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풍수로 본 필암서원① 연혁과 주요시설

장정태 논설위원 | 기사입력 2021/04/27 [08:14]
김인후의 학덕을 기리기 위해 전남 장성군 황룡면 필암리에 건립된 서원

풍수로 본 필암서원① 연혁과 주요시설

김인후의 학덕을 기리기 위해 전남 장성군 황룡면 필암리에 건립된 서원

장정태 논설위원 | 입력 : 2021/04/27 [08:14]

<연재순서>

연혁과 주요시설

풍수지리 입지

    

호남정맥이 내장산에서 두 갈래로 갈라져, 본맥은 남서쪽으로 뻗으면서 입암산(654m), 방장산(742m), 솔재(300m), 취영산(鷲靈山 문수산 620m), 소드랑봉(분매봉515m), 구왕산(499m), 고성산(546m), 태청산(593m)을 지나 영광의 월암산과 불갑산을 거쳐 목포 유달산으로 이어진다. 장성군의 右白虎脈이다. 다른 한 맥은 동남쪽으로 백암산(722m), 대각산(528m)을 거쳐 바심재(180m)에서 낮아졌다가 다시 용귀산(병풍산 822m), 불태산을 만들고는 또 낮아져 못재(180m)와 월산봉(315m), 죽림산(203m)을 지나 임곡을 거쳐 송정리에서 끝난다. 장성군의 좌청룡맥(左靑龍脈)이다.

 

장성군의 보호사(保護砂)인 청룡, 백호 내에 두 개의 큰 지맥(支脈)이 있는데, 하나는 입암산에서 남으로 뻗어 성미산(383m)을 만들고, 구봉산을 지나 장안리에서 끝나는 맥인데 필암서원의 외청룡이다. 또 하나는 소드랑봉(515.5m)에서 남()으로 갈라져 나와 수연산(543m)을 만들고 황룡면 장산리를 거쳐 관동천에 이르는 맥으로 필암서원의 외백호이다. 필암서원의 지맥은 증산을 거쳐 기산까지 이어지는데, 창건지 기산과 증산 그리고 현재의 자리까지 모두 한 지맥에 자리 잡았다. 그리고 필암서원의 위치와 공간지형은 통해서 확인할 수 있다.

▲ 필암서원 확연루와 김인후 초상  

 

김인후의 학덕을 기리기 위해 전남 장성군 황룡면 필암리에 건립된 서원

 

장성 필암서원은 하서 김인후의 학덕을 기리기 위해 전라남도 장성군 황룡면 필암리에 건립된 서원이다. 하서 김인후 1510(중종 5) ~ 1560(명종 15) 전라남도 장성 출신. 본관은 울산(蔚山). 자는 후지(厚之), 호는 하서(河西담재(湛齋)이다. 천문·지리·의약·산수·율력(律曆)에도 정통하였다. 제자로는 정철(鄭澈변성온(卞成溫기효간(奇孝諫조희문(趙希文오건(吳健) 등이 있다. 시문에 능해 10여 권의 시문집을 남겼으나 도학에 관한 저술은 많지 않다. 저서로는 하서집(河西集)·주역관상편(周易觀象篇)·서명사천도(西銘事天圖)·백련초해(百聯抄解)등이 있다. 1796(정조 20) 문묘에 배향되었고, 장성의 필암서원(筆巖書院)과 옥과의 영귀서원(詠歸書院)에 제향되었다.

 

1975423일 사적 제242호에 지정되고, 2019710일 유네스코 세계유산에 등재되었다.

 

장성 필암서원은 조선시대 성리학의 대가로 호남에서 유일하게 문묘에 종사된 동국 18현 가운데 한 사람인 하서 김인후의 학덕을 기리기 위해 1590(선조 23) 그의 문인 변성온(卞成溫기효간(奇孝諫변이중(邉以中)등 호남 선비들이 장성읍 기산리(岐山里)에 창건하였다.

