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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韓日對譯)‘洞察!天問天答’(不滅の自覺)質問29

眞鏡 | 기사입력 2018/08/20 [07:16]
今の私」は「私」の影に過ぎず

(韓日對譯)‘洞察!天問天答’(不滅の自覺)質問29

今の私」は「私」の影に過ぎず

眞鏡 | 입력 : 2018/08/20 [07:16]
(질문29) 불가에서 ‘증지소지비여경’, 즉 ‘깨달은 지혜로 알 뿐이지 다른 경지와 경계가 아니다’라는 말이 있습니다. 이 말도 결국은 체험되고 경험되는 것이 아니라, 오직 ‘지성적인 이해’를 가리키고 있습니까?    

(質問29)仏家で「證智所知非餘境」、即ち「悟った知恵として知っているに過ぎず、他の境地との境界ではない」という言葉があります。この言葉も結局は体験され、経験されているのではなく、ただ「知性的な理解」を指していますか。
    

고요와 정적으로 대변될 수가 있는, ‘있음’도 아니며, ‘없음’도 아닌, 절대적이면서도 아무것도 아닌, 모든 것을 유발하는, ‘시작’이 ‘시작’되기 이전을, 어떻게 경험하고 체험할 수가 있겠습니까? 그리고 ‘그것’이 어떻게 바로 자기 자신으로서, ‘깨어남―깨어 있음―깨달음’이 경험되어질 수가 있겠습니까?

만약에 어떤 수행자나 종교인이, ‘진리’와 ‘도’를, 경험과 체험을 통해서 깨우쳤다고 한다면 모순일 수밖에 없습니다. 왜냐하면 ‘진리와 도’는 ‘지금의 나’로 인해서 대상화될 수가 없기 때문입니다. ‘지금의 나’는 ‘나’의 그림자에 불과하며, 그림자가 어떻게 주체의식을 갖고서 ‘진리와 도’, 즉 ‘나 자신’을 대상화시킬 수가 있단 말입니까?    

静けさと静寂に代弁することができる「有」でもなく「無」でもない、絶対的でありながらも何でもない、すべてを誘発する「始まり」が「始ま」る以前を、どのように経験して体験することができますか。そして、「それ」がどのように正しく自分自身として、「目覚め - 目覚めていること - 悟り」が経験されることがあり得ますか。

もしどんな修行者や宗教家が「真理」と「道」を、経験や体験を通して悟ったというなら、矛盾でしかありません。なぜなら「真理と道」は「今の私」によって対象化されることができないためです。「今の私」は「私」の影に過ぎず、影がどのように主体意識をもって「真理と道」、即ち「私自身」を対象化させることができるのかということです。    

따라서 깨어나는 것입니다. 즉 지금까지 ‘나’라고 여기고 있던 ‘지금의 나’는 의식적인 ‘죽음’을 맞이함과 동시에 소멸되고, 더 사실적이며 더 참다운 ‘나’로 거듭나는 것입니다. 그러니 참다운 ‘지성적 이해’는, 거짓된 ‘지성적 오해’가 걷어지고 난, 새로운 ‘거듭남’입니다.    

だから、目覚めることです。即ち、今まで「私」であると考えていた「今の私」は、意識的な「死」を迎えると同時に消滅し、より事実的で、より真の「私」に生まれ変わるのです。だから、真の「知性的理解」は、偽りの「知性的誤解」が晴れた、新しい「生まれ変わり」です。    

(질문) 경험의 주체로서, ‘지금의 나’는 꿈이라고 하셨습니다. 그리고 ‘지금의 나’가 인식하고 지각하는 모든 것이 또한 꿈이라고 하셨습니다. 그렇다면 제가 할 수 있는 것은 무엇입니까?    

(質問)経験の主体として、「今の私」は夢であるとおっしゃいました。そして「今の私」が認識して知覚するすべてもまた夢であるとおっしゃいました。そうであれば、私ができることは何ですか。
    

꿈꾸기를 멈추고 잠에서 깨어나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렇게 할 수가 있으며, 그렇게 할 수 있는 이유는 ‘님’께서 꿈을 꾸고 있기 때문이며, ‘님’께서 꿈을 꾸고 있다는 말은, 비록 지금은 의식의 초점이 ‘지금의 나’에 맞춰져 있으므로 해서, 꿈속에서 사건과 상황에 맞닥뜨리는 하나의 배역에 불과하지만, 배역도 사건도 상황도 모든 것이 ‘님’의 뜻이자 의지이자 ‘님’의 마음먹기에 따라서 전개되어지고 있다는 것입니다.

