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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정태 박사의 한국종교학●전주 향교의 연혁과 건축물 배치

장정태 논설위원 | 기사입력 2021/07/15 [22:19]
조선 개국 초, 아니면 그보다 조금 더 빨리 세워졌을 것으로 추정되는 전주 향교

장정태 박사의 한국종교학●전주 향교의 연혁과 건축물 배치

조선 개국 초, 아니면 그보다 조금 더 빨리 세워졌을 것으로 추정되는 전주 향교

장정태 논설위원 | 입력 : 2021/07/15 [22:19]

 

▲ 전주향교 대성전. 전주향교 홈페이지 사진 


조선 개국 초
, 아니면 그보다 조금 더 빨리 세워졌을 것으로 추정되는 전주 향교

 

조선 초기 각부···현에 지방의 군현마다 반드시 한 곳에 향교를 설치하여 자제들의 교육을 담당하도록 하였다면 이때 전주 향교도 설치 운영되었던 것으로 생각되지만 어떻든 그 창건에 관해서는 확실치 않다. 다만 추정하건대 전주에 향교가 설치된 것은 고려 성종 2(983) 전주목이 고려 12목 가운데 하나로 되었고, 이후 곧 987년 지방 12목에 경학박사(經學博士)와 의학박사(醫學博士)를 보내 그 지방의 자제 교육을 담당하게 한 점으로 미루어보아 이때가 첫 시작이 아니었던가 생각된다. 그러나 이때 학교가 정식으로 건립되었다고 단정하기는 어렵다.

 

그 뒤 인종 5(1127) 각 고을에 향학을 설치토록 하는 명령이 내려짐에 따라 전주에도 이때 향학이 설치되었던 것으로 추정된다. 그런데 개경의 국학에 대성전이 충렬왕 30(1304) 6월 설립되었다는 기록으로 보아 지방의 향학에 문묘가 설치된 것은 그 이후의 시기로 보아야 할 것이다.

 

또 공민왕 원년 4월 이색의 상소문에 외이향교내이학당(外而鄕校內而學堂)이라는 말이 있다. 이와 같은 내용을 미루어보아 적어도 이 무렵 이전에 이미 있던 향학을 향교(鄕校)’라는 이름으로 고쳐 불렀던 것이 아닌가 한다.

 

경국대전(經國大典)에 의하면 전라도(全羅道)1·3·4도호부·12·37현 총 57()으로 나누었던 것으로 보인다.

 

전주 향교는 고려 공민왕 3년 경기전 북편(지금의 전주시 풍남동)에 처음 건립하였다는 기록으로 보아 현재의 경기전 근처에 있었던 것으로 추정된다. 그 뒤 고려 우왕 6(1380) 중수하였던 것으로 추정된다. 그 뒤 조선이 개국 되어 유교숭배 정책에 따라 각 향교를 개편 확대할 때 전주 향교도 역시 개편 확대되었던 것으로 보인다.

 

전주향교지(全州鄕校誌)의 내용에 의하면 영낙기축년간이건우성서사리황화대하(永樂己丑年間移建于城西四里黃華臺下)’라는 기록이 있다는 것이기 록에 의하면 조선 태종 9(1409) 전주 부성의 서쪽으로 4리 떨어져 있는 황화대 아래로 옮겼던 것을 알 수 있다. 그 뒤 태종 10(1410) 전주에 어용전(’御容殿)을 설립 태조의 影幀을 봉안하였으며, 12년 어용전을 진전(眞殿)’이라 고쳐 부르다가 세종 231441, 辛酉) ‘경기전(慶基殿)’이런 이름을 고쳐 부르게 되었다. 동국여지승람(東國輿地勝覽)에 의하면 전주 향교는 부() 서쪽 5리에 있다고 하였다. 또 서거정(徐居正)이 쓴 신학기(新學期)에 의하면 전주 향교는 처음 정청(政廳,부성 안의 남쪽 안에 있었다가 세종 23년 경기전 안에 태조의 영정을 봉안하게 되자 학교와 경기전이 너무 가까워, 시서(詩書)를 외우는 소리와 태만(怠慢)한 학생에게 매질하는 소리가 시끄러워 성령(聖靈)을 편안히 모실 곳이 못 되므로 성의 서쪽 6, 7리 되는 곳(화산의 동쪽 기슭)으로 옮겼다고 했다.

