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몸부림의 로마- 그리스도인을 괴롭히다

이광열 기자 | 기사입력 2014/06/04 [09:43]
예수를 배척한 유대인들의 업보②-역사 그분이야기

몸부림의 로마- 그리스도인을 괴롭히다

예수를 배척한 유대인들의 업보②-역사 그분이야기

이광열 기자 | 입력 : 2014/06/04 [09:43]

▲ 불타는 예루살렘. 아래쪽에 기드론 시내와 중앙에 성전이 보인다. 우측에는 로마군이 포위하여 공격하고 있다.     ©


5현제시대(五賢帝時代)     

네르바황제에서 마르크스 아우렐리우스 황제까지의 통치기간(AD 96년~180년: 95년간)까지를‘5현제시대’라고 부른다. 이 시기의 특징은 세습하지 않고 양자에게 제위(帝位)를 물려준 것이었다.

1) 마르쿠스코케이우스 네르바황제(96년 9월 19일~98년 1월 27일)

원로원 의원, 70세에 황제가 된 사람, 양자인 트라야누스에게 양위.

2) 마르쿠스 울피우스 트라야누스황제(98년 1월 27일~117년 8월 9일)

강대한 제국건설, 영토 확장, 기독교에 대한 편견으로 구속과 통제를 가하여 고통을 준 사람. 후계자에 친척 하드리아누스를 지명했다.

3)하드리아누스황제(117년 8월 9일~138년 7월 10일)

제2차 유대인 항쟁을 유발한 장본인. 진리를 훼손하고, 성도를 핍박했으며, 예루살렘성에 이방신 쥬피터신전을 건립하는 등 악행을 한 황제.

4) 안토니우스 피우스황제(138년 7월 10일~161년 3월 7일)

남프랑스 나르보넨시스 속주 출신. 하드리아누스의 양자, 자신의 후계자 마르쿠스아우렐리우스 지명.

5)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161년 3월 7일~180년)

스토아 철학자이자 명상록 집필자. 다음 황제를 자신의 친아들에게 세습시킨다.

5현제 중 마지막 황제. 철학자로서 철학적 이론 위에서 그리스도인 핍박. 


    
유대인의 2차 항쟁     

로마황제 하드리아누스가 128년 제국의 속주를 순행하던 중 유대를 방문한다. 이때 황제는 반란이 심한 유대인들과 화친정책을 협의하기 위해 유대랍비 아퀴바와 협상을 한다. 이때 유대인들은 로마황제 하드리아누스에게 ①성전을 재건축하게 해 달라 ②성전건축 비용 마련을 위한 모금을 하게 해달라는 요구를 하자, 황제는 130년 이를 허락하며, 유대인들에게 자신을 신의 아들이라고 부르라는 황제숭배 요구한다. 유대인들은 이에 반발하자 하드리아누스 황제는 분노하여 유대인들의 할례를 금지시켰다.     

이 조치에 유대인들의 항의가 더욱 격렬해지자 황제는 이미 허가한 성전재건축과 성전모금 허가를 취소했고, 유대인들의 항의가 마침내 독립항쟁으로 발전하여 132년부터 135년까지 유대인의 지도자 바르코크바(Barkokhba)와 리비아키바(Ribiakiba)가 항쟁을 주도해 나간다.   

바르코크바는 구세주를 자처하고, 리비아키바는 제사장을 자처하면서 로마에 대한 항쟁은 성전(聖戰)이라 선동하여 항쟁은 전국으로 확산되고 더욱 격렬해져갔다. 바르코크바는 자신은 별의 아들 유대인의 왕이며 메시아라고 주장했지만 그리스도인들은 인정하지 않았다. 이런 감정이 유대교와 기독교가 적대관계로 발전하여 오늘에 이르는 이유 중의 하나가 되었다.     

한편, 로마황제는 이 반란을 진압하기 위하여 명장 세베리우스장군과 정예부대 22군단을 투입했으나 유대인은 이 로마군단을 엥케리계곡으로 유인하여 거의 전멸시켜 참패를 안겨준다. 이렇게 되자 세베리우스장군은 전열을 정비하고 군을 보강하여 치밀하고도 광범한 작전으로 유대인 마을 985개를 초토화시켜 유대인 80만 명이 희생되었다.     

