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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양문화와 불교-㉒ 로마세계는 불교를 어떻게 받아들였나?

보검 이치란 스님 | 기사입력 2021/05/24 [08:53]
로마제국의 모든 도시들은 조상 전래의 종교를 그대로 유지했다

서양문화와 불교-㉒ 로마세계는 불교를 어떻게 받아들였나?

로마제국의 모든 도시들은 조상 전래의 종교를 그대로 유지했다

보검 이치란 스님 | 입력 : 2021/05/24 [08:53]

로마제국의 모든 도시들은 조상 전래의 종교를 그대로 유지했다 

 

그리스 헬레니즘세계와 불교를 고찰하면서 이제 타임라인은 자연스럽게 로마제국 시대로 이행할 수밖에 없다. 인도와 중앙아시아의 판도가 그리스-박트리아, 인도-그리스왕국, 쿠샨제국으로 이어지는 동안 지중해에서는 로마제국이 서서히 부상하고 있었다. 로마세계라고 해서 그리스 헬레니즘과 동떨어진 별개의 세계가 아니고, 헬레니즘 세계를 정복하고 일어난 것이 로마제국이다.

▲ 기원후 1세기 무렵의 불교확장과 로마세계와 인도와의 무역 루트 지도.    

 

파르티아는 쿠샨제국이 부상하기 전부터 페르시아 지역에 존재하고 있었다. 파르티아는 사실상 페르시아의 정통성과 적통성을 계승하고 있는 제국이나 다름없었다. 헬레니즘시대에 그 세력을 키워서 거의 5백 년 동안 존속한 제국이다. 파르티아는 고대 이란과 메소포타미아 지역의 주요 이란계 정치적 문화적 체제였다. 이 제국은 로마의 서양과 동양을 잊는 비단길 무역로 한복판에 위치해 있었으며, 교역과 상업의 중심지로 번창했다.

 

이런 정치 군사 문화 지형에서 불교는 박트리아, 인도-그리스 왕국을 계승하여 쿠샨제국이 주도하고 있었다. 헬레니즘 세계가 와해되고 로마제국이 건국되면서 인도와의 교류는 육로 상으로 보다는 해상으로의 루트가 활성화되기 시작했다. 한편 불교는 인도 전역에 확장됨과 동시에 중앙아시아 초원길과 타림분지의 오아시스를 따라서 후한의 낙양에 까지 이르고 있었다.

 

일반적으로 우리는 중국불교가 인도에서 직수입된 것으로 오해하고 있다. 하지만 실제로는 그렇지 않다. 중국에 처음 전해진 불교는 서역불교였다. 중국에 불교가 전래된 것은 서력기원 전후이다. 처음엔 이른바 서역이라고 하는 박트리아, 인도-그리스, 파르티아, 쿠샨제국이라는 서역불교가 전해진 것이다. 후한 말에 이르러서야 서역과 인도에서 역경승려(譯經僧侶)들이 오면서 불경(佛經)이 한역(漢譯)된 것이다.

 

중국과 서역이 교섭한 것은 전한(前漢: BC 206~AD 8)시대이다. 전한 무제(武帝: 재위 BC 141~BC 87) 때 처음으로 중국과 서역 여러 나라를 연결하는 동서 교역로가 개척되었는데, 이 교역로가 중국에 불교가 전래되는 계기였다. 결과적으로 이 교역로는 독자적인 문화를 이루던 두 지역인 중국과 인도를 연결하는 효과를 가져왔다. 이쯤해서 중국 불교 이야기는 차후로 미루고 인도와 로마제국과의 관계부터 이야기를 풀어 가보기로 하자.

 

지중해 세계는 로마제국이 생기면서 중앙아시아와 인도의 무역 루트가 육상과 해상으로 발전했다. 육상은 그리스에서 유프라테스 강을 지나 사마르칸트의 박트리아로 가서 인도로 남하하는 길이 주 간선로이다. 알렉산더가 동방원정을 했던 길이나 마찬가지이다. 하지만 로마제국은 로마에서 지중해를 가로질러서 이집트 수에즈 만 입구로 가서 홍해로 나아가 아덴만에서 인도로 향했다.

