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향교의 성립과 발전(中) 향교의 기능과 입지, 공간구성

장정태 논설위원 | 기사입력 2021/06/14 [07:44]
지방민 교화와 교육하는 학교 이전에 문묘라고 하는 제사 영역의 기능

향교의 성립과 발전(中) 향교의 기능과 입지, 공간구성

지방민 교화와 교육하는 학교 이전에 문묘라고 하는 제사 영역의 기능

장정태 논설위원 | 입력 : 2021/06/14 [07:44]

<연재순서>

()향교의 역사와 교육과정

() 향교의 기능과 입지, 공간구성

()향교의 사회교화기능

 

지방민 교화와 교육하는 학교 이전에 문묘라고 하는 제사 영역의 기능

 

문묘(文廟)란 문선왕묘(文宣王廟)를 약칭하여 불리우는 명칭으로 문선왕은 세계 4대성현(공자,석가,예수,마호메트(=소크라테스)중의 한 분인 공자를 말하므로 공자를 모신 사당을 일컫는다. 신라 성덕왕 16(717) 9월에 김수충이 당에서 문선왕(공자)을 비롯하여 십철, 칠십이 제자의 도상을 모시고 왕명에 의해 국학에 설치한 것이 우리나라 문묘재의 시초다. 문선왕이란 당이 개원 원년(713)간에 공자에 내린 시호이다. 고려에서는 국초부터 문성왕묘를 국자감에 조립하였다.

 

조선시대에 각 지방 관아에서 행하던 공적인 제사 대상은 3() 1()가 있다. 3단은 통상적인 인간의 안녕을 기원하는 신을 모신 곳으로 사직단(社稷壇;인간의 생존을 관장하는 토지와 곡식의 신령을 위해 마련된 단), 성황단(城隍壇;고을의 수호신을 모시는 곳), 여단(厲壇;주인 없는 고을의 잡귀를 위해 제사 지내는 단)이 있고, 문묘는 지방에 설치한 제사 건축으로 향교와 밀접한 관계를 갖는다. 즉 향교는 지방민을 교화하고 교육하는 학교 이전에 문묘라고 하는 제사 영역을 갖추고 있었기 때문에 그 존재 의미가 있었다.

 

문묘는 전통적인 유학의 정신적 지주 역할로 그 존재 가치가 있었던 만큼 향교 내에서 규모가 가장 크고 격식을 갖춘 대성전을 중심으로 동무·서무와 함께 자리하여 향교 설립에서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다. 본래 대성전에는 공자와 4성 만을 모시고 나머지 선현은 동무와 서무에 나누어 봉안하던 방식이 광복이후 서무에 모셨던 우리나라 선현의 신위를 대성전으로 옮기고 중국의 선현도 주로 공자와 4성만을 모시는 것으로 변화되었다.

▲ 문묘제도 개혁 등 유교 부흥과 각종 개혁사업을 선도한 심산 김창숙은 일부 유림의 격렬한 반발과 그들과 연합한 친일세력에 의해 축출당한다. 사신은 성균관대에 있는 심산 김창숙 동상.    

 

이와같은 분위기는 심산 김창숙에 의해 주도되었다. 김창숙은 1946년에 5월 난립하여 서로 대립하고 있던 유도회 조직을 정비하여 유도회 총본부(儒道會總本部)로 통합했다. 유도회 총본부는 유림총회를 소집하여 유교 부흥과 각종 개혁사업을 의결하고 총본부위원장 겸 성균관장으로 김창숙을 임명했다. 이에 김창숙은 친일세력을 숙청하고 위원장으로 취임했다. 한편 문묘(文廟)가 지나치게 허식적이고 사대적임을 개탄하고, 112위의 위패 가운데 공자 및 4, 10, 송조宋朝 6과 국내 18의 위패만 대성전에 모시고, 나머지는 모두 땅에 묻었다. 이 조치는 일부 유림의 격렬한 반발을 가져왔고, 후에 친일세력과 연합해 김창숙이 축출되는 원인이 되었다. 김창숙은 이승만의 독재에 계속 반대하였는데, 1955년이 되자 부패한 유림세력들의 공격으로 성균관과 성균관 대학의 분규가 확산되었다. 이는 사대사상을 청산하려는 시대변화와 제사를 간소화하려는 경향의 반영이라 하겠다.

