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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양문화와 불교-㉓ 페르시아의 종교와 불교전도

보검 이치란 스님 | 기사입력 2021/05/31 [08:22]
이란계 승려들이 지중해와 중국에 불교전파 역경작업

서양문화와 불교-㉓ 페르시아의 종교와 불교전도

이란계 승려들이 지중해와 중국에 불교전파 역경작업

보검 이치란 스님 | 입력 : 2021/05/31 [08:22]

이란계 승려들이 지중해와 중국에 불교전파 역경작업 

 

불교전파를 담론하면서 페르시아 불교를 빼놓고선 불교 이야기가 전개되지 않는다. 동아시아 불교를 접하는 대부분의 사람들은 불교가 인도에서 중국에 바로 직수입된 것으로 알고 있다. 하지만 불교가 인도에서 중국으로 바로 직수입되기 전, 인도 불교는 그리스-박트리아, 파르티아, 쿠샨제국을 거쳐서 중국에 전파됐다. 한국불교사를 논할 때도, 서기 372년 고구려 소수림 왕 2년 전진(前秦)에서 부견 왕이 사신과 함께 순도화상을 보내 불상과 불경(佛經)을 전한 것이 그 시초이다. 2년 후(374) 아도(阿道) 화상이 들어와 절을 세운 것이 또 한국의 절(寺刹)의 시작이다. 그러나 이것은 국교를 통한 공식 전입으로 실상 민간에 먼저 불교가 들어왔을 것으로 보인다. 하지만 전진이란 나라도 부견이란 왕에 대해서도 더 이상 자세한 소개가 없다. 전후관계가 있고 인과의 줄거리가 있음에도 때로는 이런 역사적 사건들이 간략하게만 소개된다.  

 

어떻게 보면 불교는 동양보다는 서양에 더 먼저 알려졌다. 오늘날까지 정착이 되지 않아서 보존이 안 되고 있을 뿐이다. 알렉산더 대왕의 동방원정을 통해서 불교는 헬레니즘 세계에 알려졌고, 로마제국 시대에도 불교는 지중해까지 진출했다. 중국에 불교가 전달되기 전의 역사이다.

 

불교가 지중해까지 전달되는 과정에서 페르시아를 그냥 건너 뛸 수가 없다. 페르시아는 오늘날의 이란 이라크 중앙아시아 등지이고, 아프가니스탄 투르크메니스탄 우즈베키스탄 타지키스탄 파키스탄 인도 북서부가 페르시아의 영역이었다.

▲ 바빌로니아에 잡혀 있던 유대인을 해방하는 페르시아의 키루스 2세.    

 

페르시아는 이란인들의 옛 고향이다. 이란 고원에 인류가 정착한 것은 아주 오래된 일이며, 이란인은 인도 유럽 아리아 족으로 이곳을 일찍이 차지했다. 스키타이족, 메디아족, 이란족 등이 모두 아리아인의 한 갈래이다. 이란 족들은 메소포타미아의 수메르나 바빌로니아에 맞서 싸우는 용병이었으며, 원주민들을 정복하여 고원을 장악해 '이란'(아리아인의 땅)을 세웠다. 기원전 7세기 쯤, 이란인들의 일파인 메디아 인들이 메디아 왕국(기원전 708~기원전 550)을 세웠으나 중앙 집권 국가를 이루지 못하고 부족 연합체에 그치고 말았다.

 

메디아는 티그리스-유프라테스 연안의 '비옥한 초승달', 오늘날의 이라크 땅을 차지하기 위해 신바빌로니아 왕국에 맞섰으나 결국 패하고 말았다. 이란 남부 아케메네스 왕조 (기원전 550~기원전 330)는 키루스 2(Cyrus the Great)가 연 왕조다. 키루스는 주변 부족 국가들을 통합, 서쪽으로는 소아시아(터키)와 아르메니아, 동쪽으로는 힌두쿠시까지 세력을 확장했고 기원전 539년 바빌로니아를 정벌했다.

 

키루스 2세는 성경의 기록대로 바빌로니아에 노예로 잡혀 있던 유태인들('바빌론 유수')을 해방시켜준 왕이다. 키루스 2세는 이집트마저 정복하길 원했지만 당대에는 꿈을 이루지 못했고, 아들 캄비세스 2세는 이집트를 정복, 이집트 27왕조의 파라오가 되었으나 왕이 이집트에 가 있는 동안 이란에서는 쿠데타와 혼란이 벌어졌고, 캄비세스 2세는 에티오피아 원정이 실패한 뒤 실각했다.

