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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정태 박사의 한국종교학●성주 옥천서원과 정읍 무성서원

매일종교신문 | 기사입력 2021/06/02 [08:23]
신라 후기 최치원과 조선 중종 신잠의 사당을 합친 정읍 무성서원

장정태 박사의 한국종교학●성주 옥천서원과 정읍 무성서원

신라 후기 최치원과 조선 중종 신잠의 사당을 합친 정읍 무성서원

매일종교신문 | 입력 : 2021/06/02 [08:23]

 

 

崇明排靑思想의 동기 부여한 옥천선원 

 

옥천서원은 조선중기 인물인 이사룡(李士龍)을 제향하기 위해 건립했다. 이사룡(李士龍, 1595~1641)은 본관이 성산(星山), 자는 사중(士中)으로 조선중기의 무인이다. 그는 인조 18(1640) 청나라가 명나라를 치기 위한 원병으로 징발되어 동북지방의 전투에 출전하였는데, 이듬해의 접전에서 임진왜란 당시 입은 명의 은혜를 생각하여 전투에 임하여 명군에 공포(空砲)를 쏘다가 발각되어 처형당하였다고 합니다. 이후 그는 의사(義士)로 불리게 되었으며, 정조 17(1793) 성주목사에 추증되고 정려(旌閭)가 내려졌다.

 

옥천서원은 숙종 18(1692) 성주목사 안방준(安邦俊, 15731120~ 16541113일 임진왜란 때 호남 의병으로, 정묘호란과 병자호란에는 호남 의병장으로 활동하였다. 광해군 때 그를 등용하려 하였으나 사양하였다. 인조반정 이후 관직에 여러번 제수되었으나 서인 편향의 조정에 출사를 거부하고 후학 양성에 매진하다가 병자호란과 정묘호란 때 의병을 이끌고 청나라 군사와 맞서 싸웠다. 효종 때 유일로 천거되어 사헌부 지평에 임명되었으나 나가지 않았다. 그 후 사헌부 장령 등을 거쳐 공조 참의에 이르렀다. 당색으로는 서인으로, 김집과 함께 김육의 대동법을 반대하였다. 호남지방의 저명한 성리학자로 명성을 떨쳤다.)과 관내의 사민(士民)들에 의해 그가 살았던 곳인 월항면 인촌리 작촌에 충렬사(忠烈祠)로 처음 건립된 것에서 연유하며, 정조 20(1796) 사액되었다.

 

그 후 충렬사는 옥천충렬사(玉川忠烈祠) 또는 옥천서원(玉川書院)으로 불려지다가 고종 8(1872) 서원 철폐령에 의해 훼철되었으며, 1919년 직계후손들의 집성촌이 있는 현 위치에 중건되었다.

 

서원은 산록 경사지에 위치한 관계로 부지를 4단으로 조성하였고 앞쪽으로 강당인 충의재와 동·서재가 자리하고 있으며, 뒤쪽에 사당인 충렬사가 가장 높은 곳에 위치하는 전학후묘(前學後廟)의 배치방법을 취하고 있습니다. 또한 강당 우측에는 서원이 훼철되었다가 중건되기 이전 사당의 역할을 대신하였던 가묘(家廟)의 일곽이 자리하고 있다.

 

옥천서원은 건축적인 측면에서 사당과 가묘가 일곽 내에 공존하고 있다는 점에서 서원의 변화된 양상을 살필 수 있을 뿐 아니라, 제향 주인공인 이사룡이 조선후기 숭명배청사상의 중요한 하나의 동기를 부여하고 있는 매우 주목될 수 있는 인물이라는 점에서 그 문화재적 가치가 높다고 할 수 있다.

 

신라 후기 최치원과 조선 중종 신잠의 사당을 합친 정읍 무성서원

 

정읍 무성서원(井邑 武城書院)은 신라 후기의 학자였던 고운 최치원과 조선 중종때 관리였던 신잠(申潛)을 모시고 제사지내는 서원이다. 19681219일 사적 제166호에 지정되고, 2019710일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에 등재되었다.

