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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양문화와 불교-⑳쿠샨제국, 4차 경전 결집 로마에 사절 파견

보검 이치란 스님 | 기사입력 2021/05/10 [07:52]
경전 결집 인도 왕사성 칠엽굴에서 1차, 미얀마 양곤에서 6차

서양문화와 불교-⑳쿠샨제국, 4차 경전 결집 로마에 사절 파견

경전 결집 인도 왕사성 칠엽굴에서 1차, 미얀마 양곤에서 6차

보검 이치란 스님 | 입력 : 2021/05/10 [07:52]

경전 결집 인도 왕사성 칠엽굴에서 1, 미얀마 양곤에서 6  

 

부처님께서 성도한 후, 45년간 많은 말씀을 하셨다. 그것은 바로 금구성언(金口聖言)이었다. 성인의 말씀은 아무리 들어도 싫증이 나지 않는 법이다. 깨달은 분이기에 그 분의 말씀 그대로가 진리인 것이다. 부처님이 살았던 당대 인도는 그야말로 수행자들로 넘쳐나는 시대였다. 많은 수행자들이 세속적 고통과 염세적 허무주의를 극복하고 무엇인가 영원한 안식처를 찾기 위하여 부귀영화라는 삶의 가치를 포기하고 무소유의 유행승이 되어서 해탈열반의 길을 추구하는 것이 일종의 풍조였다. 석가모니 부처님의 말씀은 힘이 있고 보편적 진리로서 설득력이 있었음에 틀림없다.

 

당시 인도에는 16대국이 있었고, 강대국은 코살라와 마가다였다. 부처님은 마가다와 코살라로부터 왕사 대접을 받았다. 특히 코살라에서는 국왕대신들로부터 큰 대접을 받았고, 기수급고독원이라는 엄청난 규모의 공원을 기증받았으며, 이곳에는 기원정사라는 절을 세워서 부처님은 제자들과 함께 승가공동체를 운영해 갔다.

 

인도는 날씨가 덥고 매년 우기(雨期)철이 있어서 여름철 3개월은 집중호우 때문에 움직일 수가 없다. 그래서 수행자들은 한 곳에 머물 수밖에 없고, 이 기간에는 집중 수련을 하는 것을 전통으로 확립해서 안거(安居)제도가 확립됐다.

 

45년 동안 부처님은 코살라국의 수도 쉬라바스티(사위성) 기원정사 등지에서 25안거를 보내게 된다. 45년 생애에서 많은 비중을 차지한 것이다. 부처님은 사위성 기원정사에서 금강경을 설하기도 했지만, 4아함경 가운데 871경을 설했다. 기원정사에서 무려 844경을 설했으며, 뿌바라마에서 23, 사위성 교외에서 4경을 설했는데, 이 경들은 디가 니까야(장아함경)6, 마지마니까야(중아함경)75, 상윳따니까야(상응부경전)736, 앙굿따라 니까야(증일아함경)54경을 배속 시켰다.

 

이렇게 4개의 아함경전에 배속시킨 것은 경전결집회의에서이다. 이처럼 경전 결집회의를 통한 부처님 말씀의 기록이 없었었다면. 오늘날 우리는 부처님의 말씀을 접할 수가 없다. 경전결집의 역사는 매우 이른 시기에 진행됐다. 부처님께서 열반에 든 다음, 바로 부처님의 말씀을 체계화하는 경전결집회의가 개최됐는데, 그곳은 마가다의 왕사성 칠엽굴이었다. 칠엽굴은 큰 동굴로서 이미 많은 수행자들이 기거하고 있던 일종의 수행 공동체였다. 결집내용은 경율(經律)이었는데, 경은 4부 니까야(아함경)였으며, 율은 수행공동체의 규칙과 입문통과의례인 수계의식과 사원 운영 등의 규칙이었는데, 이것은 부처님께서 말씀하신 부처님 직설(直說)에 의지해서 구송(口誦)에 의한 함송(合誦)으로 만장일치가 원칙이었다. 500명의 수제자 급들이 모여서 한사람(아난다)이 외우면 가부를 결정하여 체계화 시킨 것이었다.