따라서 ‘지금의 나’는, 의식적으로 ‘죽음’을 받아들이는 것이 최선입니다.    

夢見ることを止めて眠りから目覚めることです。そして、そうすることができ、そうすることができる理由は、「あなた」が夢を見ているからであり、「あなた」が夢を見ているということは、たとえ今は意識の焦点が「今の私」に合わされているため、夢の中で出来事や状況に出くわす一つの配役に過ぎませんが、配役も出来事も状況も、すべてが「あなた」の志であり、意志であり、「あなた」の心持ちに応じて展開されているということです。

したがって、「今の私」は、意識的に「死」を受け入れることが最善です。    

(질문) ‘아무것도 아닌 것이 되어라’라는 말씀을 자주 하십니다.    

(質問)「何でもないものになりなさい」というお話をよくされます。
    

왜냐하면 ‘아무것도 아닌 것’에서 ‘아무것’, 즉 모든 것이 나옵니다. 그러니 ‘무엇’을 상상하고 추측하여, ‘무엇’이 되려고 하지 말고, ‘아무것도 아닌 것’, 즉 ‘존재’ 이전으로, ‘선택’ 이전으로 돌아가야 합니다. 그리고 이렇게 되돌아가는 것이 바로 ‘지성적 이해’라 할 수가 있습니다. 왜냐하면 그것이 바로 ‘나는 무엇이다’, 즉 ‘지금의 나’를 포기하는 것이며 의식적으로 죽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なぜなら、「何でもないもの」から「何か」、即ち、すべてが出てきます。だから「何か」を想像して推測して「何かになろうとせずに、「何でもないもの」、即ち「存在」以前に、「選択」以前に戻って行かなければなりません。そして、このように戻って行くことが、まさに「知性的理解」であるといえます。なぜなら、それがまさに「私は何である」、即ち「今の私」を放棄するものであり、意識的に死ぬことであるからです。    

(질문) 세상에는 많은 수행단체가 있으며, 많고 다양한 영적인 경험이 증언되고 있으며, 영적인 체험이 증언되고 있으며, 영적인 능력과 영적인 경지에 이른 수행자가 있습니다.    

(質問)世の中には多くの修行団体があり、多くの多様な霊的な経験が証言されており、霊的な体験が証言されており、霊的な能力と霊的な境地に至った修行者がいます。
    

그러나 그런 것과 상관없이 세상은 돌아가고 있으며, 우주는 끊임없이 ‘무한’을 지향하며, ‘완전’을 지향하며 팽창하고 있습니다.

따라서 ‘진리’는 특정한 영적인 경험과 체험에, 특정한 능력과 경지에 이른 수행자에게 ‘귀속’되어 있는 것이 아닙니다. 모든 것을 드러나게 하며, 모든 것을 유지시키며, 모든 것을 사라지게 하는 ‘진리’는, 이미 드러난 모든 것으로 인해 충분히 증거되어지고 있는 것입니다.    

しかし、そのようなことに関係なく、世の中は戻って行っており、宇宙は絶えず「無限」を志向し、「完全」を志向して膨張しています。

したがって、「真理」は、特定の霊的な経験と体験に特定の能力と境地に至った修行者に「帰属」されているのではありません。すべてを現れるようにし、すべてを維持させて、すべてを消えるように「真理」は、既に現れたすべてにより十分な証拠となっているのです。    

(질문) 어떻게 하면 좋겠습니까?    

(質問)どのようにすれば良いでしょうか。
    

경험하고자 하는 어리석음을 버리고, 체험하고자 하는 어리석음을 버리고, 지성적으로 ‘오해와 이해’의 관계 속으로 깊이 파고들어서 착하고 파하고 통찰하여, 스스로 아는 ‘앎’, 즉 ‘자기 앎’에 도달하십시오. 능히 도달할 수가 있습니다.

왜냐하면 ‘자기 자신’은 그러한 지성조차도 만들어내는 ‘존재’ 이전이자, ‘존재’의 어버이와 같기 때문입니다.    

経験しようとする愚かさを捨てて、体験しようとする愚かさを捨てて、知性的に「誤解と理解」の関係の中に深く掘り下げて鑿うち破って洞察して、自ら知っている「知」、即ち「自己知」に到達して下さい。十分に到達することができます。

なぜなら「自分自身」は、そのような知性さえも作り出す「存在」以前であり、「存在」の親と同じだからで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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