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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양문화와 불교-⑩ 인도-그리스왕국과 불교

보검 이치란 스님 | 기사입력 2021/03/01 [07:33]
알렉산더 후예 그리스 왕이 불교도 왕이 되면서 《밀린다 왕문경》 성립

서양문화와 불교-⑩ 인도-그리스왕국과 불교

알렉산더 후예 그리스 왕이 불교도 왕이 되면서 《밀린다 왕문경》 성립

보검 이치란 스님 | 입력 : 2021/03/01 [07:33]
▲ 기원전 100년경 오늘날의 파키스탄, 아프가니스탄, 북인도 서부에 존속했던 헬레니즘 시대의 그리스계통의-인도왕국들 지도,     © 매일종교신문

 

알렉산더 후예 그리스 왕이 불교도 왕이 되면서 밀린다 왕문경성립 

 

고대 인도에서 그리스를 호칭할 때 야바나라고 불렀다. 그래서 알렉산더 대왕 이래 박트리아나 간다라 지방의 탁실라 등지에 와서 살던 모든 그리스인들을 총칭해서 야바나라고 지칭했다. 야바나는 산스크리트어이고, 빨리어로는 요나라고 한다. 산스크리트어인 야바나나 빨리어인 요나이오니아에서 온 말이다.

 

이오니아인은 도리아인, 아이올리스인, 아카이아인과 함께 그리스 고전기 시대의 그리스인을 구성하는 4개의 주요한 부족 중의 하나이다. 이들이 사용했던 언어인 이오니아 방언은 도리아어, 아이올리스어와 함께 고대 그리스 세계의 주요한 세 언어의 하나였다.

 

그리스 고전기에서 이오니아인이라는 단어는 크게 세 가지 의미를 가졌다. 가장 좁은 의미에서는 소아시아(아나톨리아) 내의 이오니아 지역에 사는 사람들만을 지칭하였다. 좀 더 넓은 의미로는 에우보이아, 키클라데스 제도 등 이오니아인이 세운 도시를 포함하여, 이오니아 방언으로 말하는 사람들 모두를 포함하였다. 마지막으로 가장 넓은 의미로는, 아티케 그리스어(아티케 방언)를 포함한 여러 동부 그리스어 방언들로 말하는 사람들 모두를 지칭하였다.

▲ 이오니아(그리스) 군인, 고대 페르시아 아케메네스 제국 장군의 무덤에 설형문자로 표기. 기원전 480년경.    

 

알렉산더 동방원정 이후, 물밀 듯이 밀어닥친 그리스인들은 힌두쿠시 너머에 있는 박트리아에 터를 잡았고, 몇 세기가 지나면서 아프가니스탄과 우주베키스탄 지역에 있던 그리스-박트리아 왕국은 기원전 2세기 경 인도 아 대륙을 침공하면서 오늘날의 인도 북서부를 침략하여 그리스- 인도 왕국들을 세웠다. 이로써 그리스-박트리아 왕국과 그리스- 인도 왕국은 분리되었고, 그리스-인도 왕국 가운데서 인도 북부 펀자브 사갈라에 자리를 잡은 권력자는 메난드로스(메난더) 1세 통치자였다. 사갈라는 현재의 파키스탄 시알코트 도시로 파키스탄 북동부에 위치한 펀자브 주의 도시로, 카슈미르 설산 지대에 위치하며 첸나브 강과 접한다.

▲ 알렉산드로스 대왕의 동방원정을 연구한 《알렉산드로스 동정기(東征記)》의 저자 아리아노스(루키우스 플라비우스 아리아누스) 크세노폰(기원후 86년〜160년)은 2세기 로마의 그리스인 정치가이자 역사가.    

