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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양문화와 불교-㉖ 중국의 서역 개척과 대진(로마)과의 교류

보검 이치란 스님 | 기사입력 2021/06/21 [09:53]
로마제국 아우구스투스 초대황제 재임 시기, 한나라 사절들 로마 방문

서양문화와 불교-㉖ 중국의 서역 개척과 대진(로마)과의 교류

로마제국 아우구스투스 초대황제 재임 시기, 한나라 사절들 로마 방문

보검 이치란 스님 | 입력 : 2021/06/21 [09:53]

로마제국 아우구스투스 초대황제 재임 시기, 한나라 사절들 로마 방문

쿠샨제국, 파르티아 제국 견제, 비단 유리 각종 옷감 등 간접무역 성행

 

지중해 세계와 인도는 알렉산더 대왕의 동방원정으로 가까워졌다. 많은 그리스인(마케도니아)들이 대거 인도 서북부 지역으로 몰려왔기 때문이다. 알렉산더를 따라왔던 군인들도 박트리아 지역에 눌러 앉는 자도 많았다. 알렉산더는 그리스인들이 페르시아인들과의 국제결혼을 원했고, 스스로 모범을 보였으며 휘하 부하장병들의 결혼까지 허용했다. 자신은 다리우스 딸과 결혼할 정도였고, 나중에는 박트리아 호족이었던 옥시아르테스의 딸, 옥사나()와 결혼하였다. 옥시아르테스는 페르시아 제국 아케메네스 왕조 시대의 소그디아나 출신의 박트리아 호족이다. 다리우스 3세를 암살한 후, 알렉산더 대왕에게 대항했지만, 후에 항복했다.

▲ 알렉산더 대왕과 록사나의 결혼.  

 

그의 딸 록사나가 알렉산더에 시집을 갔고, 다른 딸 아마스토리네는 알렉산더의 친구인 헤파이스티온의 아내가 되었다. 알렉산더 대왕이 소그디아나 요새를 방문하던 기원전 327년 그녀와 결혼하였다. 박트리아는 알렉산더에 의해 함락된 페르시아 제국의 마지막 지역이었기 때문에 록사나와의 결혼은 다소 정략적이었지만, 알렉산더는 다소 진정성을 뒀던 것 같다.

 

그리스인들이 알렉산더를 따라서 중앙아시아까지 진출하여 정착하는 과정에서 많은 그리스인들은 페르시아 여인들과 국제결혼을 함으로써, 혼혈이 이루어졌고 어떤 의미에서는 그리스인과 페르시아 안이 하나로 통합하는 혼합주의가 실행되고 있었다. 나중에 그리스인과 인도인과도 국제결혼이 이루어졌으며, 헬레니즘 시대에는 그리스인 페르시아인 인도인이 교차 결혼하는 역사가 전개되기도 했다. 이제 역사는 그리스 헬레니즘 시대에서 로마공화정과 로마제국 시대로 이행하는 과정에 있었다.

▲ 중국의 3대 역사서인 《사기》 《한서》

 

이 과정에서 우리는 동방의 거대한 지역의 중국이라는 문화권에서는 헬레니즘 시대의 중앙아시아 페르시아 지중해 인도 등을 어떻게 인식하고 있었는지를 살펴보지 않을 수 없다. 인도인들은 역사 기록에 인색하고, 그리스-로마인들이나 중국인들은 기록문화에 철저했다. 그리스- 로마 시대의 역사 문화를 살펴보는 과정에서 이해했겠지만, 그리스-로마 시대에는 많은 문헌들이 존재했고, 조그마한 나라인 이스라엘도 기록에 남다른 열정을 갖고 있었다. 중국도 예외가 아니다.

 

고대 시대 중국은 희미하게나마 서방 세계에 대해서 단편적인 지식을 갖고 있었지만, 본격적으로 체계적인 정보와 지식을 갖게 된 것은 한나라 무제 때, 장건이란 사람이 서역을 개척한 이후부터라고 해야 할 것 같다. 