 

캄비세스 2세 사후의 혼란을 수습하고 즉위한 다리우스 1세는 인도 북부에서 오늘날의 불가리아 남부까지 영토를 확장했다. 헬레네스(그리스인)들의 간담을 서늘케 했던 '페르시아 제국'의 시대가 온 것이다. 지중해와 홍해를 잇는 운하를 최초로 건설했다. 수에즈 운하의 원형이 그 옛날에 만들어졌던 셈이다. 그리스인들은 이 거대 제국을 페르시아라고 불렀는데, 파르시어를 쓰는 사람들의 땅이란 뜻이다. 이것을 유래로, 이란어를 파르시라고 한다. 그러므로 '이란 제국'이 맞는 말이지만 지금은 '페르시아'가 일반화된 용어가 되었다. 메디아를 필두로 줄줄이 이어진 왕국들을 모두 '페르시아'라 하고, 메디아 왕조, 아케메네스 왕조 식으로 '왕조'를 붙여 구분하지만 뿌리는 다 똑같다.

▲ 바빌론 유수는 기원전 587년 유다 왕국이 멸망하면서 치드키야 왕을 비롯한 유대인이 신바빌로니아 제국의 수도 바빌론에 포로로 잡혀간 것을 말하며, 기원전 538년에 신바빌로니아를 정복한 아케메네스 페르시아 제국의 키루스 2세에 의해 풀려날 때까지 약 50년 동안의 기간을 뜻한다.

 

페르시아에 정복된 그리스 식민도시들은 밀레투스를 중심으로 반란을 일으켰다. 아테네가 개입하면서 전쟁이 발발했다. 다리우스 1세가 3차에 걸친 전쟁을 벌였다. 2차 원정에서는 유명한 '마라톤 전투'로 퇴각한다. 헤로도토스는 마라톤 전투를 대서특필했지만 페르시아에서는 별로 중요하게 생각지도 않았던 전투였다. 역사학자들은 헤로도토스의 기록이 당시 병력규모로 미뤄 과장되어 있을 소지가 높다고 지적한다.

 

다리우스 1세는 3차 원정을 준비하던 중에 숨졌다. 뒤를 이은 인물은 크세르크세스이며, 살라미스 해협에서 아테네 해군에게 궤멸됨으로써 10여년에 걸친 원정을 실패하게 되고 전쟁의 패배, 국력 쇠퇴, 줄지어 반란을 일으키고 지배층은 분열됐다.

 

아케메네스 왕조는 메디아 왕조와 달리 중앙 집권 체제와 사회·경제적 토대를 갖춘 명실상부한 제국을 만들었다. 당시의 행정과 치안, 세금 제도 등을 담은 상세한 기록들이 전해온다. 특히 도로망과 역마 제도는 특출했다. 전국 어느 곳에건 보름 이내에 중앙 정부의 뜻이 전달될 수 있었다고 한다. 제국의 수도인 수사에서 지금의 터키 북쪽 리디아 속주까지 고속도로가 연결되어 있었고, 이 네트워크는 속주들의 반란을 막는 안보 시스템이기도 했다.

 

아케메네스 왕조는 알렉산드로스 대왕에 의해 멸망했다. 알렉산더가 바빌론 땅에서 후계자 없이 사망한 뒤 광대한 영토는 휘하 장군 4명이 나눠 가졌다. 그들 중 이란을 지배했던 것은 셀레우코스 1세 장군이었다. 셀레우코스와 그 후손들이 이끈 왕조가 셀레우코스 왕조(기원전 312기원전 247)이다. 셀레우코스 왕조는 지배구조를 만들기도 전에 반란에 시달렸다. 타지키스탄 지역인 파르스(Fars) 지방에서는 반 유목민인 파르티아 족(이란족과 스키타이족의 혼혈)이 셀레우코스 왕조를 무너뜨리고 파르티아 왕조(기원전 247기원후 224)를 세웠다.

▲ 노란 부분이 파르티아.  

 

▲ 스키타이족은 사카(Saka), 사카이, 사이, 이스쿠자이, 아스쿠자이라고도 불리는, 주로 스키타이어를 사용한 이란계 민족에 속하는 유라시아 유목민들이다. 기원전 100년경의 파르티아와 스키타이.  