 

로마 제국은 지중해를 중심으로 유럽, 북아프리카, 서아시아 등지를 다스린 대 제국이다. 로마 역사는 대체로 세 시기로 나눠 볼 수 있다. 로마는 기원전 625년경 에트루리아와 라티움으로 알려진 고대 이탈리아 지역에서 설립되었다. 로마의 도시 국가는 처음에 에트루리아 침략에 대응, 주변 언덕의 정착민들과 함께 라티움 마을 사람들에 의해 형성되었으며 고고학적 증거는 기원전 600년경에 엄청난 변화와 통일이 일어났다는 것을 보여준다.

 

건국부터 기원전 510년까지는 왕의 시대였으며 이 짧은 기간 6명의 왕이 이끄는 로마는 상품의 생산과 무역의 증가로 군사적 및 경제적으로 발전했다.

▲ 포에니 전쟁에서 알프스산맥을 넘는 한니발 장군. 포에니 전쟁은 기원전 264년에서 기원전 146년 사이에 로마와 카르타고가 세 차례에 걸쳐 120년간 벌였던 전쟁을 말한다.  

 

로마는 기원전 510년에 공화정시대에 들어갔다. 더 이상 왕이 통치하지 않는 로마인들은 상류층의 대표인 상원 의원과 승마자인 기사를 통치하는 새로운 형태의 정부를 설립했다. 기원전 451년에 로마인들은 공적, 사적, 정치적 문제를 위한 표준화 된 법규인 ‘12동판법을 제정했다.

 

로마는 공화정 기간 동안 계속 확장되었고 BC 338년까지 이탈리아 반도 전체를 장악했다. 로마가 카르타고와 코린토스를 장악하고 지중해에서 지배적인 해양 세력이 된 것은 그리스와의 일부 갈등과 함께 BC 264-146년의 포에니 전쟁이었다.

 

포에니 전쟁은 기원전 264년에서 기원전 146년 사이에 로마와 카르타고가 세 차례에 걸쳐 120년간 벌였던 전쟁이다. '포에니라는 말은 페니키아인이라는 뜻으로 카르타고가 페니키아에 기원을 두고 있기 때문에 로마인들이 그렇게 부른 것이다.

 

얼마 지나지 않아 로마의 정치적 분위기는 공화국을 혼란과 내전의 시기로 몰아넣었다. BC 79년 설라가 사임하자 공화국은 불안한 상태로 돌아왔다. 로마가 50년 동안 공화국으로 계속 통치되는 동안, 율리우스 카이사르가 집권한 기원전 60년에 제국주의로의 전환이 구체화되기 시작했다.

 

기원전 51년에 줄리어스 카이사르는 켈트 갈리아를 정복했으며 로마의 국경이 지중해 지역을 넘어 확장되었다. 상원은 여전히 ​​로마의 통치체제였지만 그 권력은 약해졌다. 줄리어스 카이사르는 기원전 44년에 암살되었고 마크 안토니와 함께 통치했던 그의 상속인 가이우스 율리우스 카이사르 옥타비아누스(옥타비아)로 대체되었다. 기원전 31년에 로마는 옥타비아를 로마의 독보적인 통치자로 남겼다. 옥타비아는 아우구스투스의 칭호를 맡았고 로마의 첫 번째 황제가 되었다.

 

로마의 제국 시대는 기원전 31년 로마의 첫 번째 황제의 부상으로 시작, 서기 476년 로마가 몰락 할 때까지 지속되었다. 이 기간 동안 로마는 수십 년 동안 평화, 번영 및 확장을 보았다. 서기 117년에 로마 제국은 소아시아, 북아프리카 및 대부분의 유럽을 포함한 3개 대륙에 걸쳐 최대판도에 도달했다. 서기 286년에 로마 제국은 동서 제국으로 나뉘어 각각 황제가 통치했다. 로마는 서로마 제국이 종식 한 AD 476 년까지 계속 쇠퇴했다. 비잔틴 제국으로 알려진 동부 로마 제국은 서기 15세기까지 살아남았다. 터키가 서기 1453년 수도인 콘스탄티노플 (이스탄불)을 장악했을 때 무너졌다.

▲ 로마제국의 초대황제 아우구스투스.  

