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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불교(증산신앙) 종단의 종교 혼합현상②김형렬의 미륵불교

장정태 논설위원 | 기사입력 2018/11/23 [07:11]
증산의 초기 종도 김형렬의 미륵불은 강증산, 증산 사후 불교 종단으로 설립

한국불교(증산신앙) 종단의 종교 혼합현상②김형렬의 미륵불교

증산의 초기 종도 김형렬의 미륵불은 강증산, 증산 사후 불교 종단으로 설립

장정태 논설위원 | 입력 : 2018/11/23 [07:11]

증산 초기 종도 김형렬의 미륵불은 강증산, 증산 사후 불교종단으로 설립
  

<연재 순서>
①종교적 혼합의 의미와 역사
②김형렬의 미륵불교
③서백일의 용화교
④김계주의 무을교    

미륵불교 창교주 김형렬(金亨烈 號:太雲)은 단기 4195(1862)년 전주군 우림면 하운동에서 태어났다. 어려서부터 한학을 공부하여 한문서숙 선생을 하기도 했다. 1894년 동학군이 서울로 진군할 때 가담했다가 강증산을 만나 그의 도움으로 죽음을 모면하게 되었다. 1902년 4월 증산을 다시 만나 그의 첫 번째 종도가 되었다.

김형렬의 미륵불교에 주요기념일로는 6월 24일(姜甑山 화천일), 9월 19일(姜甑山 탄신일), 2월 1일(甑山이 설립한 설날), 3월 15일(金山寺 창건 기념일)이 있다.    

증산의 초기 종도 김형렬이 증산 사후 하나의 불교 종단으로 설립된 데는 몇가지 교리 외적인 이유가 있다. 인세 강탄전 천상에서 신성․불․보살이 와서 호소했다는 데서 부터, 금산사 미륵 속에 30年간 칩거해 있었다는 사실, 또는 화천전 ‘나를 보고 싶거든 금산사 미륵상을 보라’ 또는 ‘다음 내가 열석자(十三尺二 금산미륵의 신장)로 오리라’고 한 것으로 그 신도들이 불교미륵 하생경에서 말한 미륵보살(후에 부처가 될 것이라고 한다)의 出現이라고 신봉할 소지를 만들고 있다.    

강증산의 사후 맨처음 미륵신앙과 금산사 주재의 꿈을 키우는 증산의 최초의 제자이자 수제자인 김형렬은 증산의 미륵신앙을 연원지워준 최초의 사람이기도 하다.

증산과 김형렬과의 관계는 김형렬의 딸이 증산의 두 번째 부인이라는 인적인 관계에서부터 시작된다. 증산교의 수부로 정식 책립된 것은 김형렬의 딸인 김부인이었다. 왜냐 하면 증산은 천지공사를 마친 다음에 친명을 받들어 본부인인 정부인과 이연함을 선포하고 김부인을 정식으로 책립했기 때문이다.

이런 인적 관계가 하나의 교단성립과는 깊은 관련은 없다. 다만 김형렬이 최초로 하나의 교단을 형성하게 되는 첫째 원인은 차경석과의 갈등원인과 함께 자신에게 증산의 영체가 강림했다는 막연한 확신에서 출발한다.

김형렬(1862-1932)은 증산의 도법을 누구보다도 먼저 알고 가장 알뜰하게 심신을 바쳐 섬겨온 수제자로서, 증산 사망 후 증산의 부인이었던 고씨가 교단을 창설하자 그는 증산의 성령이 자기에게도 하강할 것을 믿고 옮겨다니며 통령공부를 하던 중 스스로 통령을 얻었다고 하면서 자기 집에서 교인을 모아 교파를 형성하였다. 김형렬은 최초의 종도이자 증산의 화천을 본 종도이기도 하다.    

대성께서 화천하시기 전날 형렬에게 업혀서 형렬태운의 집에 가서 누우셨다가 다시 약방으로 돌아오사 이렇게 너댓번 왕복하셨다는 것은 대성께서 태운에게 업히듯이 태운의 집에 누우셨듯이 대성(大聖)의 교법(敎法)이 태운에 의하여 전해지고 밝혀질 것을 뜻하는 것이다.    