 

향교의 입지-다수의 향교가 경사지에 자리 잡아 

 

유교의 대표적 건축은 조선 시대 중앙의 성균관과 4부학당 그리고 지방의 각 고을에 설치되었던 향교가 대표적인 예이고, 사학교육 기관인 서원(書院), 정사(精舍), 사우(祠宇), 서당(書堂) 등과 가묘(家廟), 정려(旌閭) 등도 유교적 산물이다. 이를 모두 유교건축이라고 부를 수 있다.

 

향교의 시작과 명칭에 관해 여러 설이 있지만 일반적으로 최초의 향교의 설립은 고려 초기로 고려사를 보면 태종 13년에 왕은 서경에 학교를 세우게 하고 수재(秀才) 정악을 서학박사로 삼아 특별히 학원을 세워 육부생도를 명하였다는 기록을 통해 알 수 있다.

 

향교의 입지의 인문적인 요인으로는 첫째, 풍수 사상으로, 조선 중기 이후 향유(鄕儒)들이 풍수설에 현혹되어 향교 이전을 요청하는 사례가 많았던 것으로 보아 이건이 잦았던 이유는 풍수지리의 영향으로 보인다. 둘째, 조선 초 유교 이념의 보급과 확립을 목적으로 제례가 유교식으로 대체됨으로써, 읍성의 기본적인 설계방식은 좌묘우사(左廟右社)’라 하여 중요한 건축물들은 기능과 역할에 따라 방위가 설정되었기 때문에 향교 건축의 입지도 이러한 요소들과의 총체적 문맥 속에서 파악되어야 할 것이다.

 

자연적 요인으로, 지형의 경사가 영향을 주었다. 전국 40개소의 향교를 대상으로 조사한 연구에서 향교의 입지는 부대도호부도호부에 있는 향교 중 경사지에 있는 곳이 15개소 68%, 급경사지에 있는 곳이 2개소 9%, 평지에 있는 곳이 5개소 23%, 현에 있는 향교 중 경사지에 있는 곳이 15개소 83%, 평지에 있는 곳이 3개소 17%로서, 특히 전라남북도에 위치한 향교는 10개소 중 5개소가 평지에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다수의 향교가 경사지에 자리 잡고 있다고 볼 수 있다.

 

향교의 강학 공간구성-前廟後學, 前學後廟, 左廟右學, 左學右廟

 

대부분 향교는 서원과 마찬가지로 제향 공간과 강학 공간이 하나의 축으로 형성되어 있고, 각 공간마다 대지고저차(垈地高低差)를 두어 공간의 확실한 구분과 독립성을 주었다. 향교는 문묘가 없으면 향교의 개념에 속하지 않았고 공자를 비롯하여 중국의 선현과 우리나라의 선현 등 많은 선현을 배향하고 있어 문묘의 규모가 서원의 사당에 비해 규모가 크다. 문묘의 공간 건축 구성은 공자를 중심으로 한 선현의 위패를 안치한 대성전을 중심축으로 대성전 전면 기단 아래에 동서로 선현의 위패를 안치한 동서무(西廡)가 있다.

▲ 유교의 대표적 건축인 성균관의 동무와 서무. 문묘는 유학의 정신적 지주 역할로 향교 내에서 규모가 가장 크고 격식을 갖춘 대성전을 중심축으로 대성전 전면 기단 아래에 동서로 선현의 위패를 안치한 동․서무(東․西廡)가 있다.     © 매일종교신문

 

서원과 향교의 교육 공간구성은 문묘와 사당의 차이가 날 뿐 강학의 공간과 문루에서 강학 공간까지의 공간은 비슷한 규모와 배치 형식을 갖추고 있다. 향교의 공간구성은 전묘후학(前廟後學), 전학후묘(前學後廟), 좌묘우학(左廟右學), 좌학우묘(左學右廟)가 있다.