 

삼두 정치의 붕괴 후, 옥타비아누스는 대외적으로 로마 공화국을 부활시키고 정부에 관한 권한은 로마 원로원에게 주었으나, 사실상 권력을 독점하였다. 유일한 통치자가 다스리지만 대외적으로는 공화국 형태인 정치 체제의 기틀을 다지는 데는 오랜 시간이 걸렸다. 황제권은 옥타비아누스 이전에 로마를 통치했던 카이사르와 술라의 독재권과는 전혀 달랐다. 아우구스투스는 재정적인 성공과 원정에서 얻은 물자, 제국 전체에 걸쳐 군인과 재향 군인의 충성, 원로원에서 부여한 여러 권한과 명예 그리고 사람들의 존경을 받아 절대적인 권력을 누렸다. 아우구스투스가 가진 로마의 정예병 로마 군단 다수를 통제할 수 있는 권한은 원로원에게 군사적인 위협이 되어 원로원의 결정을 억압하였고, 군사적 수단을 사용하여 원로원의 정적들을 제거하여 원로원이 자신에 복종하게끔 하였다.

▲ 악티움 해전은 옥타비아누수에게 승리를 안겨준 전쟁이었다.    

 

아우구스투스의 통치는 로마의 평화(팍스 로마나)라 불리는 태평성대를 이루었다. 지중해 세계는 두 세기가 넘게 평화를 지속할 수 있었다. 아우구스투스는 로마 제국의 영토를 넓혔으며 제국의 국경과 동맹국을 보호하였고 파르티아와 평화 협정을 맺었다. 그는 로마의 조세 체계를 개선하였고 파발을 위해 육로 교통망을 구축하였으며 상비군과 소수의 해군 그리고 황제의 친위대인 로마 근위대를 창설하였다. 또한 로마에 경찰청과 소방청을 설치하였고 로마 시의 상당 부분을 재개발하였다.

 

악티움 해전은 안토니우스의 내전 기간에 일어난 해전으로, 마르쿠스 안토니우스와 이집트의 클레오파트라 여왕의 연합 함대와 옥타비아누스의 함대가 교전했다. 기원전 92일 그리스의 악티움 곶 인근 이오니아 해에서 전투가 발발했다. 옥타비아누스의 승리는 로마와 로마의 영토에 대한 옥타비아누스의 세력을 확고히 하게 했다.

 

에드워드 기번의 로마 제국 쇠망사는 역사학, 경제학, 정치학, 문화에 커다란 영향을 미쳤다. 로마 제국 쇠망사는 나폴레옹에게 제국의 야망을 갖게 했고 윈스턴 처칠이 자신이 '회고록' 을 집필하는 데는 '쇠망사'의 영향이 컸다고 말한다. 애덤 스미스는 이 책을 애독하였으며, 토머스 칼라일도 마찬가지였고, 아널드 토인비도 이 책의 영향을 받았고, 버지니아 울프도 큰 영향을 받았다고 한다. 또한 시오노 나나미가 로마인 이야기를 집필하는데 이 책에 대한 반항심이 작용했다고 한다. 이후 수많은 소설과 영화, 드라마에 영감을 주었으며 현대에 이르러서도 로마에 대한 기본 자료들로 활용되고 있다. 역사상 로마와 관련된 저작중 제1의 권위를 가진 저서로 꼽힌다.

▲ 에드워드 기번(Edward Gibbon,1737년~1794년)과 《로마 제국 쇠망사》.  

 

에드워드 기번에 따르면 제국의 수도인 로마는 세계 각 지역에서 온 신하들과 이방인들로 넘쳐났으며, 자기 고장의 종교를 믿었을 뿐만 아니라 그것을 로마에 소개하기 까지 했다. 제국의 모든 도시들은 조상 전래의 종교를 그대로 유지했다.”라고 했다.

 

로마제국은 인도와는 해상 루트를 통해서 무역관계가 이루어졌으며, 자연스럽게 불교도 로마까지 전파되는 계기가 됐다. 로마제국에 뿌리를 내리지는 못했지만 불교승려들은 로마제국의 이곳저곳까지 발길이 미쳤으며, 희랍적 로마 사상과 불교는 상호 융합하는 과정을 거치게 됐으며, 영향을 미쳤다.

 

로마제국이 그리스의 헬레니즘 세계를 정복했지만 그리스의 예술에는 로마가 정복당했다. 그리스어가 학문의 언어였다면 라틴어는 법률과 공공 거래의 언어였다. 학문과 상업의 두 분야에 종사하는 사람은 두 언어 모두에 능통했다. 속주의 어느 지역에서 살든 교양 있는 로마인이라면 이 두 언어를 어느 정도 알고 있었다.

보검<세계불교네트워크 코리아 대표>

▲ 필자 보검스님 편백운 총무원장스님과 국제회의에 참석, 외국승려들과 담소를 나누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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