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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양문화와 불교-㉔ 석가모니 부처님은 유목민출신인 스키타이 후예인가?

보검 이치란 스님 | 기사입력 2021/06/07 [08:46]
서양불교학자들, 싯다르타 고오타마 직계 선조 스키타인 히말라야 산록에 정착 했다고 주장

서양문화와 불교-㉔ 석가모니 부처님은 유목민출신인 스키타이 후예인가?

서양불교학자들, 싯다르타 고오타마 직계 선조 스키타인 히말라야 산록에 정착 했다고 주장

보검 이치란 스님 | 입력 : 2021/06/07 [08:46]

서양불교학자들, 싯다르타 고오타마 직계 선조 스키타인 히말라야 산록에 정착 했다고 주장 

 

불교는 분명 싯다르타 고오타마로 부터 출발했다. 샤까국의 수도 카필라와수투에서 왕자로 출생, 결혼까지 해서 아들 하나를 두고 29세 때에 인간의 보편적인 고() 문제에 집착, 해결을 하고자 출가하여 6년간 고행수도(苦行修道) 끝에 큰 깨달음을 성취하여 이른바 깨달은 자인 붇다가 되어 45년간 주유천하하면서 많은 중생들에게 감로법우(甘露法雨)와 같은 84천 법문을 내리고 열반에 들었다는 것이 우리가 알고 있는 석가모니 부처님에 대한 대강의 줄거리이다.

 

우리는 대체로 석가모니 부처님은 인도 출신 정도로만 알고 있다. 인도와 네팔의 국경지역에서 태어난 것 정도로 인식하고 있지만, 서양의 일부 불교학자들은 석가모니 부처님은 스키타이(샤까)의 후예이며, 선조들이 간다라지역에서 히말라야 산록 아래인 카필라와수투로 이동하여 정착, 공국(公國)을 세웠다는 주장이 제기되고 있는 것이다.

 

빨리어 경전에서도 부처님의 어린 시절은 카필라와수투라고 기록하고 있다. 19세기 영국-인도 고고학자들은 중국의 구법 승려인 법현(337422)과 현장(602664)의 여행기에 근거하여 위치탐험과 유적발굴을 시도한 결과, 일부는 현재 네팔의 카필라와수투 시의 근교인 틸라우라콧(Tilaurakot)이라고 하고, 또 다른 일부의 고고학자들은 웃타라 프라데시의 싯다트나가르(Siddharthnagar)구역의 버드푸르의 피프라와라고 단정하기도 했다.

▲ 샤까족이 세운 것으로 알려진 파키스탄 탁실라의 담마라지카 수투파(大塔 2세기). 1980년 유네스코 세계 유산에 등재.  

 

19세기부터 일부 서양불교 학자들은 부처님이 스키타이 대초원 유목민의 후예라는 추측이 서서히 고개를 들었다. 그 중 일부는 기원전 천년 중반부터 간다라 지역으로 침투하여 유목민생활방식에서 좌식(座式) 문화에 적응하면서 결국 인도 북서부에 도달하여서는 기원전 1세기에 스키타이 제국을 세웠다고 주장하고 있다.

 

빨리어 경전인 디가니까야(Digha Nikaya 장아함경)에서 발견되는 부처 조상의 사람들인 샤까(Sakyas).스키타인(Scythians)'외국인'이라는 이야기를 들려주고 있다. 암바타에 의하면 그들은 사나운, 거친 말, 폭력적, 방랑자로 묘사되고 있다. 암바타가 샤까족의 고향인 카필라와수투를 방문했을 때 그들은 "회의장 높은 자리에 앉아 웃고, 거칠게 연주하고, 주먹과 손가락으로 서로를 찌르고, 암바타에게는 관심을 기울이지 않는" 사람들이라고 설명하고 있다. ”샤까무니는 스키타이 현자로서 파란 눈을 가졌다고 언급하고 있다.

 

붓다가 스키타이인의 후예라는 8가지 이유와 근거를 들어서 구체적으로 제시하고 있다. 첫째는 붓다는 크샤트리아(전사) 카스트에 속했으며, 외국 침략자들은 항상 브라만족에 의해 이 카스트에 포함되었다. 두 번째는 붓다는 카스트 제도를 거부했다. 세 번째는 불교는 대초원 민족에서 파생된 동물 모티프(동기)를 인도에 도입했다.

▲ 파키스탄, 스와트 계곡에서 발굴된 자타카의 연등불(디팡카라 붓다), 기원전 2세기 경.부처 이미지가 보여주는 가장 시각적인 상황 증거는 간다라 예술가가 여전히 부처(현재와 과거 부처님)를 그리스 토가를 입고 있는 아리안 사람들의 모습을 취하여, 붓다가 샤까. 스키타인이라고 주장하고 있다.    