 

앞의 내용으로 미루어 볼 때, 전주 향교는 조선 개국 초부터 아니면 그보다 조금 더 빨리 세워졌을 것으로 추정된다. 다만 앞서 언급한 서거정의 같은 기록에우리나라는 유학을 숭상하고 도를 중시하며 학교를 새우 고 스승을 세우니……. 하물며 전주는 우리 조종(祖宗)의 고향 땅이며 남국의 인재가 모인 곳인데 더 말할 것이 있으랴한 내용으로 보아 조선 개국초에 세워졌으리라 추측해 볼 수 있다.

 

아무튼, 이때 전주 향교에는 대성전(大成殿강당(講堂재실(齋室) 기타 부속 건물이 모두 갖추어져 부지가 심히 넓고 시내에서 멀리 떨어져 도적이나 호랑이()의 화가근심이 되어 담장을 둘렀다고 하였다 성종 101479, 己亥) 전주 부윤으로 부임한 이유인(李有仁)이 흥학(興學)에 각별한 관심을 보였다. 음해 1480, 庚子) 봄 신루 5칸을 건립 완공하였다고 한다. 따라서 비좁던 학사에서 공부하고 쉴 곳이 없었던 교생들이 이곳에 올라 쉴 수 있는 관망루로 이용할 수 있었으며, 향교의 재정도 넉넉해졌다. 임진왜란을 거친 뒤 선조 36(1603, 癸卯) 당시 전라도 관찰사 장만(張晩,1566-1629)에 의하여 좌사우묘(左社右廟)의 제도에 어긋나게 모두 좌측에 편중되어있음을 상소하여 조정으로부터 개건(改建)할 것을 명받아 기린봉 하의 본산 아래 현재의 향교 자리로 옮겨 재건하게 되었다.

 

전주 향교와 문묘의 내용을 보면, 원래 부성(府城)의 건축상 左廟右社다하여 客觀에서 남면하여 좌측에 文廟 우측에 社稷壇을 배치하게 되어있었으나 이때의 전주 부성은 左社 右廟의 형태를 취하고 있었다. 따라서 이와 같은 형태는 옛 법도(제도)를 어긴 것이 된다고 하였다. 이때 전주 향교는 특별히 서울에 있는 성균관의 제도에 따라 모든 건물이 세워졌다. 한편 이때 향교의 개건에 힘쓴 사람으로 읍인(邑人)인 생원 이지도(生員 李至道), 진사 이계암(進士 李季馣), 생원 양귀생(生員 梁貴生), 유학 송선(幼學 宋宣), 김동담(金東膽)등 이었다. 그 뒤 광해군 8(1616) 부윤 이상길(李尙吉,1556 명종10-1637 仁祖15)이 부임해오자 당시 전주 향교 의지도 자급 유생이던 최삼성(崔三省), 이영길(李英吉), 문준검(文俊儉)등이 부윤에게 찾아가 제수(祭需)의 마련을 건의하자 동() 1630()을 들여 제기 570개를 마련하였다.

 

전주 향교의 건축물과 그 배치

 

향교 건축물은 엄격한 유교적 제례질서에 부합하여 배치 건축되었다 건물배치에 있어서 공간의 위계성을 나타나게 되어있는데, ·횡적 축선이 질서와 균형을 이루어야 하였다. 향교 건축물의 배치는 성리학의 근본 개념이라고 할 수 있는()’ 의 공간이 위계적 질서체계로 자리 잡은 그것이라고 할 수 있다.

 

한국 고건축(古建築)의 특징이 비대칭적인 균형과 조화를 이루고 있지만, 향교 건축물은 그 기능에 따라 축선의 대칭성이 공간 질서를 이루고 있는 것이 특징이다. 향교 건축물은 대체로 자좌 오향(子坐 午向)을 주축 선으로 하고 있으며 유교의 중흥조 공자(中興祖 孔子)를 비롯하여 선사(先師)와 선현(先賢)을 봉사하는 대성전(大成殿)을 중심으로 동·서무(·西廡)를 좌우에 배치하는 문묘향사공간(文廟享祀空間)과 학생들을 교육하는 명륜당(明倫堂)을 중심으로 좌우에 동·서재가 배치되는 강학 공간(講學 空間)으로 구분된다. 이는 성균관의 건축물 배치 양식을 따른 것이다. 건축물 배치형식은 대성전과 명륜당의 위치에 따라 전묘후학(前廟後學), 전학후묘(前學後廟), 좌묘우학(左廟右學), 우묘좌학(右廟左學) 등 여러 형태로 나누어볼 수 있다.

 

성균관이나 전주 향교 나주향교 등과 같이 평지에 있는 전묘후학 배치형태는 중국 곡부(曲阜)의 공자묘(孔子廟)나 부학(府學), 현학(縣學)의 제도를 도입한 배치방법으로 볼 수 있다. 우리나라 지형 여건에 맞게 경사 지형에 취해진 전학후묘 배치는 우리나라 향교의 일반적인 배치형태라 할 수 있다.