 

정읍 무성서원은 고려시대에 지방 유림의 공의로 신라 후기의 학자이자 문장가였던 고운 최치원(崔致遠)의 덕행과 학문을 추모하기 위하여 유상대(流觴臺) 위에 사당(祠堂)을 건립하여 태산사(泰山祠)라 하였다. 1484(성종 15) 정극인(丁克仁)이 세운 향학당(鄕學堂)이 있던 지금의 자리인 전라북도 정읍시 칠보면 무성리로 이전하였다. 1549(명종 4) 영천자 신잠(申潛)의 생사당(生祠堂)을 짓고 배향하였다.

 

1615(광해군 7)'태산사'(泰山祠) 자리에 현지 선비들이 '태산서원'(泰山書院)을 지었으며, 1696(숙종 22) 최치원과 신잠의 두 사당을 합치고 무성서원(武城書院)이라 사액(賜額)을 받았다.

 

이후 1630(인조 8) 정극인(丁克仁송세림(宋世琳정언충(鄭彦忠김약묵(金若默)1675(숙종 1) 김관(金灌)을 추가 배향하였다.

 

서원의 배치는 약간 경사진 땅 위에 강당과 사당을 잇는 직선축을 중심으로 정문인 누각 현가루와 내삼문을 배치하고, 주변에 전사청과 교직사, 비각 등을 세웠다. 사당은 정면 3, 강당은 정면 5칸이고, 강당과 재실은 모두 마루와 온돌이 결합된 양식이다. 무성서원의 구조적 특징은 다른 서원과는 달리 재실이 담 밖에 세워졌다는 점이다.

 

무성서원(武城書院)이 자리잡은 정읍시 칠보면 무성리는 서남쪽에 솟은 칠보산에 기대어 형성된 마을이다

 

마을에 전면과 좌우에 넓은 들이 있고 들 가운데 칠보천이 흘러 마을 북편의 동진강에 합수된다. 성황산을 배경으로 전형적인 배산임수형마을 형국을 이루는 이곳의 중심부에 무성서원이 있다. 무성서원은 서원의 일반적인 입지조건과는 달리 향촌내 그것도 마을 중심부에 자리한 매우 이례적인 사례로 향촌민과 함께 하면서 지역문화을 선도하며 지식인의 사회적 역할과 책임을 감당하려는 의미을 이곳에서 읽을 수 있다.

 

무성서원의 교육 목표와 내용 및 방법 등 일체의 교육과정을 상세하게 제시하고 있는 원규(일종의 학칙)에 따르면 서원에서는 유학 가운데서도 특히 성리학을 공부하는데 힘썼는데, 격몽요결, 소학에서부터 시작해서 대학, 논어, 맹자, 중용, 시경, 서경, 주역, 예기, 춘추를 읽는 것이 원칙이었으며, 입학 기준에 있어 나이나 신분에 상관없이 독서에 뜻이 있고 배우고자 하는 자는 모두 허락하였지만 일단 입학하게 되면 반드시 용모를 단정히 하고 오로지 정신을 통일하여 의리를 깨우침에 힘쓰며 서로 돌아보고 잡담하지 말 것을 엄격히 강조하였다.

 

1486(성종 17) 이후의 봉심안(奉審案), 강안(講案), 심원록(尋院錄), 원규등의 귀중한 자료들이 많이 남아 있으며, 조선 후기 대원군의 서원철폐령에도 남아있던 47개 서원 중 전북도내 유일의 서원 가운데 하나이다. 조선 시대 수많은 선비를 길러낸 서원으로 당시 교육활동의 모습을 가장 잘 보여주는 곳이기도 하다. 을사늑약이 체결된 이듬해 1906년 연암 최익현과 둔헌 임병찬이 일제의 침략에 항거하기 위해 호남의 병을 창의한 역사적 현장이다.

 

19681219일 대한민국의 사적 제166호 무성서원으로 지정되었다가, 2011728일 정읍 무성서원으로 명칭이 변경되었다.

 

서원은 풍수 지리적으로 조산인 성황산(109.7m)과 안산인 시산(136.2m)으로 위요되어 있으며, 성황산의 혈 자리에 위치하고 있다. 또한 서원 앞쪽으로자라내가흐르고 있는 전형적인 배산임수의 형국을 띄고 있다. 주변 환경으로는 감운정, 한정, 송정, 후송정, 시산사, 송산사, 비양사 등의 정각과 고운이 술잔을 띄우며 즐겼다는 유상대, 향도동 3층 석탑, 불우헌 정극인묘와 사당, 불우헌 신도비등이 있다. 공간배치를 살펴보면 조선시대 서원의 초기 배치형식을 따랐으며, 서원 전면에는 강학공간이, 후면에는 제향공간이 위치하며, 특히 강당과 재사는 별도의 영역에 위치하며, 강당인 명륜당은 현가루와 사당을 잇는 축선 상에 위치하고 있으며, 강당 전면 서측에는 묘정비가 동쪽으로 향해 위치하고 있다.