 

사슴공원에서 부처님의 첫 설법의 상징인 숫 사슴 또는 암 사슴과 말이 등장하는데, 싯다르타는 그의 말 칸타카를 타고 궁성을 떠났다. 칸타카는 즉시 하늘로 가서 신으로 환생했다고 한다. 반은 독수리이고 반은 사자인 모티프가 산치대탑이나 바르후트 탑에 사용되고 있다.

▲ 법륜(바퀴)와 사슴의 상징을 보여주는 부처님의 첫 설법. 금속판화로 기원전 2세기경 간다라의 고대 지역인 파키스탄에서 출토.    


네 번째는 이전에는 인도에서 알려지지 않았던 시체 화장과 고분 또는 사리탑()의 건립이다. 다섯 번째는 차크라바르틴(전륜성왕)의 불교적 이상, 즉 바퀴를 돌리는 세계를 정복하는 군주, 왕들이 열망했던 이 개념은 바퀴와 마차에 아주 익숙한 대초원 민족에게서 빌린 개념이다. 여섯 번째는 마하푸루샤, 즉 위인(부처님)32() 중 하나는 그가 파란 눈을 가졌다는 것이다. 이것은 부처가 이란(백인)이라는 것을 나타내고 있다.

 

영국의 동양학자인 사무엘 빌(18251889)은 케임브리지 대학의 트리니티 칼리지를 졸업하고 고등학교 교장을 하다가 해군 군목이 되어 제2차 아편전쟁(18561860)때에 시불라(7함대) 해군포병부대의 사제로 임명되었다.

 

사무엘 빌은 도쿠가와 막부의 쇼군에 대한 간단한 논문을 쓴 바 있으며, 1872년 런던의 인도 사무소 도서관에서 중국 불교 도서를 검토. 연구하도록 임명되었다. 도서관에서 소장한 중국어 도서 중에서 빌은 112권 중, 72개의 불교관련 편찬 책을 발견했다. 그는 인도 불교와 중국 불교의 철학적 차이를 연구하여 보여주었고, 인도 편찬대반열반경(Mahāparinibbāṇa Sutta)의 한역 버전을 연구하여 인도버전과, 북아시아 불교와 남아시아 불교 사이의 중요한 교리적 차이로, 니르바나(Nirvana 열반)의 개념적 차이점을 보여주었다. 그는 1877년 런던 유니버시티 칼리지에서 중국어 교수로 임명되었으며, 이후 몇몇 대학 총장을 역임하면서 법현의 불국기(佛國記)와 송운의 송운행기(宋雲行記), 현장의 대당서역기(大唐西域記)를 영역하는 등, 불교연구에 많은 업적을 쌓았다.

 

사무엘 빌은 부처가 스키타이 출신이라는 의견을 발전시켰다. 그는 이 종족의 한 지부나 일족이 이 시기에 인도 북부에 침투했을 수 있다고 생각하며 부처님은 이 혈통에서 태어났으며, 전륜성왕 또는 바퀴 왕들(Wheel Kings)의 후손이었다고 말한다. 그의 죽음 이후에 관찰되는 장례식, 시체 화장 풍속 등을 관찰할 때, 붓다는 외국 혈통임을 증명한다고 보고 있다. 물론 이런 풍속은 나중에 형성된 것 일 수도 있으나 붓다는 스키타이인의 혈통을 이어 받은 것은 분명하다고 주장하고 있다.

▲ 인도-스키타이 왕국의 영토, 기원전 2세기에서 기원후 4세기 까지 활약.    

 

인도-스키타이는 인도-이란 사카의 분파이다. 그들은 남시베리아에서 박트리아, 소그디아나, 아라코시아, 간다라, 카슈미르, 펀잡으로 이동하여 기원전 2세기에서 서기 4세기경까지 인도의 중서부 구자라트, 라자스탄으로 들어왔다. 첫 샤까왕 마우에스(모가)는 샤까 권력을 간다라에 세웠고 점차 북서 인도에 대한 우월권을 확장하였다. 인도-스키타이의 지배는 서기 395년 루드라심바 3세의 서부 총독령과 함께 끝났다. 스키타이 그룹은 인도로 침입하여 다양한 왕조를 세웠는데, 샤까 이외에도 파라마, 캄보자, 발리카스, 리시카스와 파라다스 등이 있었다.