 

처음 결집이 이뤄진 100년 후에, 바이샬리에서 2차 결집이 이뤄졌고, 2차 결집에서는 십사비법(十事非法)이라고 해서 열 가지 조항은 부처님의 가르침에 위배된다하여 보수 장로급 비구들이 주도하여 개최된 결집이었다.

 

3차 결집은 주로 부처님 말씀 내용에 집중해서 정법의 체계화였다. 3차 결집은 마우리아 왕조의 아소카 대왕의 후원으로 개최되었기 때문에 그 규모가 엄청났으며 불교사적으로도 획기적이었다.

▲ 아소카 대왕이 목갈리뿌따 띠사 왕사에게 경전 결집에 감사를 드리는 예를 표하는 장면.  

 

사실상 불교가 인도 아 대륙 밖으로도 전파된 것은 이 3차 경전 결집의 결과였다. 그리스-박트리아 왕국, 인도-그리스 왕국에 까지 불교가 전파된 것은 제3차 경전결집의 결과로서 헬레니즘과 불교가 만나서 사상적으로 융합하는 동서철학의 혼합주의가 탄생하게 된 배경이 되었다.

 

서양문화와 불교라는 주제로 담론을 전개하게 된 것도 멀리 거슬러 올라가면 경전결집, 특히 아소카 대왕의 후원으로 3차 경전 결집의 결과 때문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알렉산더 대왕 동방원정, 그리스-박트리아 왕국, 인도그리스 왕국의 시대를 경과하면서 불교는 그리스 헬레니즘 세계에 알려지게 되었고, 쿠샨제국이 이 지역의 패권을 장악하면서 로마제국과 관계를 열게 된다. 지중해의 그리스는 물론 헬레니즘 세계는 로마제국의 패권 이래 놓이게 되고, 인도 서북부는 쿠샨제국의 영향권에 놓이게 된 것이다.

▲ 남방 상좌부 전통에 의한 4차 빨리어 경전 결집이 이루어진 스리랑카 마탈레 알루비하라 동굴 사원.


쿠샨제국은 본래 월지족이 박트리아를 정복하고 인도-그리스 왕국까지 점령하여 장악함으로써, 오늘날의 아프가니스탄 대부분과 파키스탄과 인도의 일부까지 포함하는 대제국을 건설한 것이다. 쿠샨제국은 불교를 주류 종교로 그대로 계승하여 4차 경전 결집을 후원하여 주도했는데, 이 결과 불교가 동점(東漸)하는 계기가 됐다. 이렇게 본다면 불교는 동아시아 쪽 보다는 그리스어권인 헬레니즘세계인 지중해까지에 이르는 서방 쪽에 먼저 전파되었다. 오늘날 페르시아나 중동 지중해에는 불교의 전통이 단절되었지만, 동아아시아에는 강세를 보이고 있다. 중앙아시아나 서역(중국령 신강성 일대)에서도 불교는 한 때, 주류 종교였으나 현재는 이슬람이 장악하고 있다.

 

4차 결집은 남.북방 불교 양쪽에서 각기 개최됐는데, 남방 상좌부 전통은 스리랑카 마탈레 알루비하라 동굴 사원에서 빨리어 삼장(경율론)이 결집되었다. 사실상, 오늘날의 상좌부 경전체계는 여기서 체계화 된 것이다. 그리고 싱할라어로 문자화되었다.

▲ 쿠샨제국의 카니슈카 대왕이 부처님께 경배하는 모습.