 

전묘후학(前廟後學)은 문묘 공간이 강학 공간 앞에 오면서 일직선 축을 형상하는 방식이다. 전묘후학의 공간구성을 가진 향교들의 공통점은 모두 평지에 건립된 점이다. 성균관의 경우 동서무가 각각 11, 서제가 각각 18칸으로 무()와 재()의 길이가 길어 경사지에 건립하기 어려웠으므로 평지에 배치되어야 했다. 경주전주나주 향교도 계수관향교(界首官鄕校)로서 太學(太學)의 제도를 따라 무()의 길이가 길어서 평지에 배치되어야 했다. 그러나 계수관 향교도 상하로의 수직적 위계성을 표현할 수 있는 곳은 전학후묘(前學後廟)가 되었다. 전학후묘는 강학 공간이 문묘 공간 앞에 오는 형식으로 경상도와 전라도의 향교 104개소 중 86개소 83%에 이른다. 이 형식은 대부분 경사지에 위치하는데, 이것은 산지가 70%를 넘는 우리나라의 지형적 요인도 있겠지만 오히려 앞(과 뒤()라는 수평성보다 위()와 아래()라는 수직성이 위계표현에 적합했고, 또한 문묘는 음의 공간으로서 후면에 배치하여 폐쇄성을 강조했다. 이는 강학과 존현의 위계를 상징하는 유교적 예의 영향으로 보인다.

 

좌묘우학(左廟右學), 좌학우묘(左學右廟)의 공간구성은 강학 공간과 문묘 공간이 좌우로 배치되는 경우로 역시 지형적인 요인도 있지만, 일직선 축을 형성할 수 있는 여건에서도 나타나는데 이는 후기에 강학 기능의 쇠퇴로 강학 공간은 주로 平民의 자제들이 이용하면서 강학 공간과 문묘 공간의 동선을 분리하는 것이 문묘 공간에 대한 존숭과 양반들의 권위 표현에 적합했던 것으로 생각된다.

 

강학 공간 내부에서 강당과 동서재의 배치 관계를 보면, 대도호부도호부에 있는 향교 22개소 중 강학 공간인 명륜당의 건물배치는 동재와 서재의 배치 형태에 따라 명륜당보다 동서재가 앞에 위치하는 전재후당(前齋後堂)12개소 55%, 명륜당이 앞에 있는 전당후재(前堂後齋)6개소 27% 동서재가 없는 곳이 4개소 18%로 나타났다. 현에 있는 향교 18개소 중 전재후당이 9개소 50%, 전당후묘가 8개소 44%, 서재가 없는 곳이 1개소 6%로 전재후당과 전당후묘가 비슷한 숫자로 나타났다. 문묘 공간과 강학 공간의 배치에서는 강학 공간을 전면에 배치한 전학후묘의 공간구성이 대부분을 차지하며, 강학 공간 내에서의 명륜당과 동서재의 배치는 동서재를 명륜당 앞에 배치한 전재후당의 공간구성이 다소 높은 비중을 차지한다. 성균관과 같은 전묘후학과 전재후당의 구성을 따른 향교는 나주향교, 경주향교, 전주향교 등이 있으며, 전학후묘와 전당후재로 구성된 향교는 강릉향교, 광주향교 등이 있다.

 

문묘의 공간은 가장 중요한 공간으로 이 공간을 축으로 다른 공간이 조화되도록 연결되어 있다. 이 공간은 서원의 사당과 마찬가지로 상징적 정신적 지주가 되는 장소이다. 문묘 건물 주위를 돌담으로 싸고 있어 이 공간의 신성함을 나타낸다. 문묘는 모든 주요 의식이나 행사가 이루어지고 있는 신성 영역의 공간으로 배치상 가장 높은 곳에 자리하고 있다. 문묘 공간 내 건물들은 대성전을 축으로 대성전 전면 좌우로 동서무가 좌우에 엄정하게 위치하고 있어 이 공간 내에 진입하면 엄숙한 분위기를 느끼게 한다. 대성전은 공자를 중심으로 사성(四聖)과 십철(十哲)등의 신위를 모시고 있으므로 이것에 의해 건물 규모가 정해져 있다.

 

향교의 입지는 주위에서 교촌(校村), 교동(敎洞), 향교동(鄕校洞), 교운리(校雲里), 교성리(校星里), 교흥리(敎興里), 교월리(校月里), 교원리(校院里), 대교리(大校里), 교사리(校士里), 교평리(校平里), 校峴洞(校峴洞)등의 이름을 쉽게 접할 수 있다. 이들의 공통점은 이름에 학교를 나타내는 교()자가 들어 있다는 것이며, 이것은 그곳에 오래 전부터 학교가 있었기 때문에 이름 붙여진 것이 행정 구역명으로 굳어진 것이다. 물론 이때 학교라는 것은 향교를 말한다. 지금은 비록 이들 지역내 향교 건물이 없다 해도 이전에는 있었으며, 혹은 새로 지을 때 다른 곳에 옮겨 현재 향교는 없지만 과거 교육기관이 있었음을 알 수 있다.

