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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양문화와 불교-⑲ 그리스의 인도와의 접촉, 무엇을 남겼나?

보검 이치란 스님 | 기사입력 2021/05/03 [08:00]
그리스-박트리아 왕국, 인도-그리스 왕국 그리고 헬레니즘과 불교의 융합

서양문화와 불교-⑲ 그리스의 인도와의 접촉, 무엇을 남겼나?

그리스-박트리아 왕국, 인도-그리스 왕국 그리고 헬레니즘과 불교의 융합

보검 이치란 스님 | 입력 : 2021/05/03 [08:00]

그리스-박트리아 왕국, 인도-그리스 왕국 그리고 헬레니즘과 불교의 융합   

 

알렉산더 대왕이 인도 서북단에 오기 전, 2세기 전쯤 이미 그리스와 인도는 서로 알고 있었다고 한다. 알렉산더 동방원정은 기원전 334년에 이뤄졌다. 알렉산더는 기원전 329년에서327년 사이에 박트리아를 점령했다. 이 무렵 박트리아는 페르시아의 일부 영토였다. 인도에서는 석가모니 부처님이 기원전 483년에 대반열반(죽음)에 들었다. 인도는 마가다 왕국이 무너지고 난다왕조가 집권하고 있었다. 알렉산더가 인도에 침입하기 전에는 마우리아 왕조는 아직 성립되지 않고 있었다. 알렉산더가 인도를 침입한 다음, 기원전 326년경 바빌론으로 귀환했다. 알렉산더는 10년 정도의 대장정을 마치고 기원전 323년에 바빌론에서 사망했다. 한편 인도에서는 기원전 322년 마우리아 왕조가 성립돼서 기원전 185년까지 지속되면서 기원전 273년부터 232년 까지 아소카 대왕이 재위했다. 이 기간 동안 불교는 급속히 인도 아 대륙 영토는 물론이지만 인도 밖으로 까지 불교가 전파되는 계기가 됐다.

 

마우리아 왕조 다음에는 슝가 왕조가 들어서게 된다. 슝가 제국은 기원전 187년경 마우리아의 군사령관인 푸샤미트라가 창시했으며 기원전 73년까지 존속한 인도 중왕국 시대의 제국이다.

 

알렉산더가 사망하고 나서, 그리스는 헬레니즘 시대로 접어들게 되며, 시리아에서 박트리아 까지는 셀레우코스(시리아)제국이 지배하게 된다. 박트리아는 셀레우코스의 일부 영토가 되었고, 한참 후에는 인도의 아소카 대왕과 접촉하게 된다. 셀레우코스 제국은 박트리아에 총독을 두었는데, 기원전 246년 디오도투스는 반역을 하여 그리스-박트리아 왕국을 독자적으로 세우게 된다. 기원전 189년경 그리스- 박트리아의 에우티데모스 왕은 간다라를 정복하고 탁실라에 도읍을 정하게 된다. 박트리아의 데미트리우스 왕은 인도 본토를 원정하는 등, 인도 아 대륙을 넘보게 되는데, 이 때가 기원전 180년쯤 된다. 기원전 171년 박트리아의 장군인 유크라티데스가 왕위를 찬탈하고, 인도-그리스 왕국으로 분리하게 된다.

 

이후에 밀린다 팡하로 유명한 메난드로스 1세 소테르(Menander I the Savior)가 즉위하는데 이가 바로 밀린다 왕이다. 그는 기원전 163년 인도-그리스 왕국의 왕으로 즉위하면서 수도를 사갈라로 옮겼다. 사갈라는 오늘날의 파키스탄의 샬코트로 펀자브 주의 북부 지역이다. 알렉산더 대왕이 기원전 326년 이곳에 침입했을 때는 마드라 왕국이었다. 밀린다 왕은 사갈라로 수도를 옮긴 다음, 서북 인도를 정복하는데 심혈을 기울였고, 기원전 165에서 130년까지 재위하면서 헬레니즘 왕국으로서 최전성기를 구가했다  

▲ 메난드로스(밀린다) 왕의 초상화.  

 

메난드로스(밀린다) 왕에 대해서는 몇 차례 언급한 바 있는데, 밀린다는 빨리어로 그렇게 부른다. 밀린다 왕은 헬레니즘과 불교가 융합하는 데 있어서 상징적인 인물로서 불교의 대후원자였다. 밀린다 왕은 그리스계 후예로서 펀자브를 정복하고 서쪽의 카불 강 계곡에서 동쪽의 라비 강까지, 북쪽의 스와트 강 계곡에서 아라코시아까지에 이르는 인도 아 대륙에 그의 제국을 세웠다. 고대 인도에 대한 기록에 따르면, 메난드로스 왕은 파탈리푸트라(현재의 파트나)로 남하해서 갠지스강 계곡의 동쪽 멀리까지 왔다고 지적하고 있으며, 그리스의 지리학자 스트라보는 "알렉산더 대왕보다 더 많은 부족을 정복했다"고 기록하였다.