 

전회에서 살펴봤지만, 그리스-박트리아 왕국시대부터 불교는 이 지역에 전파되었고, 그리스-인도 왕국 시대가 되면 불교는 국교가 될 정도로 불교는 보편적인 종교로 수용되었다. 불교가 이들에게 제1의 종교로 받아들여진 배경에는 인도의 카스트 제도에 따른 사회적 조건도 한몫을 한 것으로 연구되고 있다. 본래 고대 인도에서는 이민족들이 브라만교로 개종할 경우 그 이민족들을 크샤트리야(지배계급)로 대우해 주었지만 고대 그리스 종교를 믿는 야바나인들은 브라만교를 믿는 것을 거부하였기 때문에 수드라 계급으로 취급되었고, 몇몇 야바나인들은 수드라 카스트로 대우받는 것을 피하기 위하여 카스트 제도를 부정하는 불교로 개종하면서 그리스 불교가 확립되기도 하였다는 견해도 있다.

▲ 마우리아 왕조의 왕궁 건축에 그리스 디자인 기술이 영향을 준 주두(柱頭).    

 

그리스-인도 왕국은 인도 아 대륙의 강력한 왕조였던 마우리아 제국과 교섭을 하였는데, 난다왕조를 무너뜨리는데 그리스 인도왕국은 찬드라굽타와의 연합작전을 폈다는 기록이다. 본래 난다 왕조(기원전 345~기원전 321)는 마가다 왕국의 마지막 왕조이다. 수드라 출신의 왕조로, 막강한 군사력으로 인도 전 16대국 국가들을 정복하여 사실상 16대국 시대를 종식한 왕조이기도 하다. 짧은 기간이었지만 인도 아대륙 북동부를 정복하여 통치했다.

 

마우리아 왕조를 세운 찬드라굽타(재위: 기원전322~기원전298)는 본래 난다 왕조의 분가인 마우리아라는 크샤트리야 가문 출신으로, 탁샤실라 대학의 구루였던 차나키야의 제자 중 한 명이었다. 이즈음 인도는 마케도니아 왕국의 왕 알렉산드로스 3세의 공격으로 차례차례 점령당하고 있었다. 서부 펀자브 지역의 탁샤실라 왕은 알렉산드로스와 평화협정을 맺었으며, 동부 펀자브 지역의 포루스 왕은 알렉산드로스 3세에게 저항을 시도했지만 기원전 326년에 히다스페스 전투에서 패배하면서 펀자브 지역을 비롯한 북서부 인도가 알렉산드로스 3세에게 정복당하고 있었다.

▲ 인도 국회의사당에 있는 찬드라굽타 마우리아 동상.    

 

이러한 알렉산드로스 3세의 침입에 대응하기 위해 탁샤실라 대학 구루였던 차나키야는 당시 북인도의 패권 국가 마가다 왕국을 다스리던 난다 왕조의 왕 다나 난다에게 마케도니아를 쳐부수자고 제의하였지만 거절당했다. 이에 차나키야는 제자 찬드라굽타 마우리아에게 난다 왕조부터 멸망시킨 후 인도를 이 위기로부터 구할 왕국을 세우자고 제안하였다. 찬드라굽타는 펀자브 지역의 파우라바 왕국을 정복, 펀자브를 거점으로 삼은 후, 차나키야는 난다 왕조가 약해질 틈을 기다리는 동시에 탁실라의 장교, 그가 키운 제자들, 당시 난다 왕조의 장군인 바드라살라 등을 통섭, 기원전 221년 난다 왕조의 수도 파탈리푸트라를 점령함으로써 난다 왕조를 정복한 찬드라굽타 마우리아는 초대 삼라트(황제)로 즉위해 마우리아 제국을 건국하였다.

 

그리스 쪽에서는 알렉산드로스 대왕이 사망함으로써 헬레니즘 제국의 지방 권력이 와해되자 찬드라굽타 마우리아는 이를 기회로 알렉산더에 의해 정복된 인도 지역인 니카노르, 에우다모스 등을 수복하기 시작하였고, 팽창 정책을 펼치던 마우리아 제국과 과거 알렉산드로스 제국의 영광을 되찾고 싶었던 셀레우코스 제국의 이해관계가 충돌하면서 마우리아-셀레우코스 전쟁이 발발, 마우리아 제국은 지리적 이점을 이용하여 셀레우코스 제국을 몰아내는데 성공하였다. 결국 셀레우코스 왕조와 평화조약을 맺음으로써 마우리아 제국은 당시 셀레우코스 제국이 지배하던 인더스 강 서쪽의 아프가니스탄과 파키스탄 지역을 얻게 되었다. 이 전쟁을 계기로 마우리아 제국은 프톨레마이오스 왕국, 셀레우코스 제국 등의 헬레니즘 문명들과 본격적으로 교류하기 시작함으로써 마우리아 제국의 위상이 한층 격상되는 결과를 가져오게 되었다.

