에 필요한 제반 방책을 마련하였다.

 

1548년 풍기군수로 부임한 이황(李滉)은 서원을 공인하고 나라에 널리 알리기 위해 조정에 백운동서원에 대한 사액(賜額)과 국가 지원을 요청하였다. 이에 1550소수서원(紹修書院)’이라 사액되었고, 아울러 국가의 지원도 받게 되었다. 또한 명종(明宗)은 대제학 신광한(申光漢)에게 명하여 사서오경(四書五經)성리대전(性理大全)등의 서적을 하사하였다.

 

이러한 조처를 통해 소수서원은 공인된 교육기관으로서, 이후 다른 서원들의 설립과 운영에 커다란 영향을 주었다. 이는 서원이 단순한 향사와 교육 기능 수행만이 아닌, 지방 사림(士林)들의 정치·사회 활동에 중심 역할을 하는 곳이라는 의미도 포괄하고 있어, 소수서원의 설립과 발전 내용은 주목할 만한 가치가 있다.

 

사액을 받기 이전까지 백운동서원은 풍기 사림들의 호응을 받지 못 했다. 그 이유는 서원이 풍기에 세워지긴 했으나, 경상도 내 각 군현 유생들에게도 교육 기회가 개방되어 있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사액을 받고, 국가에서 인정한 사학(私學)의 위치를 굳힘에 따라 풍기의 사림들도 적극적으로 서원에 참여하게 되었다.

 

이처럼 소수서원이 선현 배향과 지방 교육의 한 부분을 담당하면서 향촌 사림의 정치적·사회적 기구로 정착되자 이후 전국에 서원들이 설립, 운영되어 조선시대 사학의 중심기관으로 발전하였다. 그 뒤 1633(인조 11) 주세붕을 추가 배향하였으며, 공자가 아닌 지역의 선현으로 제향을 선정하는 서원의 전통 역시 소수서원에서 시작했다. 소수서원의 제향의례에서 가장 눈에 띄는 도동곡은 제향 인물인 주세붕이 소수서원 창건 당시 지은 노래로 안향의 업적을 기리기 위해 작곡했다. 제향의례에 제향인물과 연관된 가사가 포함된 것은 한국에서도 유일한 사례다. 서원의 지나친 건립과 부패로 1868(고종 5) 흥선대원군이 서원을 철폐할 때에도 훼철(毁撤)되지 않고 남은 47개 서원 중 하나가 되었다.

 

이 서원은 최초의 사액서원으로, 1963121일 사적 제55호로 지정되었다.

 

경내 건물로는 문성공묘(文成公廟명륜당(明倫堂일신재(日新齋직방재(直方齋영정각(影幀閣전사청(典祀廳지락재(至樂齋학구재(學求齋서장각(書藏閣경렴정(景濂亭)과 탁연지(濯硯池숙수사지 당간지주(宿水寺址幢竿支柱, 보물 제59) 등이 있다.

 

그 밖에 국보 제111호인 회헌영정(晦軒影幀), 보물 제485호인 대성지성문선왕전좌도(大成至聖文宣王殿座圖), 보물 제717호인 주세붕 영정(周世鵬影幀)이 소장되어 있다. 매년 봄과 가을에 향사를 지내고 있으며, 서장각에는 141563책의 장서가 있다.

서원의 배치는 강학(講學)의 중심인 명륜당이 동향, 배향의 중심 공간인 사당(祠堂)이 남향이며, 기타 전각들은 어떤 중심축을 설정하지 않고, 자유롭게 배치된 특이한 형태를 취하고 있다.

 

정문으로 들어서면 강당인 명륜당이 자리 잡고 있어 곧 바로 명륜당의 남쪽 측면으로 출입할 수 있게 되어있다. 명륜당은 정면 4, 측면 3칸의 단층 팔작기와집으로, 중앙의 대청과 온돌방 및 마루방으로 되어있고, 대청·온돌방·마루방 주위로 툇마루를 둘렀다.

 

기단은 장대석(長臺石)을 바른 층 쌓기 하여 높게 만들고, 그 위에 초석을 놓아 두리기둥[圓柱]을 세웠다. 또한 기둥 윗몸에 앙서[仰舌] 하나를 내어 기둥머리인 주두(柱頭)와 결구시킨 초익공(初翼工) 구조를 이루고 있다.

 

가구(架構)5(五樑)으로 대들보를 앞뒤 평주(平柱) 위에 걸고, 동자기둥을 세워 마룻보를 받쳤으며, 그 위에 파련대공(波蓮臺工)을 놓아 종도리를 받치고 있다.

 

일신재와 직방재는 각각 동재(東齋)와 서재(西齋)로서 다른 서원에서는 강당 좌우에 대칭으로 배치하는 것이 일반적이지만, 이 서원에서는 하나의 연속된 채로 건립하여 편액(扁額)을 달아 구분하고 있다.

 

이 동서 양재는 정면 6, 측면 1칸 반으로, 중앙의 마루와 양쪽 협실 및 협실 앞의 툇마루로 되어 있다. 기단은 정면에는 다듬은 장대석을 바른 층 쌓기 하였으나, 후면에는 거친 사괴석(四塊石)들을 바른 층 쌓기 하였다. 기단 위에 놓인 막돌 초석 위에는 방주(方柱)를 세웠다.

 

가구는 5량으로 대들보를 앞뒤 평주 위에 걸고 간결한 동자기둥을 세워 마룻보를 걸었으며, 이 위에 판대공(板臺工)을 놓아 종도리를 받치고 있다. 처마는 홑처마이고 팔작기와 지붕을 이루고 있다.

 

문성공묘는 명륜당의 서북 측 따로 쌓은 담장 속에 남향으로 배치되어 있다. 정면 3, 측면 3칸의 단층맞배집으로 장대석의 낮은 기단 위에 원형의 주좌(柱座)가 있는 다듬은 초석이 있고, 그 위에 배흘림 두리기둥을 세웠다.

 

또한 기둥 위에는 주두를 놓고 밑면에 초각한 첨차와 소로[小累], 그리고 끝이 날카로운 쇠서[牛舌]를 내어 결구한 초익공식(初翼工式)을 이루고 있다.

 

가구는 5량으로 대들보를 전면 고주(高柱)와 후면 평주 위에 걸고, 첨차로 짜인 동자기둥을 놓아 마룻보를 받친 후, 이 위에 판대공을 놓아 종도리를 받쳤다. 처마는 겹처마이고, 맞배지붕의 양측 박공에는 비바람을 막기 위한 풍판(風板)을 달았다.

 

그 밖에 서고·전사청·고직사(庫直舍) 등은 모두 사당 담 밖에 세워져 있다.

 

소수서원은 20197한국의 서원(Seowon, Korean Neo-Confucian Academies)”이라는 명칭으로 다른 8곳의 서원과 더불어 유네스코 세계유산에 등재되었다.

장정태 삼국유사문화원장(철학박사. 한국불교사 전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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