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고

(韓日對譯)‘洞察!天問天答’(不滅の自覺)質問13

眞鏡 | 기사입력 2018/04/23 [05:43]
宗教的に言っている「霊魂」は、近いうちに必ず消える「今の私」に過ぎません。

(韓日對譯)‘洞察!天問天答’(不滅の自覺)質問13

宗教的に言っている「霊魂」は、近いうちに必ず消える「今の私」に過ぎません。

眞鏡 | 입력 : 2018/04/23 [05:43]
(질문13) 진경님께서 공유하고자 하시는 ‘깨달음’이라는 것은 어떤 것입니까?    

(質問13)眞鏡さんが共有しようとしている「悟り」というものは、どのようなものですか。
    

‘지금의 나’의 관점에서 ‘깨달음’은 꿈속의 꿈과 같다고 할 수가 있습니다. 왜냐하면 ‘지금의 나’는 단지 내가 ‘나’에 대해서 추측하는, 즉 육체와의 동일시에 불과하기 때문이며, 태생적 한계로 인해서 ‘스스로’일 수가 없기 때문입니다.     

「今の私」の観点で「悟り」とは、夢の中の夢のようなものであるといえます。なぜなら、「今の私」は、単に「私」に対して推測する、即ち、肉体との同一視に過ぎないからであり、生まれながらの限界による「自ら」であることができないからです。    

따라서 ‘지금의 나’로서 깨어나는, 즉 ‘나는 무엇이며, 누구이다’의 ‘깨달음’은 상상에 불과하며, ‘지금의 나’라는 꿈을 깨는 것이, 즉 비동일시로 인한 ‘아무것도 아닌 나’로 깨어나는 것이 합당하며 타당하다 할 수가 있습니다. 즉 ‘지금의 나’가 꿈을 깨는 것이 아니라, ‘지금의 나’는 의식적인 죽음을 통해서 사라지고 소멸되어 버리는 것이 타당하며, 의식적인 죽음과 동시에 꿈이 깨어지며 잠을 깨는 것입니다.    

したがって、「今の私」として目覚める、即ち、「私は何であり、誰である」の「悟り」は想像に過ぎず、「今の私」という夢を覚ますこと、即ち、非同一視による「何でもない私」として目覚めることが適切であり妥当であるといえます。即ち、「今の私」が夢を覚ますのではなく、「今の私」は意識的な死を通して消えて消滅してしまうのが妥当であり、意識的な死と同時に、夢が覚めることになり、眠りを覚ますことです。    

(질문) ‘지금의 나’, 즉 ‘나는 무엇이며, 누구이다’의 꿈을 깨는 것이라면, 성직자와 사람들이 말하고 있는 영혼은 무엇이며, 영혼마다 어떤 차이가 있기 때문에 ‘영혼들’이 될 수가 있습니까?    

(質問)「今の私」、即ち、「私は何であり、誰である」の夢を覚ますことであれば、聖職者と人々が言う霊魂とは何であり、霊魂毎に何の違いがあるから「霊魂」となることができますか。
    

생각의 차이를 통해서 서로의 차이가 결정되며, 그렇게 결정되어진 것을 ‘영혼’으로 본다고 할지라도, ‘나는 무엇이며, 누구이다’의 범주 안에 있는 것입니다. 즉 영혼은 단지 내가 ‘나’라고 여기는 ‘생각의 다발’에 불과하며, 어떤 상층의 영혼이라 할지라도 결국은 내가, 즉 ‘나’가 만들어내는 이데아, 즉 관념에 불과할 뿐입니다.    

考えの違いを通して、お互いの違いが決定され、そのように決定されたことを「霊魂」として見るといっても、「私は何であり、誰である」の範疇の中にあるのです。即ち、霊魂は、単に私が「私」であると考える「考えの束」に過ぎず、どんな上層の霊魂であっても、結局は、私が、即ち、「私」が作り出すイデア、即ち、観念に過ぎません。    

따라서 사람들이 종교적으로 말하고 있는 ‘영혼’은 가까운 시일 내에 반드시 사라질 ‘지금의 나’에 불과합니다.    

したがって、人々が宗教的に言っている「霊魂」は、近いうちに必ず消える「今の私」に過ぎません。    

(주석)
이데아(idea) ― 인간의 주관적인 생각이며, 관념을 나타내는 말로 사용된다.    

(注釈)
イデア(idea) ― 「人間の主観的な考えであり、観念を表す言葉として使用される。」    

(질문) 저도 적정한 때에, 진경님과 같이 ‘깨달음’의 길을 선택하고 싶습니다.    