 

스키타이족은 샤까(Saka),사카이(Sakae),사이(Sai),이스쿠자이(Iskuzai), 아스쿠자이(Askuzai)라고도 불리는, 주로 스키타이어를 사용한 이란계 민족에 속하는 유라시아 유목민들이며 약 기원전 9세기에서 4세기까지 중부 유라시아 스텝의 넓은 지역들에서 거주했다고 언급되고 있다. 이들의 기원은 주로 이란족이라는 데에 이견이 없다. 그리스의 역사가들에게 알려진 고전 스키타이인들은 흑해 북부와 북캅카스에 있었다. 아시리아, 아케메네스, 중국에서 기록된, 다른 스키타이족 집단들에 대한 사료는 이들이 중앙아시아에서도 존재했다는 것을 보여주며, 그곳에서 그들은 각각 이스쿠자이(Iskuzai).아스쿠자이(Askuzai), 사카, 그리고 사이()이라 불렸다.

 

현대의 학자들은 일반적으로 샤까라는 용어를 동방 스텝과 타림 분지에 거주하는 이란어군 화자 부족들을 나타내는 데 사용한다. 고대 페르시아의 비문 역시도 샤까를 흑해 북쪽에 있는 서부 스키타이인들 또는 바다 너머 스키타이인을 지칭할 때 사용했다. 샤까인들은 소그디아나 국경 너머에 살았다고 말해진다. 일부에서는 그들은 파미르와 신장이 그들의 본거지라고 주장하기도 한다.

 

샤까인들이 인도 아대륙의 북서쪽으로 이주한 후, 이들이 이주한 지역은 샤까의 땅으로 오늘날 아프가니스탄과 파키스탄의 드란기아나로 알려지게 되었다. 이 내용은 샤까인들이 지빈 (罽賓), 오늘날의 인도와 파키스탄의 카슈미르국을 공격하여 정착했다고 하는 중국의 기록과 거의 같은 시대인 인도 북부 인도-스키타이의 샤까왕국 (기원전 200서기400)의 유물에 속하는 마투라 사자 기둥머리에서 발견된 동시대의 카로슈티 비문에서도 증명되었다. 동시대 드란기아나 지역을 페르시아어로 사카스타나 (Sakastāna)라고 불렀고, 아르메니아어에서는 그리스어, 팔라비어, 소그디아어, 시리아어, 아랍어와 유사한 동의어인 사카스탄이었으며, 중세 페르시아어가 중국 신장의 투루판에서 사용됐다.

▲ 꽃병에 그려진 기원전 5세기 경 스키타이 궁사.  

 

샤까족과 빠흘라바족 즉 스키타이족과 파르티아족은 서력 기원초 인도 서북지역을 침략했다. 파르티아족은 이란족과 스키타이족의 혼혈이라고 보는데 이들은 동이란어를 사용했다. 현재 우리가 알고 있는 것과 같은 샤까어 또는 코탄어는 이미 방언으로 분화된 것처럼 보이고 카쉬카르의 동쪽에 있는 마랄바쉬 지방의 방언과 밀접한 관계가 있음을 나타낸다. 이 방언은 베를린과 빠리에 소장되어 있는 약간의 자료를 통해 알려졌다. 샤까족들은 무력으로 인도의 주인이 된 다음, 불교를 받아들이고 그리스의 정치제도와 문화를 최선을 다해 본받아 곧 개화 되었다. 그들은 그리스계 인도 왕들이 창시한 행정제도를 채택해서 태수들 군사령관들 지사(知事)들을 존속 시켰고, 그리스의 화폐주조를 모방했고, 자신들의 화폐에 그리스어와 카로슈티 문자로 된 2중 명문을 계속해서 사용했다. 맨 처음 그들은 그리스인들로부터 물려받은 예술적인 사고방식을 그대로 답습했다.

 

샤까족은 야바나(그리스)의 유산을 전달받는 것으로 만족하지 않고 종교에 관해서는 그리스계 인도 왕들의 정책을 계승해서 토착 종교들에 대해 관대한 태도를 보였고, 불교에 대해서는 호의적인 태도를 보였고, 바라문교도들과 자이나교도들, 그리고 불교도들은 샤까족의 침략 초기에 야기된 폐허들을 자유스럽게 재건할 수 있었다.

 

이제 정리해 본다면, 석가모니 부처님이 스키타이의 혈통을 지닌 것이 사실이라면 석가모니 직계 선조들이 히말라야 산록에 먼저 정착해서, 석가모니는 출가하여 불교를 창시해서 먼 훗날 자신의 혈통을 지닌 거칠고 투박한 동족에게 지혜를 가르쳐 준 현자가 되었다. 불교적 관점에서 본다면 이것은 다 그냥 단순하게 인과관계가 형성된 것이 아니고, 세세생생 인연법에 의한 인과관계로서 어쩌면 미리 예정된 과정이었던 것일지도 모를 일이다. 앞으로 연구가 더 진행되어야 하겠지만, 부처님은 스키타이의 혈통을 지녔다고 해서 그의 현자로서 위대함에는 전연 변함이 없지 않겠는가?

보검<세계불교네트워크 코리아 대표>

▲ 필자 보검스님이 외국대표들과 네팔 카트만두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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