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르몽드 디플로마티크 특집 ‘사후세계’ 6

르몽드 디플로마티크 | 기사입력 2017/03/04 [07:17]
조상과 혼백, 그리고 저승

르몽드 디플로마티크 특집 ‘사후세계’ 6

조상과 혼백, 그리고 저승

르몽드 디플로마티크 | 입력 : 2017/03/04 [07:17]
르몽드 디플로마티크(http://www.ilemonde.com) 특집 ‘사후세계’ 6
 
<게재 내용>
1. 잘 죽는 법, 통과의례에 관한 성찰(장 필립 드 토낙)
2. 영혼의 저울질, 삶의 인과응보(세르주 라피트)
3. 영생을 위한 통행증, ‘사자의 서(書)’(플로랑스 컹탕)
4. 티베트 불교의 내세(로랑 데아예)
5. 내세를 결정하는 고인의 미덕(세르주 라피트)
6. 조상과 혼백, 그리고 저승(세르주 라피트)
7. 환생과 부활, 그리고 윤회(이세 타르당마스켈리에)
8. 죽은 자와의 대화는 가능한가?(지오르지아 카스타뇰리)

▲ 아셰트에서 발행된 단테의 <신곡>의 일러스트레이션 1868년    
 
조상과 혼백, 그리고 저승
 
예나 지금이나 아프리카와 아시아의 전통문화에서는 저승과 이승이 서로 밀접한 관계를 맺고 있다.
 
가문을 지키는 망자들의 넋을 기림으로써, 거대한 삶의 주기가 끝없이 반복되는 것이다.
 
부활의 개념이 등장하기 이전, 성서시대의 히브리 민족은 영혼의 불멸을 믿지 않았다. 인간은 다른 모든 생물처럼 필연적으로 흙으로 되돌아가기 마련이다. 예컨대 죽은 자는 ‘셰올(Sheol)’이라는 어둡고 적막한 지하세계로 가는데, 이승과 완전히 분리된 이곳에서 영원토록 머문다. 기원전 알렉산드리아의 유대인들은 성경을 그리스어로 번역할 때 ‘하데스’라는 단어로 이 셰올을 지칭했다. 고대 그리스인들 또한 죽은 자는 부활의 희망 없이 지하세계를 떠도는 운명에 처한다고 생각했다. 그들은 저승세계의 주인인 하데스 신에게 전혀 예배를 드리지 않았는데, 하데스라는 이름이 의미하듯 ‘보이지 않는’ 신인 셈이었다. 신에게 근접한 지위로 승격된 일부 위대한 영웅들만이 이 저승으로 가는 죽음의 운명을 벗어날 수 있었다.
 
로마인들 또한 사자의 세계를 지하 깊은 곳에 마련해뒀다. 다른 여러 도시와 마찬가지로 로마에서는 이러한 믿음이 ‘Mundus(구덩이의 형태를 띤 무덤의 일종. 라틴어로 ‘세계’라는 뜻-역주)’에 반영됐다. 구덩이를 흙으로 채운 뒤 그 위에 ‘Inferni(지옥)’의 문을 상징하는 거대한 돌을 올렸는데, 이 ‘지하 공간’은 음산하고도 불길한 장소였다. 로마인들은 죽은 자들이 이승으로 돌아오는 것을 겁냈기 때문에, 무덤 앞에 음료나 음식을 갖다놓는 ‘헌주’ 같은 의식을 거행해 그런 일을 막으려 했다. 이러한 관습은 4세기에 성 아우구스티누스가 비난했던 것처럼 로마세계에서 오래도록 지속됐다.
 
산 자들의 빚
 
그러나 로마에서 망자가 그저 음산한 망령만을 의미하지는 않았다. 역사학자 미셸 메슬랭(Michel Meslin, 1926~2010)은 다음과 같이 강조했다.
 
“로마인들의 조상 숭배에는 무엇보다도 사회학적인 측면이 있다. 조상의 초상화를 보존해뒀다가 그 해의 중요한 행사 때 그것을 들고 행진했는데, 이는 사회 운영의 기반이 되는 가치들을 정립시켰던 선조를 기리는 행위였다. 선조들은 제 가치를 입증해낸 질서의 책임자로서 가문의 연속성을 강조하는 역할을 했는데, 각 가문은 해마다 치러지는 ‘사랑하는 가족(Cara cognatio)'이라는 행사에 모습을 드러냈다. 이 행사는 기독교 문화에서 만성절의 차원으로 제정된 성인 및 순교자 숭배의식에 강한 영향을 주었던 것이 분명하다.”
 
오늘날에도 여전히 아프리카 전통문화는 저승과 밀접한 관계를 유지한다. 인류학자 장피에르 도종은 이렇게 설명한다.
 