 

필암서원 창건지인 기산리의 위치에 대해 필암서원지에서는 다음과 같이 기록되어 있다.

 

김인후선생이 沒世한지 31(1590)인 선조 23(庚寅)에서 서쪽 40岐山아래 湖南章甫들이 뜻을 모아 사당을 건립하여 제사(俎豆)를 지냈으니 지금의 장성읍 기산리이다.”邊時淵, 筆巖書院誌, 卷之一, 沿革, 石版本, 全南長城 文苑編刊會, 1975. “宣祖二十三年庚寅 距先生歿三十一年(1590) 湖南章甫建祠俎豆於府四十里岐山下 今長城邑岐山里  

 

1597(선조 30) 정유재란 때 병화로 소실되었으나, 창건지 기산리 필암서원의 소실은, 壬亂 時 邊以中(1546-1612)火車 발명과 長城 南門 倡義에서 연유한다고 볼 수 있다. 전라도 장성출신인 변이 중은 임란이 일어나 19일 만에 도성이 함락되자 피난길에 오른 선조를 수행하던 중 전라도 召募御使가 되어 고향 인장성에서 소모 어사의 기본임무를 수행하면서 화차를 발명하고 제작하였다. 이 화차는 적의 조총을 방탄하면서 그 안에 사람이 들어앉아 的中을 달리면서 일시에 사방으로 40발을 연이어 쏘아 적을 퇴치하는 현대전의 탱크와 같은 것으로서 총 300량을 제작하여 15932월 행주산성 전투에 그중 40량을 배편으로 보내어 1만 명의 의병으로 3만 명의 적을 격퇴하는 大捷을 거두게 하였다 그러나 임란 이후 이 화차로 인하여 장성의 黃州 邊氏 25호 중 15호가 몰살당하는 큰 참변을 당하였다.

 

1624(인조 2) 호남 사람들의 노력으로 기산리 서쪽 증산동(甑山洞)으로 자리를 옮겨 복설하였다. 이후 증산동의 지대가 낮아 물난리로 흙다리가 위험해지는 등 수해를 입을 우려가 있어 1672(현종 13) 지금의 자리인 해타리(海打里)로 옮기고 마을 이름도 필암리(筆巖里)라 하였다.

 

이건에는 하서 증손 김형지(金亨祉), 외현손 이실지(李實之)를 비롯하여 박승화(朴升華, 기정연(奇挺然) 등이 주도하고, 장성부사 송시도(宋時燾)의 협조 하였다. 사우(祠宇) 상량문(上樑文)은 송암(松巖) 기정익(奇挻翼), 이건 고유문은 동춘당(同春堂) 송준길(宋浚吉), 봉안 제문은 우암(尤菴) 송시열(宋時烈)이 지었다. 筆巖은 김인후 선생이 살던 옛 동네 麥洞에 있는데 동네 입구에 붓처럼 깎아지른 듯 서 있는 이 바위의 면에 筆巖이라는 두 자를 새겼다고 屛溪 尹鳳九의 글을 통해서 전하고 있다니 바위에는 영조 때의 학자 屛溪 尹鳳九(1681-1767)의 글씨로筆巖이라는 글자가 조각되어있다.

 

필암서원에는 경제적 기반이 되는 토지,노비를 포함한 운영전반에 대한 기록이 상세하게 남아있어 서원의 경제적 운영방식이 정립되는 단계를 보여준다.

 

1659(효종 10) 3월 전라도 유생(儒生)들의 사액(賜額) 소청(疏請)으로 필암(書院)이라 윤허(允許)를 입었다. 1658년 사액을 청한 전라도 유생으로는 함평 현감 오이익(吳以翼)을 소두( 疏頭), 진사 김홍서(金弘緖) 등을 말한다. 함평 현감 오이익은 창평현 예문관검열 오희도(吳希道)의 아들이자, 도암 오희길(吳希吉)의 종질이다. 진사 김홍서는 옥과 현 군자감봉사(軍資監奉事) 김취수(金就修)의 아들이다.

