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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민족의 작은집 일본왕실㉜백제계 성덕태자 섭정, 소아씨 가문이 정권 흔들어

김주호 기획특집본부장 | 기사입력 2016/04/22 [06:44]
그곳엔 지금도 배달민족의 피가 흐르고 있다

한민족의 작은집 일본왕실㉜백제계 성덕태자 섭정, 소아씨 가문이 정권 흔들어

그곳엔 지금도 배달민족의 피가 흐르고 있다

김주호 기획특집본부장 | 입력 : 2016/04/22 [06:44]
고구려 백제서 명승·화공 등 귀화… 비조문화 절정

 
일본문화는 이미 언급했듯이 숭준(스슌)조에서 꽃피기 시작했다. 숭준원년(백제 위덕왕 35년, 서기 588년)에만도 2개의 사찰이 세워졌다고 한다.(元興寺의 가람연기 병류기자재장)

소아마자(蘇我馬子: 소가노우마꼬)의 지휘 하에 나라현의 섭진국(攝津國) 비조(飛鳥)지역에 세워진 법흥사와 사천왕사는 찬란한 비조문화의 초석이 됐다. 이는 곧 일본문화의 모체가 되었고, 당시 일본에 건너간 백제인들은 일본문화의 산파역을 해낸 것이다.
사찰의 건축과 불상의 조각, 불교회화 등과 불교의 심오한 묘도(妙道)를 캐고 닦으려 수많은 한민족계 남녀들이 출가 입산하기도 하는 등 정신과 물질 양면에 걸쳐 비약적 발전을 기하는 때였다.
이러한 상황에서도 정치만은 무상했다. 정치권력의 다툼은 예나 지금이나 변함이 없는듯하다. 숭준왕이 외숙인 소아마자에 의해 살해당한 것이다.

숭준왕이 죽자 공석이 된 왕위의 자리는 그의 형수인 추고(推古: 스이꼬)가 제33대 왕으로 즉위한다. 추고왕은 흠명왕의 딸이며 민달왕의 왕후였다. 추고여왕 때의 일본왕실은 완전히 백제인들 천지가 되고 만다. 이 추고왕의 36년간이 불교발전의 제3기에 해당 된다.

꼬 숭준왕을 제거한 소아마자 대신은 사위인 성덕(쇼도쿠)태자(聖德太子)로 하여금 섭정케 한다. 따라서 왕실 조정이 완전 백제목씨계 소아씨의 손에 들어갔다.

추고원년(서기 592년) 1월15일 비조에 새로 건축 중인 법흥사의 입주식을 거행했다. 부처님 진신사리를 모신 절이다.

이때 소아마자대신을 비롯해 수많은 조정 중신들이 모두 백제국의 의복을 입고 나왔는데 관중들이 이를 보고 크게 기뻐했다.(扶桑記)

구호(廐戶)가 황태자(성덕태자)가 되고 아울러 섭정을 맡은 것은 서기 592년 추고원년 4월이었다. 백제계 인물인 그는 섭정을 하면서 모든 시책이 역시 백제 적이었다.

추고 2년 9월 소아마자는 난파(難波) 황릉(荒陵)에 사천왕사를 짓기 시작했다. 그 다음해 2월1일엔 조칙을 내려 불교의 삼보(三寶: 불·법·승)를 일으켜 세울 것을 명했다. 이에 제신(諸臣)· 연(連) 등이 다투어 사찰을 지었다고 한다.

이 같은 상황에서 당시 일본정권은 백제계 소아씨가 쥐고 좌지우지했음을 알게 된다.
추고 2년 5월 고구려스님 혜자(慧慈)가 일본에 귀화 했다. 이 이가 성덕태자의 스승이 된다. 같은 해에 또 백제스님 혜총(慧聰)이 왔다. 이 두 스님은 불교포교에 전념하게 됐는데 삼보의 큰 기둥이 됐다.

추고 4년 법흥사가 준공되자 혜자·혜총 두 스님을 이 절에 주석케 했다.
9년 2월 성덕태자는 반구사(斑鳩寺)를 짓기 시작, 그해 13년 10월 완성 했다.(文定昌 저 『日本上古史』 421쪽에는 ‘皇子 斑鳩宮에 居하다’ 했음) 이 반구사가 나중에 법륭사(法隆寺)로 개칭되며 19세기에 이르러 세계적으로 유명해졌다.

12년 조정에 화사부(畫師部)를 둘로 나누었다. 황서(黃書)의 화사, 산배(山背)의 화사가 그렇다. 이는 흠명 13년 백제인 화공이 건너가 뒷날 방광장목(放光樟木)불상을 만들어 그려낸 그때 이래의 대 발전 이었다. 이와 같이 하여 이루어지는 백제인 화공들의 회화는 찬란한 비조문화의 향기를 더해 주었다.

추고 18년(서기 610년) 고구려 고승 담징(曇徵)이 법정(法定)스님과 함께 일본에 갔다. 담징은 불교에 조예가 깊을 뿐만 아니라 유학에도 정통하여 제자들에게 논어, 맹자, 시경, 서경, 주역 등 5경을 가르쳤다. 또한 종이, 먹, 채색을 만드는 법을 가르쳤다. 뿐만 아니라 멧돌을 만들어 냈다. 이때부터 일본 땅에 연자방아와 멧돌을 사용하기 시작했다는 것이다.

또 추고 20년 5월 백제 예인(藝人) 미마지(味摩之)가 일본에 귀화 했으며 그는 기(技)·악(樂)·무(儛), 즉 무악을 잘 하는 사람이었다. 일본 땅에는 이때부터 오무(吳儛)와 횡적(橫笛)이 시작 됐다고 한다.

그러나 섭정을 맡아 찬란한 불교문화를 일으켰던 성덕태자가 추고 29년 2월9일 반구궁(斑鳩宮)에서 세상을 떠나고 만다. 성덕태자는 29년간 사실상 비조왕조의 왕 노릇을 한 인물이다. 소아씨의 세도정치 내지 왜국지배가 절정기였을 때 그는 별세한 것이다.

그가 별세하자 여러 왕족과 신하들, 백성들이 하늘이 무너지고 땅이 꺼진 것 같이 여기고 슬퍼했다고 한다.

성덕태자의 상은 백제 아좌태자(阿佐太子)가 그려준 것으로 일본 최초 최고의 뛰어난 초상화로 유명하다. 30여 년 전만 해도 그의 상은 일화 1천 엔짜리 지폐에 새겨져 널리 통용 됐었다. (김주호 기획특집본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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