“가문은 때때로 여덟 세대 전까지도 거슬러 올라가는 족보에 올라가야만 존재할 수 있다. 따라서 산 자는 죽은 자에게 빚을 지고 있는 셈이며, 이런 식으로 망자들은 이승세계에 포함된다. 게다가 이러한 애니미즘적 사고방식에 따르면, 인간은 조상의 세계를 비롯해 귀신이나 신의 세계가 진정으로 분리되지 않는 전체 세계의 일부다. 어떻게 보면 조상들이 산 자들을 지배하는 셈이다. 예컨대 사고, 질병, 가뭄 같은 사건은 산 자들이 제사의 의무를 게을리 한 것에 대해 조상의 영혼이 분노해서 일어난다고 여긴다.”
 
그렇지만 모든 망자가 전부 후손의 숭배를 받는 조상이 되지는 않는다. 많은 이들, 특히 여성들은 무(無)로 돌아간다. 중대한 과오를 저지른 이들, 특히 주술을 행한 이들에게도 같은 운명이 예정된다. 이 중 억울하게 누명을 썼다고 생각하는 일부 조상들은 되돌아와 산 자들을 괴롭히기도 한다고 믿어진다. 이처럼 영혼이 모습을 드러낸다는 개념을 이해하려면, 여기서 말하는 인간이란 육과 영의 결합이 아니라 생기, 숨, 영혼이나 혼령, 행운이나 불운의 운명 등 수많은 구성요소가 모여 만들어진 결과라는 점을 고려해야 한다. 언젠가는 죽고 마는 이 구성요소들이 만나 기이하게 결합한 결과이지만, 그중 혼령이나 생기 같은 일부 요소는 계속 살아남아 산 자의 세계에 모습을 드러내는 것이다.
 
생에 대한 찬가, ‘효심’
 
극동에서 조상숭배는 여전히 뿌리 깊게 남아 있다. 특히 중국에서는 이처럼 조상을 숭배하는 마음을 ‘효심’이라고 지칭한다. 중국학자 시릴 자바리는 이렇게 설명한다. “효심이라는 표현은 유대관계에 대한 심원한 감정을 나타낸다. 그리고 여기서 첫 번째 의무는 조상들에게 계보의 존속을 보장하는 것이다. 사실 진정한 ‘숭배’와는 좀 다른데 의식을 거행하는 사제도, 교리도, 신전도 없기 때문이다. 생에 대한 찬가인 셈이다.”
 
여전히 대중적인 위치를 점하는 이 애니미즘적 전통에서, 망자는 진정으로 죽은 것이 아니다. 보이지 않는 영혼의 세계에서 살고 있는 것이다. 이 믿음은 봄이 오는 4월 시행하는 ‘성묘’에서 가장 크게 드러난다.
 
상당히 유쾌한 분위기의 이 가족행사는 죽음보다는 삶의 연속성에 좀 더 무게가 실려 있다. 무덤 앞에 보자기를 펼쳐놓고 그 위에 음식과 음료를 늘어놓는다. 이승과 저승을 오가게 해주는 힘이 있다는 향을 피워놓고 지난해의 중요한 일들을 조상에게 이야기 한다. 그러면 조상들의 영혼이 후손 덕분에 원기를 회복한 뒤, 보이지 않는 세계, 저승으로 되돌아가 삶의 주기를 평온하게 이어나갈 수 있다. 그리고 이 저승은 이승과 상당 부분 유사하다. 장례식에서는 망자의 몸에 저승길 가는 노잣돈을 넣어준다. 주로 ‘Hell Bank Note’라는 검인이 찍힌 형태의 화폐가 대부분인데, 이 화폐에는 냉장고, 텔레비전, 비디오 같은 현대세계의 안락함을 상징하는 이미지도 새겨져 있다. 때로는 ‘저승궤’까지 넣어주어 구색을 맞추는데, 이 궤 안에는 모조보석이나 심지어 모조휴대폰이 들어 있기도 하다.
 
중국인들은 저승의 삶이 영원한 것이 아니라, 거대한 삶의 주기 중 보이지 않는 국면을 지나는 중이라고 생각한다. 또한 ‘조상의 환생’이라는 개념도 있다. 조상묘에서는 가장 오래된 조상이 다섯 세대를 넘어가지 않으며, 다섯 세대를 넘어간 조상은 새로운 망자에게 자리를 내준다. 묘가 치워진 조상의 초상화는 불태우고, 그 조상의 이름은 다음에 태어나는 아이에게 물려준다. 이렇게 해 그 가문에 주어진 기(氣)의 총량은 그대로 유지되며, 이승에서 각 개인이 지닌 기는 일시적인 수단에 불과하다.  
(글·세르주 라피트·신학자, 번역·박나리 karsella@naver.com· 연세대에서 불문학 및 국문학 전공. 한국외국어대 통번역대학원 졸업. 저서로 <세금혁명>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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