 

그리스 세계와 마우리아 제국 간에 교류가 지속되면서 마우리아 제국에 수많은 그리스인 사절들이 파견되었는데, 이들 중 셀레우코스 제국의 외교관이자 당시 고대 인도의 역사를 기록한 역사가인 메가스테네스가 저술한 역사서인 인디카에서는 마우리아 제국의 수도인 파탈리푸트라에 대해 "64개의 성문과 570개의 탑으로 이루어진 성으로 둘러싸인 곳이자 페르시아 제국의 궁전보다 훨씬 더 아름다운 궁전을 지닌 도시"라고 기록된 내용이 존재하고 있다. 마우리아-셀레우코스 전쟁 이후 찬드라굽타 마우리아는 인도 아대륙 안쪽으로 관심을 돌려 북인도뿐만 아니라 중부 인도와 남인도 지역에도 확장을 시도하였고 그 결과 마우리아 제국은 인도 아대륙 대부분을 통일하였다. 하지만, 찬드라굽타 마우리아는 극심한 가뭄으로 인해 수많은 사람들이 기아로 사망하는 일이 발생하자 이에 충격을 받아 그가 스승으로 모시던 자이나교 구루의 충고를 들은 후, 정치에 손을 떼고 아들인 빈두사라에게 마우리아 제국의 황제 자리를 물려주었다. 자신은 자이나교에 귀의, 출가한 후 고행을 하다가 일생을 마쳤다고 한다.

▲ 인도-그리스 왕이었던 아가토클레스 디카이오스(재위:기원전 190〜180년)와 비슈누, 시바, 바수데바, 발라라마와 부처가 브라흐미 문자와 함께 새겨진 주화.    

 

마우리아 왕조는 아소카 대왕 때에 이르러서 인도 아대륙을 전부 통일하고 불교를 국교로 삼았다. 아소카 대왕은 불교전도단을 각지에 파견했고, 그리스 식민국가와 지중해까지 전도단을 보내서 불교를 전파했다.

 

그리스인 알렉산더 대왕이 동방원정을 하면서 시작된 그리스와 인도의 만남은 결국 헬레니즘과 불교가 만나는 계기를 가져 왔다. 알렉산더의 동방원정으로 그리스-박트리아 왕국이 생겼고, 그리스-박트리아 왕국은 인도-그리스왕국으로 분리 발전했으며, 인도-그리스왕국의 밀린다 왕은 서북인도를 정복하고 펀자브 지역인 사갈라로 수도를 옮겨서 인도와 더욱 가까워졌다. 이런 격변기에 그리스 출신 밀린다 왕은 불교에 귀의하게 되는데 밀린다 팡하(밀린다 왕의 물음)이라는 경이 성립하였다. 그리스 정신(헬레니즘)과 불교가 만나는 상징성이 바로 이 경전이다. 한편 인도는 난다 왕조가 무너지고 마우리아 왕조가 세워지면서 아소카 대왕의 불교전파가 더욱 가속화하였고, 이런 결과로 나가세나 비구는 알렉산더의 후예인 그리스 왕 밀린다와 철학적(종교적) 대논쟁을 벌이게 되고, 밀린다는 불교도 왕이 되었다.

 

그렇지만 그리스-박트리아는 대월지에 멸망했고, 인도-그리스 왕국은 쿠샨제국(대월지)에 병합되었다. 쿠샨제국은 제4불교경전결집을 후원하게 된다. 비로소 불교는 동아시아에 전파되는 전환점을 맞게 된다.

보검<세계불교네트워크 코리아 대표>

▲ 한 때 그리스-박트리아 왕국이었던 우주베키스탄의 부하라에 있는 이슬람신학대학 마드라사 앞에선 필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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