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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민족의 작은집 일본왕실㉝백제 이름으로 궁과 절, 빈소 만든 서명(舒明)왕
그곳엔 지금도 배달민족의 피가 흐르고 있다
기사입력: 2016/05/11 [06:38]  최종편집: ⓒ 매일종교신문
김주호 기획특집본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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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덕태자의 섭정 시기는 일본역사상 매우 중요한 시기이다. 이 시기는 비조문화의 찬란한 개화기였다. 불교에 있어서 삼보 흥융의 황금기였고, 백제계 소아씨의 전성기였던 것이다.
 
이 비조문화가 수준 높은 문화였음은 다음 몇 가지로 요약해 말 할 수 있다.
 
첫째, 백제인 사찰 건축공에 의해 창건된 원흥사, 사천왕사, 법륭사 등 건축물이 웅대 장려하다는 것이다. 그들의 빼어난 건축기술은 지금도 감탄을 자아내게 하고 있다.
 
둘째, 백제인 불상조성 기술자들에 의해 조선된 백제관음상과 중궁사(中宮寺)의 미륵상 등은 조각예술품으로서 그 원숙한 솜씨를 보여 주고 있다.
 
셋째, 고구려 출신 담징스님이 그린 법륭사 금당의 벽화인 약사상과 석가삼존상은 우리나라의 경주 석굴암 불상, 중국의 운강석불과 함께 동양의 3대 예술품의 하나로서 이미 세계에 널리 알려진 사실이다.
 
넷째, 고구려 스님 혜관(慧灌)에 의해 625년에 전해진 삼윤종(三輪宗), 백제 스님 지통(智通)에 의해 655년 전해진 법상종(法相宗), 740년 신라 스님 승선(僧禪)의 의해 전해진 화엄종(華嚴宗) 등 높은 수준의 정신문화를 일본왕실, 귀족 내지 그 지배층에 심어준 것 등이다.
 
성덕태자가 죽고 태자를 책봉하지 못한 채 7년 만에 추고여왕 마저 죽고 만다. 이때가 추고 36년 서기 628년이다. 우여곡절 끝에 629년 1월 전촌(田村: 다무라)왕자가 왕위에 올랐다. 이 이가 서명(舒明: 죠메이)왕이다. 그는 민달왕의 손 언인대형(彦人大兄: 히꼬히도노 오호에)왕자의 아들로서 백제계이다. 왕후는 백제 30대 무왕(武王)의 딸 보황녀(寶皇女)이다.
 
서명왕 자신이 백제계인 데다 그 왕후마저 직접 백제 무왕의 왕녀이니 서명왕족이야말로 한민족 부부왕실이었던 것이다. 그러니까 서명(죠메이)왕은 백제무왕의 사위가 되며, 왕후 보황녀 역시 의자왕의 손 위 누나이다.
 
그런데 『일본서기』에는 서명 왕 3년 3월 백제 의자왕이 왕자 풍장(豐璋)을 인질로 보냈다고 했다. 여기서 ‘인질’이란 어불성설이다. 그것은 우호관계의 예표로서 자진해 왕자나 왕족을 보냈던 것이다. 의자왕의 아들 풍장은 그의 고모를 찾아 일본에 건너간 것이다. 따지고 보면 친정조카가 고모 댁을 방문한 데 불과한 것이다.
 
그는 고모의 나라에서 30여 년간 머물다 백제가 망했다는 소식에 접한다. 그러자 그의 고모인 보황녀의 도움을 받아 부여복신(夫餘福信)과 함께 백제 복국(復國)운동에 나선다. 그러나 서명13년 10월9일 서명이 백제궁에서 죽었다. 18일 궁의 북쪽에 빈소를 마련하고 빈소이름을 백제빈(百濟殯)이라 했다.
서명왕은 왕후와 함께 백제계임을 이미 밝힌 바 있다. 그는 일본역사상 백제계의 어떤 왕들 보다도 노골적으로 백제를 자나 깨나 잊지 못한 왕이다. 할 수만 있다면 힘을 다 해 모국인 백제를 지원하려고 했다. 왕자 풍장의 백제 복국운동을 도와 수많은 병력과 병선을 지원해준 것으로도 알 수 있다.
 
그는 또 말년에는 백제천가에 궁 처를 정하고 궁(宮)과 절(寺)을 지어 백제라는 이름을 붙였던 것이다. 만 1년에 걸쳐 신축한 백제 궁으로 자신이 직접 궁을 옮겼다. 여기서 정사를 보다가 죽은 것이다. 그는 궁 이름도 백제궁, 죽은 다음 빈소의 이름까지도 백제의 이름을 따 백제빈이라 했으니 철저히 백제를 잊지 못하고 사모한 왕이라 볼 수 있다.
 
일본의 왕들은 신무왕에서부터 하나같이 직접 또는 간접으로 한민족의 핏줄을 타지 않은 것이 없지만, 이 서명 왕이야 말로 백제왕의 화신이라고 하리만큼 백제를 위했고, 백제의 이름으로 죽은 왕이라고 할 수 있다.
 
이 서명왕에 이어 왕후 보황녀가 제35대 황극여황(皇極女皇)에 오른다. 그는 이미 말한 데 로 백제 무왕의 딸이라고 했다. 이 여인은 서명왕이 죽자 그 이듬해 1월15일 즉위했다. 황극여황은 나중에 제명(齊明)조에서도 언급하겠지만 두 번씩이나 왕위에 오르게 된다. (김주호 기획특집본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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