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르몽드 디플로마티크 특집 ‘사후세계’ 7

르몽드 디플로마티크 편 | 기사입력 2017/03/07 [06:04]
환생과 부활, 그리고 윤회

르몽드 디플로마티크 특집 ‘사후세계’ 7

환생과 부활, 그리고 윤회

르몽드 디플로마티크 편 | 입력 : 2017/03/07 [06:04]
르몽드 디플로마티크(http://www.ilemonde.com) 특집 ‘사후세계’ 7
 
<게재 내용>
1. 잘 죽는 법, 통과의례에 관한 성찰(장 필립 드 토낙)
2. 영혼의 저울질, 삶의 인과응보(세르주 라피트)
3. 영생을 위한 통행증, ‘사자의 서(書)’(플로랑스 컹탕)
4. 티베트 불교의 내세(로랑 데아예)
5. 내세를 결정하는 고인의 미덕(세르주 라피트)
6. 조상과 혼백, 그리고 저승(세르주 라피트)
7. 환생과 부활, 그리고 윤회(이세 타르당마스켈리에)
8. 죽은 자와의 대화는 가능한가?(지오르지아 카스타뇰리)
▲ 티베트 불화 가운데 12윤회도.    
 
환생과 부활, 그리고 윤회
 
죽고 다른 형태로 다시 태어났다가, 마침내 해방되는 것. 이것이 바로 우주를 거쳐 가는 영혼의 파란만장한 일대기다. 특히 이러한 구조는 인도의 세계관에서 두드러지게 나타난다. 인간이 이 영원한 윤회의 고리에 속박돼 있다면, 여기서 완전히 벗어날 방법은 선행을 되풀이하는 것 뿐이다.
 
환생 개념은 일반적으로 인도사회와 연관돼 있다. 특히 다른 어느 곳보다도 인도의 갠지스 유역에서 가장 폭넓게 나타나고 있다. 그렇지만 모든 인간문화에 나타나는 다양한 신앙의 인류사에서 사후의 삶과 이승으로의 회귀는 아주 중요한 위치를 점하고 있다. 이 개념에 관련된 용어가 매우 풍부하다는 점이 이를 입증한다. 한 몸에서 다른 몸으로 옮겨간다는 뜻의 ‘Transmigration(윤회)’, 영혼의 상태에서 육체로 되돌아오는 ‘Réincarnation(환생)’, 각각 영혼(그리스어로 psyche)의 관점이나 육체(그리스어로 soma)의 관점에서 이 과정을 구체적으로 명시하는 ‘Métempsychose’와 ‘Métensomatose’ 등이 그 사례다. 이러한 다양한 용어로 미뤄볼 때, 그리스신화나 힌두교, 불교 등 다양한 교리가 서로 경쟁해왔지만, 다루는 문제만큼은 보편적이라는 점을 알 수 있다.
 
수많은 아프리카 민족과 아메리카 인디언 부족, 무속신앙을 지닌 아시아 민족 사이에서, 영혼이 수많은 삶, 즉 여러 개의 육체를 거친다는 생각은 상당히 자연스럽다. ‘변신의 인류학’의 영향을 받은 이 민족들은 자신들이 ‘열린’ 육체 속에서 살아간다고 생각하는데, 이 육체는 가장 흔히 인간의 형태를 취하지만 언제나 그렇지는 않다. 예컨대 무당(샤먼)은 신들린 상태에서 동물 형태로 발현될 수 있다. 클로드 레비스트로스의 인류학서 <슬픈 열대>에서는 보로로 족이 자신의 윤회가 ‘아라라’ 앵무새의 형태로 끝난다고 여겼었다는 점을 보여준다. 보로로 족은 자연의 다양한 생물계를 순회하며 자신의 가능성과 운명을 실현시키며, 이러한 ‘여행’의 치밀한 그물망은 인간과 동식물 간에 일종의 연대의식을 만들어준다.
 
