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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정태 박사의 한국종교학
장정태 박사의 한국종교학●공자가 모셔진 오산시 궐리사(闕里祠)(上)
오산 궐리사 건립의 배경
기사입력: 2021/02/01 [08:16]  최종편집: ⓒ 매일종교신문
장정태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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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재순서>

()오산 궐리사 건립의 배경

()화성 궐리사 건립의 역사적 배경

  

조선 전기 문신이자 공자 64대 손 공서린 선생이 세운 사당 

 

궐리사(闕里祠)조선 전기 문신이자 공자의 64대 손인 공서린(14831541) 선생이 후학지도를 위해 세운 곳으로 지금은 공자의 영정을 모시고 제사를 지내는 사당이다. 1994420일 경기도의 기념물 제147호로 지정되었다.

 

중종 2(1507) 문과에 급제하고 공조참의, 대사헌 등을 지낸 공서린 선생이 후학을 지도할 때 은행나무에 북을 달아 놓고 공부를 게을리 하지 않도록 깨우쳤는데, 그가 죽자 은행나무도 말라 죽었다고 전한다. 그 뒤 정조가 화산에서 바라보니 많은 새들이 슬피 울며 은행나무 곁으로 모여들었고, 이를 괴이하게 여긴 임금이 가까이 가서 보니 죽은 은행나무에서 새싹이 돋고 있었다고 한다.

 

정조 17(1792) 이곳을 공자가 살던 노나라의 마을 이름을 따라 궐리로 바꾸고 사당을 세운 후 궐리사라고 했다. 고종 8(1871) 흥선대원군의 서원철폐령으로 없어졌다가 1900년 다시 세우고 1981년 강당을 세웠으며, 1993년 중국 산동성에서 기증 받은 공자의 석고상을 모셨다.

 

사당은 앞면3·옆면 2칸 규모로, 지붕은 옆면에서 볼 때 사람 인()자 모양을 한 맞배지붕으로 꾸몄다. 솟을대문에 사고석담을 돌려 지었으며 삼문에는 성묘라는 현판과 하마비가 있다. 원래 사당과 장각(藏閣)을 중심으로 제향하는 공간과, 강당을 중심으로 학문을 가르치던 공간이 나란히 있는 동학서묘의 배치 형식이다. 앞쪽에는 개방된 툇간이, 측벽에는 방화벽이 있다. 사당의 안쪽 중앙에 후벽을 약간 뒤로 물려 만든 감실이 있고 그곳에 공자의 영정이 있다. 장각은 사방이 1칸인 익공계 맞배지붕집으로 안에는 중국의 성적도를 본떠 만들었다. 동쪽으로는 학문을 배우는 공간인 강당 건물이 있어 동학서묘의 전형적인 서원 건축 양식을 보이고 있다.

 

논산의 노성 궐리사와 함께 우리나라 2대 궐리사로서 조선 후기 사당형식을 잘 보여 주는 곳이며, 해마다 지방 유림들이 모여 봄·가을로 제사를 지내고 있다.  

 

1792년 창건, 정조가 현판 내려...1904년에 조병식 등이 聖蹟圖 새겨

 

궐리사 성적도(聖蹟圖)1974926일 경기도유형문화재 제62호로 지정되었다. 경기도 오산시 궐동 152번지에 있다. 공자의 행적을 새긴 1폭의 목판 그림이다.

 

궐리사는 공자를 모신 사당으로, 조선 후기 1792(정조 16)에 창건되었으며 이때 임금이 '궐리사'라는 현판을 내렸다. 이 성적도는 1904년에 조병식 등이 중국 산둥성에 있는 성적도를 가져와 다시 새긴 것으로 공자의 행적에 따른 내용을 그림으로 묘사한 것이다.

 

첫 장에 공자와 안자의 모습을 그린 선성소상(先聖小像)을 비롯하여 공자탄생에 얽힌 일화, 유소년기의 행적, 미관이지만 직무에 성실했던 공자의 모습, 공자의 박학다식한 면모, 공자의 생김새에 얽힌 일화, 교육자로서의 공자의 모습, 공자의 가르침의 본질, 성인으로서의 남다른 혜안, 수양의 모습, 수난과 시기의 대상으로서의 공자, 제자들의 스승 섬김과 덕행, 후계자들의 공자 섬김 등 공자 및 공자 주변 인물들의 행적이 담겨져 있다.