▲ 서원 동쪽 담 밖에 있는 강수재. 서원과 협문으로 연결되어 있다.    

 

재사인 강수재는 서원 동쪽 담 밖에 있고, 강수재와 서원은 협문으로 연결되어 있다. 서원의 공간구성은 제향시설의 사당, 교육시설의 강당과 재실이 있으며 부속공간으로 전사고 및 고직사로 크게 나누어져 있다. 특히 서원 전면의 하천에 위치하는 유상대는 고운선생이 태인 현감으로 재임 시 계류 상에 대를 조성하여 유상곡수로 음풍영월하던 장소로 알려져 있다. 발굴 작업 과정에서 홍수에 의해 매몰되고 씻겨 나가 유상곡수의 흔적은 엿볼 수 없고 그 위치에 감운정과 감운정 사적비가 후세에 건립되어 있을 뿐이다. 한편 서원 내 멸실 건물로는 면암사(정면 3·측면 3, 면암 최익현을 배향), 홍학재(정면 3·측면 1, 제사 건물로 강수재의 북동쪽에 위치), 고직사(정면 3·측면 2, 서원을 관리하는 살림집), 전사고(정면 2·측면 2, 제사 때 제수를 마련하던 곳) 등이 있다. 무성서원은 제향의례 전에 서원 입구에서 서원 경내의 건물 마당을 거쳐 제향공간까지 황토를 뿌린다. 이는 선현께 올리는 신로와 제물을 신성해 사사로운 기운이 범접하지 못하게 한다는 벽사의 의미가 있다.

 

사우

1484(성종 15) 창건하고 1844(현종 10) 중수하였다. 정면 3, 측면 3칸의 규모로 고운 최치원을 중심으로 불우헌 정극인 등 7위를 모시고 있다.

 

강당

현기루 문을 들어서면 1828(순조 28) 중건된 정면 5칸 측면 2칸의 강학공간으로 사용되는 강당이 들어서 있는데 좌우에 방이 배치되어 있고 중앙 3칸의 마루는 앞뒤가 트여져 있는 특징을 보이고 있다. 강당 전면에 걸려있는 현판을 보면 1696년 사액되었음을 알 수 있다.

 

강수재

일반적으로 서원은 기숙사인 동서 양재가 있으니 무성서원은 동재인 강수재만 있다.

 

현가루

외삼문 대신 1891년 건립된 전면 3, 측면 2칸 누각이다. 현가루는 논어의 현기불철에서 따온 거문고를 타며 놀기를 그치지 않는다는 뜻으로 어려움을 당하고 힘든 상황이 되어도 열심히 학업에 계속한다는 뜻이다.

 

직직사

서원 관리인이 거주하는 공간으로 사원의 향사시 필요한 재수품을 준비하고 서원의 살림을 팔아보는 기능을 하였다.

 

병오창의 기적비

향약의 거점으로 기능하면서 지역민 결집에 중심적인 역할을 하는 지역 자치규약인 향약은 1905년 일본에 의해 을사늑약이 체결되자 이듬해 1906613일 면암 최익현, 둔헌 임병찬의 주도로 8백 의병이 항일의 햇불을 든 병오창의(丙午倡義)의 현장이기도 하다. 무성서원에서 호남 최초의 의병이 일어난 역사적 현장을 기념하기 위해 1992년 기적비를 세웠다.

 

비석군

흥선 대원군의 형이며 영의정을 지낸 이최응의 불망비 등 무성서원 보존에 공이 있는 사람을 기념하는 비석과 무성서원 중수기념비 등이 현기루 옆 담장 앞에 서 있다.

 

칠성도

광해군때 어지러운 세상을 등지고 음풍영월하며 세월을 보낸 일곱 산비들의 모습을 1910년도에 석지 채용산 화백이 그린 그림으로 무성서원의 배체형태다.  

장정태 삼국유사문화원장(철학박사. 한국불교사 전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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