 

한편 북방에서는 쿠샨제국의 카니슈카 대왕의 후원으로 기원후 78년경 설일체유부(說一切有部,사르바스티바다) 부파의 전통에 의하여 산스크리트어로 카슈미르 쿤달라바나(스리나가르 근교)에서 이루어 졌다. 이 결집에서는 설일체유부파의 카로스티 문자에 의한 간다리어 본 아비담마를 산스크리트어 아비다르마로 체계화시킨 결집이었다.

 

불교 경론에서 아비다르마의 위상은 크다고 할 수 있다. 한역에서는 아비달마(阿毘達磨, Abhidharma,)라고 하며, 상좌부에서는 아비담마(Abhidhamma)라고 말한다. 빨리어와 산스크리트어 차이일 뿐이다. 아비다르마의 뜻은 대법(對法)이다. () 즉 부처님께서 설한 교법에 대한 연구와 해석을 말하는 것으로서, 협의의 아비달마는 부파불교의 여러 논(, sastra), 즉 논서(論書)들을 뜻한다. 오랫동안에 걸쳐서 많은 논()들이 만들어지고 후일에 정비되어 논장(論藏)이 되었다. 아비다르마구사론은 세친이 저작한 주석서이다.

 

설일체유부는 초기 불교 부파 가운데 하나로서 히말라야 산맥을 따라 네팔에서 카슈미르 일대와 중앙아시아에서 7세기까지 크게 번성했던 부파이다. 그리스-페르시아계에 가까운 담마굽타카(법장부)와 함께 쿠샨제국에서 주류 부파로 존재했다. 이 설일체유부파는 결국 마하야나(대승)에 계승되었으며, 경론(經論)에 강했다. 반면 그리스-페르시아계에 가까운 담마굽타카는 계율에 강했는데, 이 파의 계율 체계를 <사분율>이라고 한다. 동아아시아 승단에서 처음 입문하는 승려들의 수계의식은 이 담마굽타카의 사분율에 의지하고 있다.

 

남방 상좌부에서는 1천 년 전부터 비구니 계맥이 단절되었는데, 199612월 담마굽타카의 비구니 계맥을 계승한 한국과 대만 비구니 계단에서 비구니 계맥을 남방불교로 이어간 것은 너무나 재미있는 역사의 반복이다.

 

쿠샨제국에서의 아비다르마가 산스크리트어로 체계화 된 것은 그리스-박트리아, 인도-그리스 왕국이라는 헬레니즘의 그리스 철학 사상과 불교의 심리철학이 상당한 수준으로까지 교섭이 있었음을 나타내 주고 있다. 쿠샨제국은 로마제국과 본격적인 무역관계가 이루어 졌다. 쿠샨제국(30375)은 오늘날의 아프가니스탄 카불, 파키스탄의 페샤와르 탁실라에 수도를 두고 있었다. 로마제국(기원전 27~395)은 서로마(395~476)와 동로마(395~1453)까지 1500년간 지속된 제국이었다.  

▲ 쿠샨제국에서 발행된 브라미 문자와 로마 황제 루키우스 셉티미우스 세베루스와 줄리와 돔나 황후 초상화가 생겨진 코인

 

▲ 그리스-로마 전사가 새겨진 유리 꽃병.쿠샨제국 베그람 2세기.

 

이처럼 쿠샨제국과 로마는 긴밀한 관계를 유지했다. 쿠샨제국에서는 로마에 대사(大使)들을 파견할 정도였다. 117년에서 284년에 걸친 로마 황제들의 전기인 히스토리아 아우구스타(Historia Augusta)에서, 14대 황제 푸블리우스 아일리우스 트라야누스 하드리아누스(Publius Aelius Trajanus Hadrianus,76~138, 재위:117~138)를 언급하면서. “ 박트리아 왕들은 방문사절(탄원대사)을 로마황제에게 보내서 황제와의 우호관계를 모색했다라고 기록했다.

보검<세계불교네트워크 코리아 대표>

▲ 필자 보검스님이 1만 여명의 라마승들이 공부하고 있는 남인도 티베트 닝마파 소속의 남돌링 사원대학을 방문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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