 

1662(현종 3) 현종의 어필로 필암서원(筆巖書院)이라 선액(宣額)하고, 예조정랑 윤형계(尹衡啓)를 예관(禮官)으로 보내 사제(賜祭)하였다. 사액은 16593월에 내려졌으나, 실제 선액(宣額. 임금이 서원에 이름을 지어 편액을 하사하는 것)16622월 예조정랑(禮曹正郞) 윤형계(尹衡啓)를 보내어 유제(諭祭)하였다.이후 사액(賜額) 서원으로서의 규모와 기능을 갖추게 되었다. 1669(현종 10) 시호(諡號) 문정(文靖)이 내려졌다.

▲ 황룡면 맥동마을 입구 ‘붓처럼 생긴 바위’에 새겨져 있는 ‘筆巖’(필암).    

 

이름을 필암(筆巖)이라 지은 것은 그의 고향 맥동 마을 입구에 '붓처럼 생긴 바위'가 있기 때문이라 하며, 바위에는 병계 윤봉구의 글씨인 필암(筆巖)이 각자 되어 있다. 이 바위의 기운을 받아 하서 김인후가 태어났다고 한다.

 

1786(정조 10) 제자이자 사위인 고암(鼓巖) 양자징(梁子澂)을 추배(追配) 하였다.양자징(1529-1593), 조선의 학자로 호남(湖南)의 이황 문인(門人)이자 필암서원에서 제향되는 인물 소쇄원의 주인인 양산보의 아들로, 김인후의 딸과 결혼하였으며 그의 제자가 되어 사사하였으며 이황에게 배워서 장려와 인정을 받았다. 1871(고종 8) 흥선대원군의 서원 철폐령에도 훼철되지 않은 전국의 47개 서원 중 하나이다. 2019710일 필암서원을 포함한 9개 서원이 한국의 서원이라는 이름으로 세계유산에 등재되었다. 43차 유네스코 세계유산위원회에서 16~17세기에 건립된 다른 8개 서원과 함께 오늘날까지 한국에서 교육과 사회적 관습 형태로 지속되어온 성리학과 관련된 문화적 전통의 증거이며 성리학 개념이 여건에 맞게 바뀌는 역사적 과정을 보여준다는 점에서 탁월한 보편적 가치를 인정받아 한국의 서원(Seowon, Korean Neo-Confucian Academies)이라는 이름으로 한국의 14번째 세계문화유산으로 등재되었다.

 

1975년 서원의 건물, 유물, 제향 등의 보존과 관리를 위해 건물과 부지는 대한민국의 사적 제242호에 지정되고, 필암서원 문적 일괄은 대한민국의 보물 제587호로 지정되었다. 또 하서 선생 문집 650여매와 하서 유묵 목판 56판은 1999년 지방유형문화재 제215호와 제216호에 지정되어 관리되고 있다.

 

1568(선조 1) 새긴 백련초해13판과 유묵4, 그리고 인종이 김인후에게 하사한 묵죽도판3판으로 1568(선조 1)1770(영조 46)에 새긴 것과 1610(광해군 2)에 새긴 초서천자문18판과 해자무이구곡18판이다.

 

주요 시설

 

확연루  

서원의 문루(門樓) 누각(樓閣)으로, 확연루(樓然廓)확연(樓然)하서 선생의 마음이 맑고 깨끗하며 확연히 크게 공평무사하다.는 의미의 확연대공(廓然大公)을 집자한 말이다. 이는 널리 모든 사물에 사심이 없이 공평한 성인의 마음을 배우는 군자의 학문하는 태도를 뜻한다.

확연루는 서원을 넘나드는 사람들에게 진리 추구의 엄중함으로 압도할 뿐만 아니라, 네 귀퉁이에 조각된 귀공포(龜拱包)는 엄숙하면서도 고졸한 맛을 풍긴다. 편액은 우암 송시열(宋時烈)의 글씨이다.