▲ 명륜당     

 

명륜당이 중심인 강학 구역을 전면에 두고 그 뒤쪽으로 대성전을 중심으로 한 문묘 구역을 배치한 유형으로, 순천 향교를 비롯한 우리나라 대부분의 향교 배치가 이 형식을 취하고 있다. 전묘후학 배치란 대성전을 중심으로 문묘 구역을 전면에 배치하고 있다. 대성전은 효종 4(1653)에 다시 세우고, 대한제국 융희 원년(1907)에 다시 고쳐 오늘에 이르고 있다. 대성전에는 공자의 위패를 가운데 모시고, 서쪽으로 맹자 등 네 성인, 공자의 제자 열 사람, 주자 등 중국 송나라 때 유학자 여섯 사람을 함께 모셨다.

 

동무서무에는 신라시대 설총을 비롯하여 중국과 우리 나라 유학자 분들의 위패를 모시고 있다. 향교에서는 매달 음력 초하루와 보름에 사당에 향불을 피워 올리고, 매년 봄가을에는 석전대제(釋典大祭)를 지냈다. 관청의 후원을 받아 향교의 선비들이 주관하여 치렀던 이 제사는, 공자의 뜻을 기리는 큰 행사이다.

 

명륜당을 중심으로 한 강학 구역을 후면에 배치하는 형식으로 이러한 형식은 많은 향교 중에서 극히 일부분에 불과하지만, 향교 배치의 全形으로 볼 수 있다. 서울의 성균관을 비롯하여 부와 목의 계수관(界守官) 고을이었던 전주·나주·경주향교와 군·현이었던 정읍·영광·함평향교 등이 이 형태에 속한다. 이러한 의미에서 전주 향교 건축물의 건축적 특징을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첫째, 대성전과 명륜당을 일축 선상에 두고 동·서무(·西廡)나 동·서재(·西齋)는 각기 구역 전면 좌우에 대칭으로 배치한다.

 

둘째, 제향의식(祭享儀式) 공간인 문묘 구역(文廟 區域)의 출입은 내·외신문의 주축 선상에 이중문(二重門)을 두어보다 경건한 자세로 경역(境域) 안에 출입할 수 있도록 한다.

 

셋째, 강학 구역(講學 區域)의 출입은 문묘 구역의 외곽을 우회 또는 강학 구역의 측면을 출입할 수 있도록 하여 문묘 구역의 일상 출입을 금기한다.

 

넷째, 강학 구역(講學 區域)에서 문묘 구역으로의 출입은 전학후묘 배치에서 통상적으로 설치되는 삼문을 설치하지 않고 문묘 구역 후면에 꼬투리 문 또는 사주문을 12개소 설치하여 출입토록 하고 제향의식 때의 주 출입은 문묘 구역 앞의 신문을 이용한다.

 

다섯째, 누각 건물을 인접하게 설치하지 않는다. 건물들이 인접하면 누에서 대성전 등 문묘 구역이 내려다보이게 되어 유교적 예법을 그르치게 되기 때문이다.

 

여섯째, 반드시 문묘 구역과 강학 구역을 담장으로 구별하여 구획한다.

 

일곱째, 문묘 구역이 강학 구역보다 위계성을 확립하는 엄숙한 공간이므로 주변 건물보다 우위의 공간으로 보이게 하는 건축 구조 양식상의 특징이 있다. 

▲ 전주향교 중문인 일월문    


현재 전주 향교의 건물로는 정문인 지경문 삼간(지경문 삼간)), 중문으로 일월문 이간(日月門 二間)이 있고, 대성전, 전면 좌·우측에 동서무가 배치되어 있다. 대성전 뒤에는 담이 쳐져 있고, 그 뒤에 명륜당, 그 좌측에 계성사와 그 위에 재()가 있다 계성사(啓聖祠)에는 대성전에 배향된 오성(五聖)의 아버지를 봉사(奉祀)하는 건물로 전국에서 유일하게 전주와 제주도에 있다. 대성전은 1m 정도의 넓은 축대를 쌓고 그 위에 세워진 건물로 정면 3, 측면 3칸의 맛 배 기와집이다. 전면에는 양측에 두 개씩의 받침 기둥이 세워져 있으며, 양 측면에는 비 가리개가 내려져 있다. 대성전 앞에는 양측에 석등과 거북이 상이 놓여있다. 명륜당은 정면 5칸 측면 세 칸의 맛 배 기와집이고 대성전보다 낮게 평지에 세워졌으며 양측 면 벽에는명천하태평자(明天下太平者)(서측면□□□□□」으로 글자가 상하 가로쓰기 두 줄로 새겨져 있으며 전면은 전부 개폐할 수 있는 나무문으로 되어있다.