 

향교는 관학이기 때문에 기본적으로 守令이 통치하는 관아에서 멀지 않은 곳에 위치한다. 동국여지승람(東國輿地勝覽)의 기록을 보면 대부분 관아에서 불과 몇 리 떨어지지 않은 곳에 향교가 위치 하였음을 알 수 있다. 이것은 사립 교육 기관인 서원이 수령의 간섭에서 벗어난 한적한 곳, 경치가 수려한 곳에 위치하는 것과 대조를 이룬다. 따라서 향교가 있었던 곳은 당시 도회지 가운데 하나였음을 알 수 있다. 한편 처음에는 향교 건물이 없더라도 가정집에서 스승을 두고 학생을 가르친 경우도 있으며, 관아나 퇴락한 사찰을 이용하기도 하였다. 특히 조선은 건국과 더불어 숭유억불(崇儒抑佛) 정책에 따라 많은 사찰이 헐렸는데, 이때 사찰의 재목을 향교 짓는 데 사용하였다. 예를 들어 나주향교와 창평향교의 대성전(大成殿) 주춧돌에는 연꽃무늬가 새겨져 있는데. 이것은 가까운 곳의 사찰이 헐리면서 석재를 옮겨 사용했음을 단적으로 보여 주는 것들이다. 또 경상북도의 고령향교에서도 사찰에서 사용한 듯한 석재가 이용된 것을 확인할 수 있다.

 

향교의 건물은 크게 선현에 제사지내는 배향 공간과 학생을 가르치는 교육 공간으로 나누어지며, 두 공간 사이는 담을 쌓아 구분하는 것이 일반적이다. 이러한 구조가 언제부터 정착되었는지 확실하지 않지만 고려시대에는 배향 공간과 교육 공간이 한 건물 안에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이것은 당시 향교의 목적이 교육에 있었고, 배향은 부수적인 의미였다는 것을 말해 준다.

 

배향 공간에는 공자의 사당인 대성전을 중심으로 그 앞 좌우에 동무와 서무가 있다. 대성전은 대성을 의미하는 공자의 위패를 모시던 건물에서 유래를 찾을 수 있는데, 즉 대성전에는 공자뿐 아니라, 안자, 증자, 자사, 맹자 등 네 명의 성인, 공자의 수제자 열 명(十哲) 주돈이, 정호, 정이, 소옹, 장재, 주희 등 송나라 6(宋朝六賢)의 위패를 봉안한다. 그리고 동무와 서무에는 공자의 문하 72(孔門七十二賢) ,,송나라의 22(漢唐宋二十二賢), 우리나라의 18(東國十八賢)을 모신다.

 

조선시대에는 각 읍의 크기에 따라 향교의 규모도 다르게 나타난다. 향교는 그 크기에 따라 대설위, 중설위, 소설위로 구분하는데, 이에 따라 앞에서 나열한 선현의 위패를 모시는 숫자도 차이가 난다.

 

현재와 같은 배향인물을 설치한 것은 1949년 유도회에서 우리의 문묘(文廟)에 중국의 10,72,22현까지 봉안하는 것은 사대사상(事大思想)의 표현이라 하여 공자와 4, 송조2(정호,주희) 외 위패는 없애고 우리나라의 18현을 대성전에 함께 배향하는 결의하였다. 그러다가 1961년에 공문 10철과 송조 4현을 복위시킴으로써 오늘날 대부분의 향교가 이에 따르고 있다.

 

향교의 건축물 외부공간에는 하마비, 홍살문, 공자상, 성생단, 정료대, 관세대, 망료대, 비석, 지당이 있다. 경주향교의 경우 송단이 설치되어 있다.