▲ 청절당  

 

청절당  

유생들의 강학 공간으로 정면 5, 측면 3칸의 단층 팔작집이다. 옛 진원현 객사를 옮겼다고 한다. 편액은 동춘당(同春堂) 송준길(宋浚吉)의 글씨이다. 청절당(淸節堂)이란 이름은 우암 송시열(宋時烈)이 쓴 하서 선생 신도비문 중 청풍대절(淸風大節)이라는 구절에서 인용한 것이다. 또 청절당 처마 밑의 사액 현판 필암서원(筆巖書院)은 병계(屛溪) 윤봉구(尹鳳九)의 글씨이다. 현판은 사액 서원 편액이라 흰 바탕에 검은 글씨로 쓰여 있다.

청절당 내에는 백록동(白鹿洞) 학규(學規), 정조대왕의 어제(御製) 사제문(賜祭文), 문묘종사(文廟從祀) 반교문(頒敎文교서(敎書정조대왕 전교(傳敎)등의 편액이 걸려 있다. 또 제봉 고경명(高敬命), 송강 정철(鄭澈), 중봉 조헌(趙憲), 서경 유근(柳根), 반항당 홍천경(洪千璟), 석주 권필(權鞸), 청음 김상헌(金尙憲), 추담 김우급(金友伋), 삼연 김창흡(金昌翕), 유하 김진옥(金鎭玉), 병계 윤봉구(尹鳳九), 초천 김시찬(金時粲), 일재 어윤중(魚允中)등의 시판(詩板)이 걸려 있다.

 

진덕재 · 숭의재  

청절당 좌·우에는 단순한 민도리집 양식의 동·서재가 있는데 수학하는 유생(儒生)들이 거처하는 공간이다. 동재 진덕재(進德齋)는 선배들이 기거하고, 서재 숭의재(崇義齋)는 후배들이 기거하였다. 편액은 동춘당(同春堂) 송준길(宋浚吉)의 글씨이다.

 

경장각  

청절당 앞에는 일반 서원과 어울리지 않는 화려함이 가득한 3칸의 경장각(敬藏閣)건물이 있는데, 정조대왕이 하서 김인후를 문묘에 종사하면서 내려 보낸 내탕금으로 세워졌다. 이곳에는 인종(仁宗)이 세자 시절 손수 그려 하서 김인후에게 하사하신 묵죽(墨竹)그림의 판각(板刻)을 보관하고 있다. 묵죽도(墨竹圖)는 훗날 하서 선생의 높은 절의(節義)를 표시하는 상징물이 되었다.

주심포식 팔작지붕으로 귀공포와 네모서리에 3마리의 용머리가 돋보인다. 용머리와 국화문(菊花紋)을 조각한 것도 어제(御製) 묵죽(墨竹)을 보관하기 때문이라 한다. 편액은 정조대왕의 어필(御筆)로 벌레 등의 침입을 막기 위해 망이 쳐져 있다.

 

우동사  

경장각(敬藏閣)을 지나 내삼문 안으로 들어가면 제향 공간인 우동사(祐東祠)가 있다. 이곳에는 하서(河西) 김인후의 신위(神位)가 봉안(奉安)되어 있으며, 좌측면에 고암(鼓巖) 양자징(梁子澂)이 종향(從享)되어 있다. 우동(祐東)의 의미는 송시열의 신도비명하늘이 우리 동방(東方)을 도와() 하서 김선생을 종생(鍾生)하게 하였다.의 뜻이다. 편액은 주자(朱字)의 글씨를 안규용(安圭鏞)이 집자하였다.