 

현 건물은 1904년에 세운 것이다. 이 건물 안에는 향교 관계의 각종 현판이 걸려 있는바, 만력 32(1604) 문묘 상량문이 가장 오래된 것이다. 향교 외삼문 밖에는만화누(萬化樓)가 있다. 전주 향교가 다른 향교와 특이한 점은 신문(神門) 밖에 따로 만화 누를 세웠다는 것이다.

▲ 장판각   

 

장판각(藏板閣)은 전국향교 중 유일한 인쇄원문 조조(彫造)의 목판으로 금속활자판이 우리나라에 보급되기 전에 서적 발행의 원판으로 사용되었던 것으로 전라감영(全羅監營) 소유품이던 것을 고종 31886)에 전라관찰사 조한국(全羅觀察使 趙翰國)이 전주 향교에 이관(移管)하여 오복경 영석(吳福卿 榮錫)이 연재작고(捐財作庫)하여 판본(板本)을 보관·관리하였으나 그 후 판고(版庫)는 없어지고 판본(板本)만 보관하여오다가 1987년 장판각(藏板閣)을 신축하여 보존하게 되었다. 현존하는 판본은자치통감강목(資治通鑑綱目)1780, 주자대전(朱子大全)745, 율곡전서(栗谷全書)468, 성이대전(性理大全)561, 사기(史記)475,동의보감(東醫寶鑑)141, 무원록언해(無寃錄諺解)53, 사약(史略)58, 진서표(進書表)1, 삼강록서(三綱錄序)1, 잡판(雜版) 7판등 총4,290판으로 문화재적 가치성이 크다.  

 

그리고 뜰 안 양쪽에 서 있는 은행나무는 그 수령이 380년으로 전주 향교의 변천사를 간직한 채 서 있다. 현재 담장 밖 남쪽에 홍전문(紅箭門)이 있으며 총 17100여 간에 달하여 전라도 53관 가운데 수도 향교(首都 鄕校)로서 방대한 규모이다.

 

전주향교는 8.15 해방을 맞을 당시 전주에 대학교가 하나도 없었다. 재단법인을 만들어 대학교 설립을 구상하고, 당시 전라북도 학무국장이던 윤택중씨와 이봉구, 유직양 등이 주동이 되어 많은 유림들과 함께 전주향교 명륜당에 모여 대학교를 설립 할 것을 난상토의 끝에 합의 결정하고, 학교명은 유림의 뜻에 따라 명륜(明倫)으로 정하고 도지사의 학원인가를 받아 객사를 빌려쓰기로 하고 학생을 모집하여 서기 19498월에 첫 학기를 시작하였으나 교육의 열기는 높은 반면에 제반 여건과 사정이 여의치 못하였다.

 

월년(越年)하여 정식 대학의 인가를 받기 위하여 이봉구는 당시 국회법사위원장이었던 백관수(白寬洙) 의원(625사변 때 납북)을 찾아가 지원을 요청 백 의원은 흔쾌히 응락하고 당시 문교부장관이던 안호상(安浩相)에게 요청하여 서기 1950413일 초급대학(법학과와 국어한문과) 인가를 얻어 명륜대학(明倫大學)이 탄생하게 되었다.

 

그러나 객사의 시설구조가 年久하여 낡고 흙 바닥위에 의자와 책상을 놓고 수업을 하는 까닭에 시설이나 재정 등이 열악(劣弱)한 상태로 주간에는 국어·한문과 야간에는 법학과를 강의가 진행되었다.

 

이후 명륜대학은 국립대학 설립 운동에 의하여 서기 1953년에 전북대학교로 승격 인가되어 서기 1955년에 객사에서의 생활을 청산하고 덕진캠퍼스로 이전 번창하여 전북대학의 모체가 되었다. 서기 1897710일 고종황제의 칙명에 따라 문사들의 수련장이던 전주향교 양사재(養士齋)를 교실로 개조하고, 교사 2명에 8~16세의 학생 36명을 등록받아 최초의 전라북도 내에 공립소학교가 개설되었다. 이것이 현재 완산구 태평동 164-1에 위치하고 있는 전주초등학교(전신이 향교 양사재)이다.

 

동문 명사(20회 이철승,34회 임방현,56회 정동영) 들이 배출되어 이 지역사회 발전에 공헌하고 있는 최초 최선의 학교로서 발전하고 있다.

장정태 삼국유사문화원장(철학박사. 한국불교사 전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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