 

공자의 후손으로 우리나라에 최초로 정착한 사람은 연성공(衍聖公). 연성공은 공자의 적파 종손에게 주는 세습 봉호다. 중국 역대 왕조는 공자의 종손인 봉사관에게 세습 봉호를 주었다. 봉호의 이름이 진시황제 때는 노국문통군, 한 고조는 봉사군, 원제는 포성군, 당에서는 초기에는 포성후로 봉하였으나 개원 연간에 공자가 문선왕에 추증되면서 문선공, 북송 인종은 1055년에 문선공을 연성공으로 고쳐 청 왕조에까지 이어지게 되었다. 1935년에 국민당 정부는 청조의 작위를 폐지했다. 연성공의 봉호는 76대손 공덕성에게 대성지성선사봉사관으로 고쳐, 현재까지 세습되고 있다.

 

고려 말 공민왕 때 노국공주 수행하여 고려에 온 54세손 공소

 

공완의 둘째 아들인 54세손 공소로 원나라 조정에서 한림학사를 지낸 인물이다. 고려 말 공민왕 때 노국공주를 수행하여 고려에 오니 공민왕은 그를 문하시랑평장사에 임명하고 창원백 회원군에 봉했다. 이때 소()라는 이름을 소()로 바꾸었는데 이는 고려 광종의 휘()와 같았기 때문이다. 회원군 공소의 아들 55세손 공여(孔帤)는 고려 때 집현전 태학사로 문하시랑평장사와 응양군 상장군 천우위 대장군을 지냈다. 당시 명사들인 목은 이색과 도은 이숭인 등이 시를 지어 그의 공덕을 찬양하였다.

 

그는 부()(:漁村()(:孤山)의 두 아들을 두었다. 56세손 큰아들 공부는 감음현 사람인데, 자는 백공이요, 자호는 어촌이다. 공 씨들이 집성촌을 이루며 살았던 경기도 평택 광덕에서 서해 바닷물이 드나드는 광덕 어촌에 머물렀다. 우왕 2년에 문과에 급제, 집현전 태학사 문하시랑평장사 등을 지내고 조선왕조가 개국한 뒤 한성부윤 보문각 대제학 등을 역임하였을 뿐만 아니라 태종 16(1416) 명나라 황태자의 탄생을 축하하기 위해 천추사로 갔다가 그곳에서 별세하였다.

 

양촌 권근은 어촌기에서 공이 즐겨 부르는 어부사를 듣고 마치 증자께서 부르는 상송을 듣는 듯한 느낌을 준다고 하여 공자의 후손으로서의 공부를 칭송하였다. 또한, 공부가 권근에게 말하길 나의 뜻은 어부에 있다. 그대는 어부의 즐거움을 아는가.” 하였다. 이런 연유로 어촌이란 호를 스스로 지었다. 또한 삼봉 정도전은 제어촌기후에서 어촌 공의 풍모를 사모하고 있다고 하였다. 명류를 표방한 승국명류표방록에서 팔청 가운데 으뜸이라고 하였다.

 

56세손 공부는 정몽주와 이색 등과 깊이 사귀고 서예에 일가

 

공은 포은 정몽주와 목은 이색 등과 깊이 사귀었으며 시문에 뛰어나고 서예에 일가를 이루어 필원록의 수제가 되었고 필랄종왕(筆埒鍾王: 王羲之와 맞먹는다는 뜻)’이라 일컬어졌으며 한산군 이색신도비, 이태조의 왕사인 묘엄존자무학선사의 탑비문을 썼으며 이 탑비는 현재 양주 회암사에 남아 있다. 공의 후손들은 광덕산 신복사를 지어 공부의 명복과 후손들의 복운을 빌었다. 600여 년이 지난 지금도 심복사 내에 어촌재라는 재실을 두어 공씨선묘를 받들고 있다.

 

56세손 차손 공은은 우왕 6년 문과에 올라 문하시랑평장사를 지냈다. 공은 두문동에 은거하면서 태종조에서 여러 번 불렀으나 일어나지 아니하여 순천으로 유배되어 적소에서 깨끗한 절의 일생을 마치었다.

 

두문동 유래와 관련 개성지에 의하면 이성계가 고려를 정복하고 정권을 잡은 후 고려의 백성들을 무마하기 위해 추동의 옛집에서 과거시험을 열고 고려 유신들을 등용하려 하였으나 조의생, 임선미 등 72명의 고려 유생들은 추동의 동쪽산(괘관고개)에 모여 우리는 모두 조석으로 대성전의 측근자이다. 지금 과거에 나갈 수 있겠는가라고 하며 관을 벗어 나뭇가지에 걸어놓고 대신 초립을 푹 눌러쓰고 개성성을 나와 만수산 남쪽 골(현재 두문동)에 들어가 두문불출하였다고 한다.