▲ 한나라 장건의 서역개척 여행지도. 장건은 지금의 타지키스탄까지 서역무역 로를 개척해서 비단길을 열었다.  

  

(,기원전 202~기원후 220)은 진나라 이후의 중국의 통일 왕조로서 고조 유방(劉邦)이 건국하였다. 섭정이었던 왕망이 세운 신에 의해 잠시 맥이 끊어지기도 했으나, 한나라는 전한(西漢, 기원전 202~8)과 후한(東漢, 25~220)으로 나뉘어 약 400년 지속하였으며, 중국의 역사상 가장 강대했던 시기 중의 하나이고, 오늘날에 중국의 약 92%를 차지하는 민족인 한족 역시 이 왕조의 이름에서 유래했다.

▲ 중국 섬서성 성고현에 있는 장건 동상.  

 

당시 중국 대륙의 북쪽에서는 유목민족인 흉노족의 묵돌 선우(재위:기원전 209기원전 174)가 유라시아 초원의 동쪽지역의 민족들을 차례로 정복하고 있었다. 그의 통치기 말에 에는 만주와 몽골 고원, 타림 분지 등을 지배했고, 사마르칸트 동쪽의 20개 이상의 지방을 예속 하에 두었다. 고조는 북쪽 국경을 통해 흉노와 거래되던 막대한 양의 한나라 산 철제 무기를 걱정했고, 결국 무역 금지 조치를 내렸다. 비록 무역 금지 조치가 내려졌지만, 흉노족은 그들에게 몰래 무기를 팔 상인을 찾아 거래하였다.

 

이에 기원전 121, 한 나라 무제(漢 世宗 孝武皇帝 劉徹,기원전156~기원전 87)는 전한의 제7대 황제(재위:기원전141~기원전 87)로서 흉노족과 무기 밀매를 계속해온 상인 500여명을 처형했으며 국경지대에서 무역을 하던 흉노족을 공격했다. 흉노는 한나라에게는 큰 암 덩어리였다. 당시 한나라 조정에서는 북쪽의 흉노 때문에 골치를 앓고 있었다. 어떻게 하든지 흉노를 궤멸시키지 않으면 한나라가 위태로울 지경이었다.

 

이때 떠오른 계책이 바로 흉노에게 쫓겨서 서역 저 멀리로 밀려난 월지국과 손을 잡고 함께 흉노를 치는 전략이었다. 한 무제는 이에 대한 방책으로 흉노에게 밀려서 저 멀리 서쪽 중앙아시아로 쫓겨 간 대월지(大月氏, 지금의 타지키스탄)가 흉노를 복수하려고 한다는 풍문을 듣고, 대월지와의 연합으로 흉노를 정벌할 군사적 필요를 느꼈다. 한 무제는 월지국까지 갈 외교협상 사절단장이 필요했지만, 아무도 자진해서 가려고 하질 않았다. 한나라 영토인 장안(長安)을 벗어나면 흉노가 장악하고 있었고, 월지까지는 너무나 먼 험지였기 때문이다.

▲ 돈황 막고굴제323굴 북벽위에 있는 장건출사서역도 (張騫出使西域圖). 당대 초기(618〜714년간) 제작.  

 

이때 장건이란 낭관 정도의 하급관리가 자원하여 서역사행의 단장을 맡고 백 명 정도의 수행원을 거느리고 길을 떠났다가 13년 만에야 겨우 장건 자신과 그의 통역 수행원인 감부(甘父) 두 사람만 겨우 살아서 돌아왔다고 한다. 장건은 10년간 감부와 함께 흉노에게 포로로 잡혀서 흉노 여자와 결혼해서 아들까지 두는 등, 흉노 지도자에게 신임을 얻었지만, 그는 그의 사명을 완수하기 위해서 흉노지역에서 탈출, 대월지까지 가서 협상을 벌였다. 그렇지만 대월지는 흉노에게 복수할 생각이 없었다. 그곳에서 이미 정착해서 안정되게 살고 있었기 때문에 그럴 필요성을 느끼지 않았다.

