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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주호칼럼
한민족의 작은집 일본왕실㉛ 日 정권 완전 백제계 소아씨 세력하로
그곳엔 지금도 배달민족의 피가 흐르고 있다
기사입력: 2016/04/06 [08:17]  최종편집: ⓒ 매일종교신문
김주호 기획특집본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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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교 대 國神간의 투쟁 극도로 치열
배불론자 용명·민달·숭준왕 비명死 

용명왕이 죽자 소아마자(蘇我馬子)대신은 자신의 생질녀요 민달왕의 왕후였던 취옥희(炊玉姬)를 끼고 흠명왕의 열두째 아들인 박뢰부(泊瀨部)를 옹립했다. 이이가 곧 숭준(崇峻: 스이슌)왕이다. 취옥희는 뒷날의 추고여왕(推古女王)이다.
 
소아마자 대신의 이러한 전격적인 조치에 평소의 정적이었던(불교논쟁 등으로) 물부(物部)의궁삭수옥(弓削守屋) 대연(大連)이 크게 놀라 대책을 세웠다. 일본서기 숭준기는 이러한 상황을 다음과 같이 기록해 놓고 있다.
 
숭준 2년 4월 용명왕이 죽자 물부의 대연과 그 군중(軍衆)이 경악했다. 대연은 본시 혈수부황자(穴穗部皇子)를 옹립하여 천황으로 삼으려 했다. 일설에 의하면 그는 제29대 흠명왕(欽明王)의 서자라고 한다. 사냥을 빙자하여 혈수부황자에게 밀사를 보내 모의했으나 누설되고 말았다.
 
이 사실을 안 소아마자가 사람을 보내 혈수부황자를 살해하고 만다. 그리고 7월에 마자대신이 물부 수옥대연을 제거할 양 군사들을 이끌고 그의 집을 습격했다. 물부 대연도 응전을 가했다. 그는 큰 나무에 올라가 활을 쏘니 백발백중이었고 군세가 매우 강했다. 소아마자의 군이 3차에 걸친 돌격에도 모두 실패하고 돌아와 겁을 먹고 있었다.
 
이때 15세의 구호(廐戶)가 나무를 깎아 불상을 만들고 빌었다. ‘우리를 적에게 이기게 해 주시면 사천왕사(四天王寺)를 세우겠습니다.’
 
과연 전세가 유리한 쪽으로 바뀌어졌다. 소아마자 역시 그와 같이 기원하니 전세가 더욱 호전하여 나무 위의 대연을 사살하고 말았다. 승리는 소아마자 편이었다.
 
여기서 ‘구호’라는 인물은 나중에 말하는 일본역사상 빼놓을 수 없는 바로 성덕태자(聖德太子)이다.
 
물부대연과의 싸움에서 승리한 소아마자 세력은 박뢰부를 왕위에 옹립한다. 이이가 제32대 숭준 왕 이다. 그의 어머니는 소아 도목숙니(蘇我 稻目宿禰)의 딸 소자군(小姉君).
 
소아마자 대신은 사천왕사와 법흥사를 세우는 한편 많은 스님들을 성지 백제국을 찾아 순례 또는 수도케 했다. 뿐만 아니라 좋은 집의 자녀들을 비구 내지 비구니 스님으로 불법에 귀의케 했고 광대한 밭과 땅을 불사에 바치는 등 불교의 중흥포교에 크게 힘썼다.
 
사실 숭준왕 이전 일본은 대화(大和)시대에 접어들어 비록 통일국가 체제를 갖추긴 했으나 왕위쟁탈전과 종교 대 종교 간의 분쟁, 호족간의 투쟁 등으로 미처 이렇다 할 문화를 형성하지 못했다.
 
그러나 6세기에 와서야 비로소 비조(飛鳥: 아스까)문화라는 찬란한 불교문화를 이룩하게 된다. 그 활발했던 초기가 바로 숭준왕 때이다. 이는 대부분 백제로부터 건너간 스님들과 여러 학자들에 의해서였다. 실로 일본문화의 모체를 이루었던 것이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숭준왕은 이러한 불교운동을 좋아하지 않았다. 숭준 5년(592년) 10월4일 멧돼지를 잡아 헌납하는 자가 있었다.숭준왕이 이를 보고 ‘어떻게 하면 내가 싫어하는 자를 저 멧돼지와 같이 목을 벨 수 있을까’ 했다.
 
이 말을 들은 소아마자가 11월3일 동한(東漢)의 직구(直駒)를 보내 숭준왕을 찔러 죽이고 곧장 매장해 버렸다. 이로서 배불론자는 완전히 제거된 셈이었다.
 
아무튼 종교 대 종교의 대립 투쟁은 심각한 것이다, 일본열도 내에 있어 40여 년 간에 걸친 불교 대 국신(國神) 간의 투쟁은 매우 치열했다. 백제국이 수출하는 불교는 그러한 투쟁 속에 부단히 커갔다. 삼보를 중심한 비조문화는 그 주동세력인 소아씨 정치세력의 신장에 따라 날로 크게 성장해 간 것이다.
과거 일본 내 불교수입 내지 발전상은 대체로 3기로 나누는데, 제1기는 불교를 처음 받아들인 흠명 13년에서 배불파의 거두 대연을 제거한 숭준 원년까지의 36년간이다. 이 기간 동안 용명, 민달, 숭준 세 왕이 종교싸움으로 인해 비명 사 하게 되는 것이다. 이 시기에 10개의 사찰이 세워지기도 했다.
 
불교발전의 제2기는 숭준왕 즉위에서 피살당할 때 까지 5년간이다. 부처님의 가호로 물부대연과의 싸움에서 승리했다고 믿는 소아씨 정권은 삼보를 크게 일으키고, 기도 맹세한 것에 따라 사천왕사 건립, 성지 백제순례 및 귀족 자녀들의 출가 등 포교가 크게 벌어졌다.
 
그런데 숭준왕이 이를 좋아하지 않고 소아마자를 ‘어느 때면 멧돼지 목 자르듯 베어 죽일 수 있을까’ 한 것이 화근이 되어 되레 소아마자 측에 의해 살해당하고 마는데 이를 계기로 일본정권은 완전히 소아씨 세력 하에 들어가게 된다. (김주호 기획특집본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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