▲ 춘천향교 홍살문    

 

(1)홍살문

유학의 상징으로서 신성한 성역임을 알리는 상징적인 홍살문이 있는데 위치는 대부분 향교의 입구 정면에 두고 있으며 대략 거리는 30~100m 내에 위치하는데, 심지어 200~300m 떨어져 둔 곳도 있다

▲ 삼척향교 하마비    

 

(2)하마비

하마비는 보통 향교 외삼문 밖의 홍살문 앞에 세워 성역임을 알리는 표지석으로써 남녀노소 지위고하를 막론하고 그 앞을 지날 때는 말에서 내리게 했다. 대개 대소인하마(大小人下馬), 대소인원개하마,(大小人員皆下馬,)등으로 음각한 문구가 새겨져 있으며, 전주향교에는 높이 198m로 전면에 과차자개하마(過此者皆下馬)라 기록하고, 뒷면에는 정덕기난구월립(正德己卵九月立)이라 새겨져 있는데 이것은 중종 14(1519)에 해당한다.

 

(3)공자상

유교의 시조인 공자를 향교의 명륜당 앞에 모신 오산 궐리사의 사례이며, 대구향교 등에서 볼 수 있다.

 

(4)성생단

성생단은 생단 또는 성생석이라고도 하는데 제향때 제수로 쓰이는 생물을 검사하기 위하여 새운 단 즉 생간품을 행하기 위한 제단이다. 생간품이란 향사 전날 제관들이 제물로 살아 있는 짐승을 이 단위에 세워놓고 품평을 하는 의례를 말한다.

 

(5)정료대

정료대는 대성전 앞 또는 명륜당, 전사청 앞 등 넓은 뜻 경역에서 약간 조명이 필요한 곳에 세우는 석물로서 보통 2개가 놓이는데 지금은 없거나 1개만 남이 있는 곳도 있다. 석전제를 지내는 시간은 지금은 정오에 지내고 있으나, 원래는 새벽 즉 축시(丑時 새벽 2시 새벽 4) 오각(五刻 3시경)에 행해졌으므로 대성전 앞에는 춘추 석전 제향 시 새벽에 불 밝힐 때 사용하고, 명륜당 앞에 설치된 정료대는 교생들이 공부할 때 사용되었다.

 

(6)관세대

관세대는 제향 때 헌관 및 집사 등 임원이 의식을 거행하기에 앞서 대성전에 들어가기 전에 손을 깨끗이 씻기 위하여 물을 담아 놓을 수 있도록 만든 석조물로서 물을 담을 수 있도록 사각형 또는 원형으로 홈을 파고 하부에는 물이 빠지도록 배수 구멍을 만들어 놓은 경우가 일반적이다. 물 홈통이 없이 상단을 평평하게 만들어 물그릇을 올려놓는 세수대로 만든 예도 있다.

 

(7)망료대

망료대는 일면 예감대라 부르기도 하는 제향 의식 석물로 석전 행사에서 마지막으로 행하는 망료례 축문이나 행사 후 소각 대상물을 태워 묻는 석물이다. 일반적으로 망료대는 대성전 내의 의식이 끝나고 나오는 우측면 뒤쪽에 위치한다.

 

(8)비석

대부분 향교의 입구나 경내의 강학 구역에는 관련 기념비가 2~3기 많게는 10~15기가 나열된 경우가 일반적이다. 비의 성격상 역대 수령들의 선정비, 흥학비, 공적비 등 다양한 비들이 있다.

 

(9)지당

물을 고이게 하는 수경시설의 시초는 외적의 방어를 목적으로 조성한 상고시대의 구지(溝池)에서 시작되었으며, 삼국시대에는 못 속에 섬을 꾸미고 자연스러운 호안처리를 하며 해안 경관을 실경화한 신선풍의 형식이 나타났다. 불교사원에서는 탑, 불전 주위의 자연경관 등을 못에 투영시키는 영지와 불교사상과 관련이 깊은 구품연지가 보급되었고 고려 시대 이후에는 정형적인 방지가 널리 보급되었다. 현재 나주향교 명륜당 좌측에 방지형태로 남아있고, 강릉향교 청운 정사 담장 앞에 타원형의 천운지가 있으며 표석도 세워져 있다.

 

(10)송단

경주향교 명륜당 뒤편에 효종 6(1655)에 소나무를 식재하여 조성한 단이다.

장정태 삼국유사문화원장(철학박사. 한국불교사 전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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