(質問)私も適正なときに、眞鏡さんのように「悟り」の道を選択したいです。
    

절대 도달하지 못할 것이며, 절대 깨어나지 못할 것이며, 절대 알지 못할 것입니다.

왜냐하면 제가 말씀드리는 이야기는, ‘삶’을 살아가면서 수없이 많은 선택의 기로에서, 선택할지 말지를 두고 갈등하는 ‘무엇’이 아닙니다. 살아오면서 또는 살아가면서 ‘종교’는 선택할 수가 있습니다. ‘국가’도 선택할 수가 있습니다. 성향도 취미도 마찬가지입니다. 반려자도 선택할 수가 있으며, 하고 있으며 하고자 하는 사업도 선택할 수가 있습니다. 그러나 자기 자신만큼은 선택의 문제가 아니기 때문입니다.    

絶対に到達しないものであり、絶対に目覚めることはできず、絶対に知ることができません。なぜなら、私がする話は、「生」を生きていきながら、数え切れない程多くの選択の岐路で、選択するか否かを挙げて葛藤する「何か」ではありません。生きながら、または生きていきながら、「宗教」は選択することができます。「国家」も選択することができます。性向も趣味も同様です。伴侶も選択することができ、選択しており、希望する事業も選択することができます。しかし、自分自身の分だけは選択の問題ではないからです。    

(질문) 지금까지 저는 ‘깨달음’을 선택의 문제로 받아들였습니다.    

(質問)今までに、私は「悟り」を選択の問題として受け入れました。
    

종교적인 측면에서 출발한 수많은 ‘수행자’들이 있지만, 그들 모두는 은연중이든 의도적이든 선택을 했으며, 선택을 하는 이면에는 ‘깨달음’이라는 거창한 목표와 목적이 설정되어 있습니다. 어떤 존재적인 측면에서, 내가 깨달음에 대한 관심을 갖고서 ‘그것’을 얻기 위해서, ‘삶’을 살아가는 동안에 새로운 설정, 즉 목표와 목적이 되어 버렸기 때문에 지금까지 그렇게 많은 분들이 ‘자기 자신’에 대해서 바로 알지를 못했던 것입니다. 자기가 ‘스스로’ 자기를 바로 아는 앎, 즉 ‘자기 앎’은 목적도 아니며 목표도 될 수가 없습니다.    

宗教的な側面から出発をした数多くの「修行者」がいますが、彼らはすべてそれとなくであれ、意図的であれ、選択をし、選択をする裏面には「悟り」という途方もない目標と目的が設定されています。ある存在的な側面で、私が悟りに対する関心をもって、「それ」を得るために、「生」を生きていく間に、新しい設定、即ち、目標と目的になってしまったため、これまでそのように多くの方々が「自分自身」について正しく知ることができませんでした。自分が「自ら」自分を正しく知る知、即ち、「自己知」は、目的でもなく目標にもなることができません。    

따라서 자기 자신에 대한 공부는 선택의 문제가 아니라 당연하여야 하며 당연함이 상식이 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어떻게 내가 ‘나’를 아는 것이 ‘선택’의 문제일 수가 있습니까?    

したがって、自分自身に対する勉強は、選択の問題ではなく、当然でなければならず、当然さが常識とならなければならないのです。どうしたら私が「私」を知ることが「選択」の問題であり得ますか。    

천 년을 살 수 있다 할지라도 ‘자기 자신’을 알지 못하면 그 천 년의 ‘삶’은 누구의 ‘삶’이겠습니까? 수천억 부귀가 있다 할지라도 ‘자기 자신’을 알지 못하면 그 수천억 부귀는 누구의 부귀겠습니까? 단 하루를 살아간다 할지라도 정신 차린 ‘나의 삶’이 더욱 소중한 것입니다. 단 한 푼이 없다 할지라도 정신 차린 ‘나’가 더 소중한 것입니다.    

千年を生きることができるとしても、「自分自身」を知らなければ、その千年の「生」は誰の「生」でしょうか。数千億の金持ちがいるとしても、「自分自身」を知らなければ、その数千億の金持ちは誰の豊かさですか。ただ一日を生きていくとしても、精神をしっかりした「私の生」がもっと大切なものです。ただ一銭がないとしても、精神をしっかりした「私」がもっと大切なのです。    
  • 도배방지 이미지

많이 본 기사
모바일 상단 구글 배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