팜필리아의 에르 이야기
 
<국가>의 말미에서 플라톤은 오르페우스교 혹은 피타고라스교 관련 민간전설로 보이는 팜필리아 출신의 에르 이야기를 소개한다. 전장에서 목숨을 잃고 나서 2주 뒤 부활한 에르라는 사나이가 저승에서 본 기이한 광경을 설명하는 이야기다. 그는 망자의 영혼이 심판받는 광경을 목격했고, 이 영혼이 누린 삶이 선했는지 악했는지에 따라 두 갈래 중 하나를 택해 길을 가는 모습을 봤다. 영혼은 천 년 동안 속죄하거나 천복을 누린 후, ‘필연성의 여신’ 앞으로 끌려온다. 여신은 모든 가능성이 열려 있는 가운데 다음 삶을 선택할 기회를 준다. 영혼은 보통 비이성적인 방식으로 선택한다. 탐욕에 이끌려 가장 선망하는 운명으로 향하기도 하고, 그와 정반대 운명, 즉 과거에 이미 경험했지만 불행으로 이어졌던 운명을 택하기도 한다. 어쨌든 선택은 되돌릴 수 없지만, 영혼들은 ‘망각의 강’ 레테강의 물을 마시기 때문에 기억을 잃는다. 이후 “이 영혼들은 상위의 공간에서 출생지를 향해 떨어진 후, 별처럼 돌연 나타난다.”
 
삼사라(Samsara)와 모크샤(Moksha)
 
기이하게도, 오르페우스교와 피타고라스교 같은 - 비록 이 교리들만의 공식적인 흔적은 매우 드물긴 하지만 - 일부 고대 그리스종파들은 이와 비슷하게 영혼이 우주를 떠돌며 여행한다고 여겼다. 고대 최후의 위대한 신플라톤주의 철학자 프로클루스는 저서 <플라톤의 국가에 대한 논평>에서 오르페우스는 “영혼이 한 생에서 다른 생으로 옮겨가며, 보통 그 영혼은 인간의 몸으로 들어간다”고 말했지만, “인간의 영혼이 다른 종의 생물로 이동하는 현상” 역시 존재한다고 공공연히 가르쳤다고 주장했다. 결국 전 세계 어디에나, 조상이 후손의 몸에서 다시 태어나 세대를 초월하는 생명사슬의 연속성을 보장한다는 믿음이 존재했던 셈이다. 그리고 보통 이 연속성은 같은 이름, 비슷한 외모나 성격에서 오는 유사성으로 표현됐다. 이런 식이라면 증손자는 죽은 증조부의 환생처럼 여겨질 것이다.
 
철학 경전 <카타 우파니샤드>에서는 “깨달음을 얻지 못한 인간은 윤회의 고리로 떨어지나, 깨달음을 얻은 인간은 더는 다시 태어나지 않는 곳에 이르게 된다”고 말한다. 인도의 이 위대한 철학서는 기원전 1천년 중반에 인더스·갠지스강 유역에서 공통적으로 나타났던 신앙을 요약해놓았다. 한편, 같은 시대에 부처는 위대한 명상으로 지혜의 문을 연 다음 이렇게 확신했다. “수도자여, 윤회의 고리를 이끄는 것이 바로 갈증(욕망)이라는 사실이야말로 고통의 기원에 관한 성스럽고 숭고한 진실이다.” 그로부터 15세기 후, 인도의 경전 <요가바시스타>에 등장하는 완벽한 왕자 라마는 이렇게 탄식했다. “우리는 이승의 삶에서는 휴식을 찾을 수 없다. 이승의 삶은 윤회라는 거대하고 어두운 구름에 잠시 비쳤다 사라지는 섬광에 불과하다. (…) 운명의 바다 한복판에서, 윤회라는 소용돌이에 사로잡힌 우리 몸은 거품으로 사라진다.” 이 세 인용문은 힌두교와 불교에서 핵심이 되는 삶과 죽음, 저승의 개념을 설명한다. 이 개념은 ‘삼사라(영원한 회귀)’, ‘카르마(업보)’, ‘모크샤(해탈)’이라는 세 산스크리트 단어로 요약될 수 있다.
 
존재의 수레바퀴
 
개인은 감각계와 인간의 조건을 좌우하는 힘들의 결합뿐 아니라, 그러한 것들의 전반적인 환경 속에 사로잡혀 있다. 그리고 이를 인도에서는 ‘삼사라’라는 산스크리트 단어로 지칭한다. ‘흐르다’라는 의미의 동사에 기반을 둔 이 단어는 ‘끝없이 제자리로 되돌아오며 영원히 흐르는 이미지’를 지녔다. ‘삼사라-차크라’ 혹은 ‘만다라’는 ‘존재의 수레바퀴’, ‘삼사라-사무드라’는 ‘존재의 바다’라는 뜻이다. 우파니샤드 문헌 중 하나인 <요가타트바 우파니샤드>에는 이렇게 적혀 있다. “아이는 제 어미의 젖을 빨며 기뻐하는데, 과거 삶에서 빨았던 것과 같은 젖이기 때문이다. 남자는 제 아내의 자궁 속에서 쾌락을 느끼는데, 과거 삶에서 자신을 잉태해줬던 바로 그 자궁이기 때문이다. 과거 어머니는 현재의 아내이며, 현재의 아내는 훗날 어머니가 될 것이다. 과거 아버지는 현재의 아들이며, 현재의 아들은 훗날 아버지가 될 것이다. 이처럼, 인간은 ‘삼사라’로 인해 흡사 물레방아의 물받이통 같은 존재가 된다.”