▲ 《사기(史記)》의 저자, 사마천(145-86BC).   

 

장건은 대월지와의 협상은 실패했지만, 장건은 서역에 대한 많은 유용한 정보를 갖고 오자, 한 무제는 벌을 주기는커녕 태중대부(太中大夫)란 벼슬에 봉하고 감부에게도 봉사군(奉使君)이란 칭호를 부여했다. 비록 대월지와의 협상은 이루어지지 않았지만, 장건은 흉노와 서역의 여러 나라와 신독(身毒 인도)에 대한 정보를 한 무제에게 보고하고, 촉도(蜀道)에서 버마를 거쳐서 신독(인도)으로 가는 길이 있다고 전하고, 촉도(사천 성)를 개척하여 대하(박트리아)와의 무역을 건의했다. 장건의 서역개척사에서 가장 흥미 있는 부분은 그가 흉노를 탈출하여 대월지까지 가면서 겪은 경험과 서역 여러 나라들에 대한 정보이다. 이 기록은 사마 천(司馬遷, 14586BC)사기(史記)》「대완열전한서(漢書)》「장건열전에서 알 수 있다. 장건은 월지의 영토였던 대완(大宛 Fergana), 대하(大夏 Backtria), 강거((康居 소그디아나)를 직접 방문했고, 이웃국가들인 안식(安息 Anxi 파르티아=이란), 조지(條支 메소포타미아의 셀레우코스=이라크)와 신독(身毒 인도, 지금의 파키스탄)과 인도-이란계통의 종족으로 투르크어를 사용하는 오손(烏孫)에 대한 정보를 얻었다. 참고로 대완열전>대원열전이라고도 번역을 하는데, 자를 으로 읽느냐, 아니면 으로 읽어서 나라이름 자로 읽느냐의 차이인데, 번역서들을 보면 대체로 자로 읽어 온 것 같다.

▲ 기원후 1세기경의 로마제국과 중국 한나라 지도.   

 

페르시아계 나라들은 한나라의 존재를 잘 알고 있었지만, 그리스의 헬레니즘 국가들만 해도 한나라에 대해서는 인식이 부족했던 것 같다. 로마제국 초기에 로마의 역사가였던 플로루스는 아우구스투스 황제의 재임 시기 중 방문하였던 다수의 한나라 사절들에 대해 언급하였는데, 이 중 세레스에서 왔다는 사신에 대해서 언급하고 있다.

 

기원후 97, 반초에 의해 파견되었던 중국 측의 사절 감영은 타림 분지에서 파르티아를 거쳐 페르시아 만에 도달하였다. 감영은 그가 만났던 항구의 선원들로부터 주로 정보를 얻었으며, 이를 통해 로마 제국(대진국)에 대한 기록을 남겼다.

 

중국과 로마는 당대에 간접적인 교류를 지속해왔다. 고대 로마와 한나라는 각각 근동과 중앙아시아로 진출하면서 상호 간의 접점을 높여왔으나, 인접한 강력한 제국이었던 파르티아와 쿠샨 제국의 존재 때문에 양자 간의 인지도와 이해는 낮은 수준에 머물러 있었다. 상호 간의 간접적인 교역을 통해 두 제국은 각각 비단과 유리, 그리고 각종 옷감들을 교환하였다. 로마 측 자료에서는 중국을 세레스(Seres)’라는 단어로 표기했고, 중국 측 기록에는 로마 제국을 대진(大秦)으로 불렸다.

보검<세계불교네트워크코리아대표> 

▲ 필자 보검스님이 일붕 서경보 스님의 원적 25주년 추모 다례재에 참석, 축사를 하고 참례자들과 기념촬영을 했다. 보검스님은 제17차 WFB 한국대회(1990년 10월〜11월)국제부장으로 서경보 스님을 모시고 활약한 바 있다. 안성 영평사 대웅전 앞.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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