 

오늘날 그 지역에서는 메난드로스 1세의 얼굴을 새긴 동전이 많이 출토되어, 당시 상업의 번창과 그의 왕국이 존속했던 기간을 증명해 주고 있다. 또한 메난드로스 1세는 불교의 후원자였으며, 비구 나가세나와의 대화는 중요한 경전인 밀린다 팡하(Milinda Panha)에 기록되어 있다. 밀린다 왕과 나가세나 비구와의 대화는 너무나 유명하다.

 

대화 내용의 핵심은 무아(無我)’에 대한 논쟁이다. 인식의 주체가 존재하는가에 대해서 논쟁을 하게 된다. 밀린다왕은 아는 주체가 존재합니까?‘라고 질문을 던진다. 이에 나가세나 비구는 그게 무엇입니까라고 되묻는다. 밀린다왕은 보고, 듣고, 맛보고, 냄새 맡고, 느끼고, 사물을 구분하는 우리 내면의 주체를 말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여기 앉아서 원하는 대로 창문을 통해서 밖을 내다 볼 수 있지 않습니까? 그렇게 보는 주체를 말하는 것입니다.“라고 하자, 나가세나 비구는 대왕께서 말씀 하셨듯이 내면의 주체가 보고, 듣고, 사물을 지각한다면 귀나 다른 것을 통해서 볼 수 있지 않겠습니까?“라고 응수했다. 그러자 밀린다 왕은 그럴 수는 없습니다.“고 했다.

 

나가세나 비구의 핵심 대답이 나온다. “그렇다면 대왕의 말씀과 같이 내면의 주체가 마음대로 감각을 사용한다고 말할 수는 없습니다. 사실은 이렇습니다. (眼根)과 형태(色境)로 인해서 시각이 일어나고, 다른 것들(접촉, 느낌, 지각, 의도, 주의 집중)이 연이어 일어나는 것입니다. 이러한 모든 조건들은 원인에 따라 저절로 일어나는 것일 뿐 그 속에 달리 아는 자같은 건 존재하지 않습니다.”

 

무아의 핵심사상을 논쟁하고 있는데, 밀린다 왕은 나가세나 스님, 아는 주체가 존재합니까?”라고 직격탄을 날리자, 나가세나 스님은 궁극적인 의미에서 아는 자는 존재하지 않습니다라고 결론짓는다. 이밖에도 영혼 존재의 유무, 윤회, 환생, 몸과 마음의 관계, 시간의 문제,사물의 시원 등등에 대한 형이상학적 인식론적인 철학적인 물음과 논의를 거듭한 끝에 밀린다 왕은 결국 불교의 무아사상에 동의하게 되는 것을 보여 주고 있다. 다시 말하면 그리스의 헬레니즘과 불교사상의 융합으로까지 나타나서 대승불교 흥기에 어떤 동기 부여가 되지 않았나 하는 것이다.

 

한편 그리스-박트리아 왕국은 기원전 130년 경 대월지에 멸망하게 된다. 인도-그리스왕국은 기원전 10년경 쿠샨 왕조에 망하게 되고 그리스-박트리아, 인도-그리스왕국은 수명을 다하고 쿠샨 왕조에 바턴을 넘기게 된다. 밀린다 팡하는 기원전후에 문자로 기록됐다.

 

헬레니즘 시대와 운명을 같이하면서 그리스-박트리아, 인도-그리스 왕국은 알렉산더 대왕의 후계자들로서 헬레니즘의 마지막 왕국이었다. 3백년간 헬레니즘을 정착시키면서 불교와의 교섭을 하면서 융화하는 과정을 겪게 된다.

 

쿠샨왕조는 페르시아계로서 계속해서 불교를 국교로 삼으면서 후원하게 되는데, 4차 불전 결집을 하게 된다. 쿠샨왕조 시대의 불교와 로마 제국과의 교류는 차회서부터 다루기로 하고 헬레니즘 시대에 대한 그리스와 인도와의 무역 관계 등을 살펴보자.

 

전문 연구가들에 의하면 헬레니즘 시대의 도시들은 현대 도시들과 비슷했다고 한다. 극장, 사원, 도서관이 있는 문화센터였다고 하는 것이다.

▲ 헬레니즘 시대의 무역 루트(기원전 300년 경)

 

시인, 작가, 교사 및 예술가의 고향인 배움의 장소로서의 도시였다는 것이다. 도시는 사람들이 즐거움을 찾을 수 있는 곳이었다. 헬레니즘 도시는 또한 주변 시골에서 자란 곡물과 농산물을 위한 준비된 시장을 제공하는 경제 중심지였다. 도시는 백화점, 무역 및 제조의 현장이었다. 요컨대, 헬레니즘 도시는 문화적, 경제적 기회를 제공했지만 통합된 기업의 감각을 육성하지 못했다.