 

계생비 · 묘정비  

진덕재 앞에는 춘추 향사(享事) 때 쓰기 위해 희생(犧牲)을 묶어 놓고 검사하는 계생비(繫牲碑)가 있다. 앞면의 필암서원계생비는 송재 송일중이 썼다. 이 비는 묘정비(廟庭碑)도 겸()하고 있는데 뒷면에 서원의 건립 취지와 연혁 등이 기록되어 있다. 비문은 연재(淵齋) 송병선(宋秉璿)이 찬하고 글씨는 석촌(石村) 윤용구(尹用求)가 썼다.

 

장판각  

토담 동쪽 밖에는 유생들의 학습을 위한 책을 인쇄하기 위한 목판을 보관하는 장판각(藏板閣)이 있는데, 하서전집(河西全集)649, 초서천자문18, 해자무이구곡18, 백련초해13판 등 목판 700여매를 보관하고 있다.

 

한장사

장판각 옆 동쪽에 서원을 관리하는 노비(奴婢)의 우두머리가 거처하는 한장사(汗丈舍)가 장판각과 나란히 위치해 있다.

 

전사청

우동사로 들어가는 내삼문 왼쪽에는 춘·추향 제례를 준비하는 전사청(奠祀廳)이 있다.

 

홍살문

예의를 갖추어 경의를 표하는 신성한 장소임을 알리는 붉은 칠을 한 문 홍살문()이 서원 정면에 세워져 있다. 옆에는 하마석(下馬石)이 설치되어 있다.

 

기타

서쪽 담장너머 별도 공간에 작은 마당 둘레의 민도리집 양식 건물들이 있는데, 이곳은 서원을 관리하는 수호인(守護人)이 거처하는 고직사(庫直舍)이다. 직사(直舍)창고(倉庫)행랑(行廊)으로 구성되어 있다.

 

봉행

하서 김인후의 학덕을 기리는 춘향제(春享祭)추향제(秋享祭)가 매년 음력 2월과 8월 중정일(中丁日)에 각 기관사회단체유림주민들의 참여하에 봉행되고 있다.

 

관련 문화재

유네스코 세계 유산 - 한국의 서원, 대한민국의 사적 242, 필암서원 문적 일괄 - 보물 제587, 국립광주박물관 소장, 장성 필암서원 하서선생문집목판 - 전라남도 유형문화재 제215, 장성 필암서원 하서유묵목판일괄 - 전라남도 유형문화재 제216

 

원진각

유물 전시관으로 양영재단과 하서학술재단에서 기증한 하서 선생 유물 2937백여 점 가운데 국가지정 보물 제587노비보봉심록, 상징필, 현판, 앞다지등의 유물이 전시되어 있다. 이 전시물은 하서 선생의 생애와 학문 세계를 알 수 있는 자료들이다. 원진각(元眞閣)이라 명칭 한 것은 정조대왕이 감탄했다는 하서 선생의 시 중니원기자양진(仲尼元氣紫陽眞)이라는 시구의 ()’자와 ()’를 차용(借用)하여 명명했다.

 

역사적 가치

 

그리 높지 않은 성진산(誠眞山)이 뒤를 감싸고 앞에는 문필천(文筆川)이 흐르고 있는 평지에 자리 잡은 서원은 교육과 학문 수련의 공간을 앞쪽에, 선현에 대한 제사 지내는 공간을 뒤쪽에 배치한 전학후묘(前學後廟)의 전형적인 서원 배치를 보여 주는 대표적인 서원이다. 이는 학문을 중시했던 하서 김인후의 뜻을 기리기 위함으로 알려지고 있다.

▲ 『해동여지도』(화순·장성)의 문필천(취암천) 일대  

 

조선시대 서원의 주요 기능인 '교육''제향'이 균형을 이루던 시기에 조성된 건물로 서원 건축의 기본 구조를 모두 갖추고 있는 전형적인 모습을 보이고 있어, 조선 시대 서원 공간의 꾸밈새를 연구하는 데 귀중한 사적지가 되고 있다.

 

호남 최대의 사액서원으로 호남 유학의 총 본산(本山)이며, 호남 사림들의 기풍 진작과 정신적 지주 역할을 하고 있다.