 

▲ 파르티아의 최대 판도

 

파르티아 왕조는 미트라다테스 2(기원전 123기원전 87) 치세 때 세력을 확장해 인도와 아르메니아에 이르는 광활한 영토를 장악, 로마 공화정과 상대했다. 실크로드를 따라 이란의 직물(페르시아 카펫)이 동서양을 오갔다. 지배층은 조로아스터교를 숭배했지만 대중들에게까지 퍼지지는 못했다. 파르티아족의 출신지인 파르타브 지방의 언어인 파흘라비어(Pahlavi)가 공용어로 사용됐는데, 1979년 호메이니의 이슬람 혁명으로 붕괴된 파흘라비 왕조(팔레비 왕조)는 여기에서 이름을 따온 것이다. 안타까운 것은, 파르티아가 500년 가까이 존속됐음에도 불구하고 뒤이은 사산 왕조(224652)가 조직적으로 전대의 유산을 파괴했기 때문에 역사 복원이 잘 되고 있지 않다.

 

파르티아는 이란 족과 스키타이 유목민 사이의 혼혈이기 때문에 문화적으로나 정치적으로 매우 이질적인 종교 체계와 신념을 가지고 있었다. 파르티아인의 대부분은 다신교를 신봉했다. 소수의 기독교인과 유대인을 제외하고는 대부분이 다신교적이었다. 또 신들은 종종 그리스와 이란의 신들이 겹쳤다. 그리스의 제우스와 페르시아의 아후라 마즈다, 그리스 신화에 나오는 죽음과 지하세계를 관장하는 하데스와 앙그라 마이뉴(아흐리만)인데, 조로아스터교의 악신이다. 그리스 신화에 나오는 미와 사랑의 여신인 아프로디테 여신과 그리스 최고 여신인 헤라는 조로아스터교의 물과 생명을 관장하는 아르드비 수라 아나히타 여신과 함께 신봉되었다.

 

그리스 신화에 나오는 태양과 예언 및 광명·의술·궁술·음악·시를 주관하는 아폴론은 로마 신화의 아폴로와 동일시된다. 아폴론은 파르티아의 미트라 신과 그리스의 여행자·목동·체육·웅변·도량형·발명·상업·도둑과 거짓말쟁이의 교활함을 주관하는 헤르메스 신은 메소포타미아 신화에 등장하는 태양과 정의, 법의 신인 우투(샤마쉬) 신과 동일시 됐다.

▲ 쿠샨제국 출신 지루가참.  

 

마니(마네스)(216~274)는 페르시아의 예언자로 마니교의 창시자다. 마니교는 조로아스터교 ·기독교·불교의 요소가 결합한 고대 후기(2-8세기)의 영지주의 종교로 한때 크게 융성하였지만, 13세기 초반에 사멸되어 현전하지 않는다.

 

이란의 불교는 파르티아 제국 시대에 쿠샨제국에서 전파되었다. 이 지역에는 일찍이 그리스-박트리아, 그리스-인도 왕국이 불교를 주류 종교로 수용했고, 박트리아와 인도-그리스 왕국을 차례로 점령하여 쿠샨제국을 세운 월지족도 불교가 주류 종교였다. 파르티아는 쿠샨제국에서 불교가 전파되었고, 파르티아 출신의 안세고(148180)는 기원후 2세기 파르티아 후작 급 왕자로서 출가하여 쿠샨제국의 수도에 가서 불교를 공부한 다음, 중국 후한의 수도 낙양에 진출하여 역경을 전문으로 했다.

 

그는 특히 소승불교의 전적(典籍)인 아비달마와 선경(禪經)에 정통하였다. 안세고는 148년에 뤄양(洛陽)에 들어와 안반수의경을 비롯하여 3440권의 불교 경전을 번역하여 소개하였다. 그의 불경 번역은 중국 역경사에서 최초기에 해당한다. 후한(25~220) 시대에 번역된 불교 경전들은 대체로 세련되지 못하고 난해한 편이다.

 

지루가참(로칵세마)은 후한시대에 쿠샨제국에서 147년 중국에 온 역경승으로 183년까지 반주삼매경·량청정평등각경·도행반야경·수릉엄삼매경14부의 경전을 번역하였다. 그가 사용한 원전은 대승경전으로 중국에 대승경전을 전한 최초의 인물이다.

보검<세계불교네트워크 코리아 대표>

▲ 필자 보검스님이 설악산 신흥사 ‘설악 무산’ 대종사님 탑비제막식에 참석, 추모하고 있다. 생존 시에 스님을 모시고 해외포교를 함께 했으며 《만악가타》 선시집을 영역하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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