 

셀레우코스 왕조와 프톨레마이오스 왕조는 인도, 아라비아, 사하라 사막 이남의 아프리카까지 먼 곳에서도 거래되었다. 인도 및 아라비아와의 육로 무역은 캐러밴(隊商)에 의해 수행되었다. 캐러밴 거래는 벌크(대규모 물량) 품목이나 필수 상품을 거래하지 않았다. 명품만 이렇게 비싼 방식으로 운송 할 수 있었다. 상품이 헬레니즘 군주국에 도착하면 그리스 상인들은 무역에 참여했다.

 

지중해에서 아프가니스탄 및 인도로 가는 캐러밴 무역에 필수적인 것은 유프라테스 강을 지나가는 북부 경로와 아라비아를 통한 남부 경로였다. 아라비아의 사막은 처음에는 무역의 루트로 보기에는 가능성이 없고 험난한 지형으로 보일지 모르지만, 동쪽에는 무역로가 남쪽으로 뻗어 있고 여전히 중국으로 뻗어있는 이란의 고원이 있다. 동부로부터의 무역은 이집트와 팔레스타인, 페니키아, 시리아의 항구에 도착했다. 이 항구에서 상품은 그리스, 이탈리아, 스페인으로 유입되었다. 이 캐러밴 거래의 중추는 낙타였다. 낙타는 얽히고설킨 성질이 나쁘지만 내구성이 뛰어났다.

 

캐러밴 루트를 통해 가볍고 희귀하며 비싼 명품을 실어 날랐다. 시간이 지나면서 이러한 사치품은 필수품이 되었다. 부분적으로 이러한 발전은 무역량 증가의 결과였다. 그 시대의 번영에 더 많은 사람들이 금, , 상아, 보석, 향료 및 기타 쉽게 운반 할 수 있는 물품을 살 여유가 있었다. 아마도 양면에서 가장 눈에 띄는 상품은 차와 실크였다. 실제로, 실크 무역은 주요 루트에 실크로드라는 이름을 부여 했다. 이 루트는 고대에 두드러졌을 뿐만 아니라 근대 초기까지 사용되었기 때문이다. 그 대가로 그리스인과 마케도니아인은 금속 무기, , 포도주, 올리브유를 보냈다.

▲ 사막에서 낙타가 짐을 운반하고 있다.  

 

이러한 캐러밴 경로는 그 기원을 알렉산더 이전으로 추적할 수 있지만 헬레니즘 시대에 훨씬 더 두드러졌다. 비즈니스 관습이 개발되고 표준화되어 다양한 국적의 상인들이 모두가 이해할 수 있는 방식으로 의사소통할 수 있었다.

 

기원전 180년부터 기원전 10년경까지 30명 이상의 헬레니즘 왕이 계승되어 종종 서로 충돌했다. 이 시대는 인도-그리스 왕국으로 알려져 있다. 이 왕국은 기원전 180년에 그레코-박트리아 왕 데메트리우스가 인도를 침공했을 때 설립되었으며, 궁극적으로 박트리아 (오늘날의 북부 아프가니스탄)를 중심으로 강력한 그레코-박트리아 왕국에서 분리된 독립체를 만들었다. ‘인도-그리스 왕국이라는 용어는 여러 왕조의 수도가 여러 개 있었지만 현대 파키스탄의 탁실라는 아마도 현지 그리스 통치자들의 가장 초기 자리였을 것이다. 그러한 거주지 중 가장 큰 곳은 그 시대에 여러 왕조를 수용 할 수 있었다.

 

2세기에 걸친 그들의 통치 기간 동안 인도-그리스 왕들은 그들의 동전에서 볼 수 있듯이 그리스어와 인도어는 결합하고 그들의 도시의 고고학적 유적에서 볼 수 있듯이 고대 그리스어, 힌두교 및 불교 종교 관습을 혼합했다. 불교에 대한 그들의 지지의 표시. 인도-그리스 왕은 문화적 혼합주의를 달성한 것으로 보이며 그 결과는 특히 그레코-불교 예술의 확산과 영향을 통해 오늘날에도 여전히 느껴진다.

 

그리스(야바나) 군대는 찬드라굽타 마우리아가 난다 왕조를 무너뜨리고 제국을 건국하는 데 도움을 준 것으로 보이며, 기원전 312년경에 찬드라굽타는 인도 북서부 영토의 많은 지역에서도 그의 통치를 확립했다.

 

기원전 303년 셀레우코스 1세는 인더스로 군대를 이끌고 그곳에서 찬드라굽타를 만났다. 그들은 마침내 동맹을 맺었고, 평화 조약과 동혼 합의(Epigamia)’는 왕조의 결혼 또는 인도인과 그리스인 간의 결혼에 대한 합의를 의미하는 이 캠페인에서 주목할 만한 첫 번째 업적이었다.  

보검<세계불교네트워크 코리아 대표>

▲ 필자 보검스님이 남인도에서 힌두 승려와 함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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