비록 이 글에서처럼 삶의 기쁨이 수없이 많다 하더라도, 철학적 분석에서 우선시되는 것은 인간을 옥죄는 순환논리가 ‘삼사라-두카’, 즉 ‘존재의 고뇌’라는 거대한 괴로움을 야기한다는 사실이다.
 
‘결실을 맺는’ 행위
 
이 ‘삼사라’의 영구성을 전생의 소행에 따른 법칙, 혹은 ‘카르마(업보)’라는 단어로 설명하는데, 카르마라는 단어는 곧잘 서양에서 결정론적 맥락의 단어인 ‘운명(Destiny)’의 동의어로 부적절하게 사용된다. 카르마는 인간의 모든 행위를 가리키는 동시에, 이 행동이 이뤄진 순간부터 그 결과까지를 모두 지칭한다. 어느 인도어 표현에 따르면, 모든 행위는 ‘결실을 거두기’ 마련이다. 그런데 이 ‘결실’은 비단 물질적이거나 경제적인 것뿐이 아니라, 심리적이고 형이상학적인 것도 가리키며, 죽어도 끊어지지 않는 치밀한 인과사슬 속에 영속된다. 사실상 욕망의 역학에 따라 행위가 이뤄지며, 그 결과와는 무관하게 바로 이 욕망이 ‘결실을 낳는’ 셈이다. 욕망 속에서 작용하는 악의는 부정적인 카르마를 유인하며 욕망 속의 도덕적인 통제심은 긍정적인 카르마를 유인한다. 따라서 미래의 운명은 현재에 행해지는 것이며, ‘좋은’ 카르마와 ‘나쁜’ 카르마 간의 균형 변화에 좌우되는 셈이다.
 
힌두교와 불교는 이 역학을 실행한 인간이 죽은 후에도 이 역학이 살아남는 방식을 각기 다르게 설명한다. 힌두교의 교리에 따르면, ‘아트만’ 즉 영원하며 고통을 느끼지 않는 ‘자아’는 또 다른 정신적-육체적 존재로 옮겨가, 태어나 죽고 또 태어나길 반복하는 것이다. 반면 불교에서는 인간이 생각할 수 있는 여러 환영 중, 여러 존재를 거쳐 여행을 하는 항구적 ‘자아’라는 개념이 가장 해롭다고 본다. 이것은 ‘아나타’라는 개념인데, 아나타는 ‘자아가 없다’, 즉 ‘비아(非我)’를 의미하는 단어다. 모든 생물은 죽은 뒤 자신을 구성했던 이질적인 여러 요소(‘온’, Skandha)로 분해되지만, 이 요소들은 다른 곳에서 또 다른 인간, 동물, 신적 존재(불교에서는 신의 상태 역시 일시적이라고 보기 때문에)를 재구성하는 에너지의 원동력이 된다.
 
(글·이세 타르당마스켈리에·파리4대학 종교연구소 회원, 파리가톨릭대학 부설어학원 교사. <10억의 힌두교도, 역사, 신앙, 변화(Un milliard d'hindous, histoire, croyances, mutations>, Albin Michel, 2007.의 저자.
번역·박나리 karsella@naver.com·연세대에서 불문학 및 국문학 전공. 한국외국어대 통번역대학원 졸업. 저서로 <세금혁명> 등이 있다.)
 