유대인들은 최후의 저항장소로 제2의 맛사다인 베틸에서 결사항전을 하였으나, 136년 전멸하고 만다. 공교롭게도 유대력 아브월 9일이었다. 이후 로마는 유대라 하지 않고 팔레스타인으로 명칭을 바꾸었다. 하드리아누스황제는 유대인들에게 다음 3가지를 금지시키고 이를 위반할 때는 사형으로 다스렸다.     

① 토라(모세5경)사용금지, ②할례금지, ③안식일 예배금지를 공표하자 로마제국 내에 거주하는 기독교인들에게 문제가 되었다. 당시 로마제국 내에는 기독교도들과 유대교도들이 공존하고 있었는데 유대인들의 반란으로 황제들은 기독교도들과 유대인들을 같은 무리들로 취급하게 된다. 이런 오해를 받는 이유는 다음과 같다.     

①기독교인들도 유대인과 같은 하나님을 믿고 있다는 것. ②유대인과 기독교인들이 모두 구약성경을 사용하고 있다는 것. ③모두 안식일을 지키고 있다는 것이다.     

이 항쟁으로 로마는 예루살렘에 거주하는 유대인들 모두 추방시켜 버리라는 황제의 명령에 따라 135년 원로원 의결을 거쳐 유대인들의 이산(디아스포라)을 강제 시행되었고, 이후 이스라엘 건국인 1948년까지 이어졌다. 또한 로마는 예루살렘 이름을 아일리아 카피토리나로 바꾸고 시내 복구와 도시계획을 로마식으로 이루어 놓았다. 
    

교부들의 변증서     

당시 교부들은 황제에게 유대인들과 기독교인들을 다르게 취급해 달라고 요청했으나 황제는 이 요구를 거절하고 묵살하자 황제에게 진정서(변증서)를 작성하여 제출하게 되었다.     

디오그네투스 폐하께-폐하께서 그리스도인의 종교에 대하여 알아보시기를 원하며, 또 이 문제에 관하여 정확하고도 주의 깊은 조사를 하여 보시기를 원하나이다. 예컨대 그리스도인들은 어찌하여 유대인의 미신을 따르지 않는지에 대해서 말입니다… 그리스도인들은 하나님을 유대인이 경배하듯 그러한 형식으로 섬기지 않습니다.
(*디오그네투스 :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 황제의 개인교사)     

이런 노력에도 불구하고 황제는 교부들의 변증을 무시하고 유대인과 기독교인을 동일하게 취급했다. 결국 교부들은 유대인들과의 차별화와 로마의 이교도들과의 동질화를 고려하지 않을 수 없게 되었다. 이래서 이 문제에 대한 절충안이 마련되었다. 즉 유대인과의 차별화는 구약의 하나님 대신 신약의 하나님을 강조하고, 이교도와의 동질화를 위해서는 안식일 대신 당시 태양신을 섬기는 이교도들의 예배일인 일요일 예배를 교회에 도입하게 되었다. 그러자 교회는 분란이 일어났다. 안식일을 계속 지키려는 무리와 안식일 대신 일요일을 지키려는 무리, 그리고 두 날을 모두 지키려는 무리가 생겨난 것이다.     

계속되는 탄압과 로마인들의 노여움을 누그러뜨리기 위해 저스틴(100~165), 마르시온( ~160)같은 교부는 로마제국에 그리스도교를 변호하는 변증서를 써서 황제에게 상신하는 한편, 로마인들의 환심을 사기 위해 유대인들의 신앙과 문화를 경멸하고 안식일과 할례를 정죄하는 변증을 하였다. 심지어 2세기의 저스틴은 안토니우스피우스 황제를 기쁘게 하기 위해 로마제국의 혹성 신 중 최고의 신을 높이기 위해 태양의 날을 정할 것을 건의하기도 했다.    

*이스라엘 국가 명칭들: 가나안→이스라엘→유대(바벨론 귀환 후)→팔레스타인(로마시대)→이스라엘(1948년 5월 14일 건국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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