 

문장(文章)으로는 장성(長城)만 한 곳이 없다.'문불여 장성(文不如 長城)'의 근원(根源)이며, 장성(長城)에 가서 글 자랑 하지 말라!는 연유(緣由) 이기도 하다.

 

1871(고종 8) 흥선대원군의 서원 철폐령에도 훼철되지 않고 피해를 면해 존속된 서원으로 역사적학술적인 가치가 매우 크다. 옛 규모를 잘 간직하고 있을 뿐만 아니라, 일제 강점기나 6·25 사변 때에도 피해를 면한 서원이다.

 

*1590(선조 23) 제자 변성온(卞成溫)기효간(奇孝諫)변이중(邉以中)등 호남 선비들이 그의 고향 마을 인근 장성읍 서쪽 기산리(岐山里)에 서원을 세우고 제향 하였다.

*1597(선조 30) 정유재란으로 소실되었다.

*1624(인조 2) 추담 김우급(金友伋)등 지방 선비들의 노력으로 기산리(岐山里) 서쪽 증산동(甑山洞)에 이건 복설하였다.

*1658(효종 9) 복설 이후 서원의 지위 고양을 위한 전라도 유생 오이익(吳以翼. 오희길 종질)을 소두(疏頭)로 사액(賜額) 청원이 활발히 이루어졌다.

*1659(효종 10) 3'필암'(筆巖)이라 사액(賜額)이 내려졌다. 이조 판서·양관(兩館) 대제학에 추증하고, '문정(文靖)'의 시호가 내려졌다.

*1662(현종 3) 2월 현종의 어필로 '필암서원'(筆巖書院)이라 선액(宣額)하고, 예조정랑 윤형계(尹衡啓)를 예관(禮官)으로 보내 사제(賜祭) 하였다. 이로써 필암서원은 경제력을 확보하여 서원으로서의 규모와 기능을 갖추고, 사회적 지위와 위상을 높힐 수 있었다. 선액(宣額)이란 임금이 친필로 서원의 이름을 지어 편액(扁額)을 하사하는 것을 말한다.

*1672(현종 13) 3월 서원을 현재의 위치로 이건하고, 마을 이름도 해타리(海打里)에서 필암리(筆岩里)로 바뀌었다. 이건(移建)에는 원장 송준길(宋浚吉)의 협조와 남계 이실지(李實之. 1624~1702)·기정연(奇挺然. 1627~?, 금강 현손박승화(朴升華, 백우당 증손)등의 노력이 있었다. 이건 작업의 완성으로 서원은 사액(賜額) 서원답게 면모를 일신하였다.

*1786(정조 10) 제자이자 사위인 고암(鼓巖) 양자징(梁子徵)을 종향(從享)하였다.

*1796(정조 20) 11월 문묘(文廟)에 종사(從祀)하고, 영의정 추증 및 부조(不祧)를 명하였다. 시호를 '문정(文正)'으로 개시하였다. 정조가 사제문((賜祭文)을 짓고, 우부승지 이면긍(李勉兢)을 예관(禮官)으로 보내 치제(致祭) 하였다.

*1871(고종 8) 흥선대원군의 서원 철폐령 때에도 훼철되지 않고 존속된 전국의 47개 서원중 하나이다.

*1975423일 대한민국의 사적 제242호 장성 필암서원(長城 筆巖書院)으로 지정되었다.

*1999년부터 장성군에서 주변 정비 사업을 추진하여 2008년 유물전시관인 원진각(元眞閣)삼연정(三然亭)등을 준공하였다.

*2010년 원진각(元眞閣) 뒤편에 청소년유림들의 한학교육 및 선비 체험 교육 공간 목적의 평생교육센터인 집성관(集成舘)을 준공하였다.

*2019710일 유네스코 세계 유산에 등재되었다.

장정태 삼국유사문화원장(철학박사. 한국불교사 전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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