<해탈의 길>
 
기원전의 산스크리트어 문헌 <가르바 우파니샤드>, 즉 태아에 관련된 우파니샤드 문헌에는 태아가 제 어미의 태중에서 말을 하는 장면이 나온다. 태아는 자신의 지난 삶들을 떠올리며 이승에서 다시는 태어나지 않기 위한 모든 해탈의 방법을 수행하겠다고 다짐한다. “‘나는 과거 수천 개의 자궁을 봤고 수많은 음식을 먹었으며 수없이 많은 젖을 마셨다. 태어나고 죽기를, 출생과 죽음을 수없이 거듭했다. (…) 자궁에서 벗어난다면, 나는 마헤슈바라(시바 신)께로 피신할 터이다. (…) 자궁에서 벗어난다면, 나라야나(비슈누 신)께로 피신할 터이다. (…) 자궁에서 벗어난다면, 상키아 요가에 전렴하리라. (…) 자궁에서 벗어난다면, 영원한 브라만(힌두교에서 우주의 근본원리를 가리키는 용어-역주)에 관해 명상하리라.’ 그러나 태아는 자궁문에 이르러 태어나자마자 자신의 수많은 출생과 죽음의 기억들을 잃어버린다.”
 
<대가의 윤리>
 
불교와 힌두교는 아주 복잡한 도식들로 서로 방향이 갈라지지만, 적어도 두 가지 핵심적 개념만큼은 공유한다. 먼저, 영원불멸한 영적 원칙(아트만)이 실제든 아니든, 긍정적인 ‘결실’을 맺기 위한 행위를 이승의 삶에서 전부 해야 한다. 이 필연성은 모든 인간에게 공통적으로 적용되며 이해하기 쉬운, ‘대가의 윤리’를 정당화한다. ‘이 세상의 인간’에게는 하나의 길이 있는데, 즉 ‘다르마’라는 이름의 ‘우주의 질서’라는 전체 틀 안에서 자신의 의무를 정확히 완수하는 것이다. 이러한 참여방식은 각 개인의 존재에 의미를 부여하며, 모든 개인을 제례와 기부에 기반을 둔 연대적 네트워크에 연결시키는 역할을 한다. 왕족이든 평민이든, 여성이든 불가촉천민이든, 독실하고 고결하기만 하다면 더 나은 삶으로 태어나길 꿈꿀 수 있는 것이다. 인간의 가장 고귀한 욕망에 내재된 항구성이야말로, 영혼이 훗날의 삶을 선택하는 데에, 혹은 새 인격의 주된 특징을 만드는 데에 특별한 영향력을 행사한다고 본다. 인도와 극동 지방에서 인기를 끄는 점성술에서는 태아에게 이 과거의 카르마가 존재함을 인정하며, 별자리로 그 운명을 점친다.
 
그렇지만 ― 이는 불교와 힌두교의 두 번째 공통점이기도 한데 ― 어떤 이들은 자신에게 아예 다른 목적을 부여하기도 한다. 긍정적이든 부정적이든 간에 이 인과사슬에서 완전히 벗어나는 것 말이다. 그들은 일부 수도사나 사제들이 몰두하는 이 카르마의 계산법, 환생의 회계법을 조롱하기도 한다. ‘모크샤(해탈)’ 혹은 ‘니르바나(열반)’는 ‘삼사라’의 순환논리를 벗어나는 계획을 말한다. 더는 이승으로 되돌아가지 않는 것, 이것이야말로 힌두교에서 ‘살아 있는 해방된 자’를 뜻하는 ‘지반무크타(jivanmukta)’, 그리고 불교에서 ‘지혜로운 존재’를 뜻하는 ‘보살’이 목표하는 바다.
 
<‘일깨우는’ 스승들>
 
지반무크타에 이르면 ‘아트만’이 자신의 마지막 인간 육체를 경험한다. 거의 완전히 투명해진 육체와 자아가, 범인들의 몸에서 흐려졌던 아트만의 빛을 환히 발산시킨다. 보살은 만물의 본성을 직관적으로 이해한 뒤 모든 생물에 연민을 지니는데, 더 많은 중생을 이끌고 일깨우고자 ‘열반’에 이르는 것을 늦추기로 마음먹는다. 따라서 이 둘은 전부 영적 스승이자 구원자의 역할을 하는 셈이다. 부처나 샹카라, 라마누잔, 라마나 마하르쉬처럼, 이들이 이 세상에 태어난 것은 단지 완전한 해탈이 모든 이에게 손닿을 거리에 있다는 사실을 자신의 경험으로 알려주기 위해서, 그리고 해탈하는 방법을 가르쳐주기 위해서다. 영혼이 자신의 진정한 본성, ‘자아’ 혹은 ‘공(空)’을 지각하도록 이끄는 ‘일깨우는 자’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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