 

스스로 호를 고산이라 했던 공이 운명할 때 기러기 두 마리가 그의 죽음을 애통하듯 3일간 슬피 울며 그의 적소 주위를 날아다닌다. 그가 숨지자 바닷가에 떨어져 죽었다고 한다. 그런 사연으로 삼일읍 낙포리의 지명이 생겨났다고 한다. 공 씨 후손들은 1958년 전남 여수시 삼일읍에 여일재란 재각을 세워 그의 충절을 추앙하고 있다.

 

창원공씨평택 광덕 중심으로 번창...인근 오산 궐동에 자리 잡아

 

우리나라에 온 공자의 후손들은 시조 공소가 창원백에게 봉해졌고 그의 무덤도 창원에 조성되었기 때문에 창원공씨라 불렸는데, 공부·고은에 이르러 완전히 정착하였다. 특히 공소, 공부로 이어지는 자손들은 평택 광덕을 중심으로 번창하여 인근인 오산 궐동에 자리를 잡게 되었다.

 

공자의 64세손이며 공소의 10세손인 공서린(字 希聖, 號 休巖, 14831541)은 수원부 중 구명(현 오산시 궐동)에서 태어난 인물로 호는 휴암, 본관은 창원이다. 일찍이 김굉필(寒暄堂, 14541504)의 제자이면서 조광조·권발·김정국 등과 교유한 사림파계의 학자였다. 그는 1507(중종 2) 문과에 급제하면서 관직 생활을 시작한 이후 사간원 정언, 좌승지 등을 역임했으나 기묘사화 때 투옥되었으며 그 후 기묘사화 때 화를 입은 선비들의 무죄를 주장하다가 여러 번 관직을 삭탈 당했다. 그렇지만 공서린은 말년에 복권되어 경기감사·대사헌·황해 관찰사를 역임했으며, 대사간으로 있던 1534(중종 13)에는 대명회전에 태조의 종계(宗系)가 잘못 기록된 것을 바로잡는 일에 참여했다.

 

정조는 중국에서 연성공 자손에게 대대로 관작을 주는 예에 따라 고 도헌 공서린과 고 참봉 공덕일의 자손에게 대대로 녹을 주도록 하였다. 그리고 조적에 공씨 성을 가진 자가 없으면 곧 초사에 붙이도록 제도화하였다. 그것은 천리를 밝히고 인심을 밝게 하여 훌륭했던 삼대의 학교 제도를 재현해 보려는 생각에서였다.

 

그 후 정조는 이조판서와 양관 대제학을 증직하고 판서 공서린에게 학문에 부지런하고 묻기를 좋아하는 것을 이라 하고, 외모가 충성스럽고 내면이 덕스러운 것을 ()’이라 하며 문헌이란 시호를 내렸다. 장지는 가은읍 완장리에 있으며 묘 앞에 적은 비가 있어 세상이 혼탁한데 맑은 물결 드날리니 누가 그것을 괴롭다 하나 나에게는 엿처럼 다네라며 특별히 평생청고네 글자를 적었다.

 

68세손 공덕일(孔德一, 字 應三, 號 酒隱, 16021658)은 인조반정과 병자호란을 목격한 인물이었다. 일찍부터 소학으로 몸을 닦는 일을 본으로 삼고 성리학 공부에 몰두하였다. 또한 의약, 복서등에도 밝았으며, 광해군이 그가 문무를 겸한 재주가 있음을 듣고 등용하려 하였으나 끝내 거절하였으며, 인조반정이 성공한 후에도 덕행이 훌륭하고 문무를 겸한 자격을 갖추었으니 등용하려 하였으나 또한 거절하였다. 또한 효우의 성품을 타고나 선고(先考)께서 병환이 나자 세끼 손가락을 끊어 피를 약과 함께 섞어 바쳐 이에 힘입어 회복 소생하게 하였다고 전한. 조선이 청에 항복한 이후에는 공서린의 무덤이 있는 용인에 살면서 비분강개하는 가운데 세상을 떠났다. 공덕일의 행적은 훗날 숙종, 정조에 의해 재평가되었다.

 

16세기 조광조를 중심으로 하는 사림파가 등장했을 때 공자의 후손들은 성리학을 이념으로 무장한 학자 관료로 활동하였다. 인조반정이나 병자호란과 같은 격동기에는 의리론을 견지하였지만 인조 대 이후 이들의 중앙 진출은 급격히 위축되었으며 가세도 약화하는 양상을 보였다.

장정태 삼국유사문화원장(철학박사. 한국불교사 전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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