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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민족의 작은 집 일본왕실㊳백제 복국운동자들 近江에 신국가‘日本國’건설

김주호 기획특집본부장 | 기사입력 2016/07/12 [07:14]
지금도 그곳엔 배달민족의 피가 흐르고 있다

한민족의 작은 집 일본왕실㊳백제 복국운동자들 近江에 신국가‘日本國’건설

지금도 그곳엔 배달민족의 피가 흐르고 있다

김주호 기획특집본부장 | 입력 : 2016/07/12 [07:14]
의자왕 차남 天智王이 나라이름 倭를‘일본’으로
日사학계 우리민족이 지어준 국호 은폐·외면 급급
 
제명여왕은 서기 660년 10월 나·당연합군에 의해 친정나라인 백제가 망하게 되자 백제를 구원하려 복국 전(復國 戰)을 벌일 준비태세를 갖춘다. 왜에 도움을 청하러 온 부여복신(夫餘福信)의 청을 받고 즉시 적극 지원준비를 갖추고 이듬해 1월6일 자신이 직접 출정 길에 오른다.
 
그러나 가는 도중 뢰호내해(瀨戶內海: 세도나이까이)를 통과하는 중에 대전왕녀(大田王女)가 아이를 낳으므로 백제 행을 중단하고 만다. 이어 이예온천(伊豫溫泉)에 들렀다가 1월25일 월주(越州)를 거쳐 5월 축전국(筑前國: 오늘의 후꾸오까 켄)이 있는 광정궁(廣庭宮)으로 거처를 옮겨 가며 백제지원에 최선을 다한다.
 
그러던 중 제명여왕은 그해 7월27일 조창궁(朝倉宮)에서 급서하게 된다. 이 급서이유는 지금까지도 전해지지 않는다.
 
백제가 나·당 연합군에 망하자 제명조정에서 백제를 돕기 위해 많은 지원을 하며 유명한 백촌강(白村江)전투를 벌이게 된다. 여기서도 전쟁에 패한 많은 백제인 들이 왜지로 건너갔다. 이들 주민들은 주로 백제왕실을 중심한 권력 층 들이었을 것이다.
 
이 백제 복국운동자들은 왜국의 기존 백제계 세력을 바탕으로 근강(近江: 오호미)지방에다 신 국가를 건설한다. 그들은 새로운 국가세력을 형성하기에 바빴다. 이는 백제 의자왕의 장자 부여융(夫餘隆)에 의해서 진행됐다. 융은 나중에 웅진(熊津)도독이 되어 백제인 들의 망국의 한을 잠시나마 풀어 주기도 했다.
 
왜에 건너간 이 신세력이 정착지를 동해안에서 건너다보이는 근강지방으로 택하게 된 것은 백제국의 사직을 존속하려는 의지가 강했기 때문이겠다. 즉 군사동맹국이었던 고구려와의 상호 연락관계와 나당항쟁을 계속하기 위해서라고 본다. 당나라 장수 유인궤(劉仁軌)는 그의 상소문에서 ‘부여융이 북에 있고, 용(勇)이 남에 있어 백제와 고구려가 서로 당을 지어 돕고 있습니다. 왜인이 비록 떠나 또한 그림자와 소리가 서로 비치고 울리는 작용을 하고 있습니다.’고 했다.(『舊唐書』‘劉仁軌 傳’)
 
근강조(近江朝)의 도읍지는 오늘날의 자하현(滋賀縣) 대진(代津)지방이다. 백제인 들로 구성된 근강지방의 나라이름이 바로 일본국(日本國)이다. 이것이 오늘의 ‘일본’이란 나라이름이 생긴 연유이다. 이 나라는 의자왕의 여러 아들과 척신들을 중심으로 한 백제인 들이 세운 것이다.
 
그런데 이 ‘일본’이라는 나라이름을 지어준 사람이 바로 백제 의자왕의 둘째아들 용(勇) 즉 천지왕(天智王)이라는 것이다.
 
이 일본국은 이후 여러 파란을 겪으면서 점차 왜국의 각지를 병합, 먼 훗날 통일 일본국가를 이룩하게 된다.
 
그러나 ‘일본’이라는 국호제정에 관한 내력을 『일본서기』에 기록해 놓지 않았다. 그런데 『삼국사기』 문무왕 10년 조(서기 670년)와 구당서(동이 일본)에는 왜국의 국호가 일본국으로 변경됐음을 기록하고 있다.
 
『삼국사기』 신라본기에 서기 670년 ‘왜국을 일본이라는 국호로 변경하다’ 한 대목은 그 당시 새로 건설된 일본국으로부터 그러한 통고를 받았기 때문이다.
 
신라 문무왕 10년은 왜의 천지왕 9년이고, 백제 복국운동자들이 근강 조를 건설한지 3년째이다. 이로 보아 근강조의 국명이 일본이었음은 명약관화한 일이다.
 
그럼에도 일본사학계는 명치(明治)이래 일본국호제정에 관해 횡설수설하며 우리민족이 ‘일본’이라는 나라이름을 지어 주었음을 애써 외면 내지 감추려 하고 있는 것이다.
 
천지왕은 근강조를 창건한 군주요, 왜국이 일본국으로 나라이름을 바꾼 것이 천지 9년이라 했으니 이때 일본국은 근강 조임이 분명하다. 때문에 근강조의 천지왕은 백제 의자왕의 둘째아들 용(勇)이라는 사실이다. 당나라 장수 유인궤가 상소문에서 말했듯이 ‘북쪽에는 부여융, 남쪽에 용이 있다’ 한 것이 이를 말한다.
 
이 상소문이 주효하여 의자왕의 장남 부여융이 귀국, 웅진도독이 된다. 그리하여 신라와 맞서 백제사직의 회복에 나선다. 이로써 잠시나마 백제인 들의 망국의 한을 풀기도 한다.
 
이처럼 융이 백제에 가 있었으므로 근강조는 의자왕의 둘째아들이요 융과 형제지간인 용이 사직을 맡을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따라서 천지왕은 곧 용이라고 보는 것이다. (김주호 기획특집본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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