김형렬은 스스로 증산의 영체를 받기위한 노력의 일환으로 1915년 봄 모악산 금강대에 올라 100일 동안 수련하여 신안이 열리고 영서를 받았다고 한다. 이 영서는 세상에서 금강대문답이라고 알려졌고, 이로부터 태운에게는 많은 추종자들이 생겼다. 그리하여 세워진 교단은 처음에는 특정한 이름이 붙여지진 않았으나 김태운이 금산사의 미륵불을 영체로 받들었기 때문에 금산사 미륵불을 받드는 종교단체로 알려졌다.

신안이 열린 후 적극적인 선교활동을 하게 된다. 김형렬의 집을 근거지로 약 5년간 천지공사를 행하면서 그의 기행이적이 주위의 많은 사람들에게 전파되어 많은 종도들을 얻게 되었던 것이다.   
▲ 김형렬이 새로운 종단을 세우는 정당성을 금산사의 미륵불의 영험에 근거하고, 금산사의 미륵불을 영체로 받들고 있었기 때문에 미륵종이라고 불렸다.  

그가 새로운 종단을 세우는 자기 정당성을 금산사의 미륵불의 영험에 근거하고, 금산사의 미륵불을 영체로 받들고 있었기 때문에 미륵종이라고 이름하기에 이르렀다. 이처럼 신비경험이 김형렬의 미륵불교 형성의 주요요인을 이루고 있으며, 종도간의 세력갈등과 신성가족의 후광을 입으려는 노력이 그 부차적인 요인들로 나타나고 있다.

김형렬이 현무경을 십이지지에 의한 「물형부」로 판석하고 신자들이 기도수련할 때에 각자의 출생연월에 따라 자생은 자부를 그려서 불사른다든가 또는 일진에 따라 축일에는 축부를 그려서 불사른다든가 하여 물에 타서 먹게 하였다. 이와 같이 물형을 그려 탄부하였기 때문에 이 符를 「물형부」라고 한다.

김형렬 사망 후 유제봉의 ‘용화계’와 ‘증산교금자연파’등 수 개파로 다시 분열되었는데, ‘용화계’는 최선애의 ‘미륵계’로 이어져 1970년 ‘대한불교법상종’으로 개명하여 문공부에 등록되어 있다. 현재 본부는 김제군 금산면 금산리에 있다. 김형렬이 창종한 미륵불교는 증산을 미륵불로 보고 곧 미륵불의 용화회상이 도래될 것을 믿는 증산교였으나, 김형렬의 미륵불교를 이어받아 현재 최선애가 이끄는 종단의 경우 증산을 미륵으로 보면서도 불교에 연맥을 대려고 하고 있다. 그래서 금산사 미륵불을 받들며 경전도 미륵육부경과 금강경, 반야경 등을 내세우면서 대순전경도 함께 사용하고 있다.

본교의 신앙의 대상은 강증산 즉 미륵불이다. 현 본부 불단 정면에는 강증산 영전이 모셔져 있고, 그 후면에는 금산사 미륵불과 같은 모형의 미륵삼존상이 모셔져 있다. 김형렬이 창교한 미륵불교의 종지에 보면 “본종의 본존불은 용화구주이시며 금세 천주이신 자씨 미륵불”이라 하여, “진표율사가 당래불 강세의 비음을 듣고 오랬동안 기원한 끝에 미륵불을 뵙게 되었고 미륵불의 화신인 증산이 이 땅에 강림하게 되었다”고 하는 증산교의 교의와 일치되고 있다. 본교의 초기 교명이 미륵불교 였고, 그 종통을 이었다는 김형렬이 창교한 미륵불교는 교명으로 보면 불교인 것 같으면서도 분명 증산교이다. 이들이 불교에 연맥을 대고 있는 이유는 증산을 바로 미륵불의 화현으로 보고 또 증산이 사망 후 바로 금산사 미륵불상에 그 영체가 머물러 있다고 보기 때문이다. 그러기 때문에 그 기본 사상이나 교리 역시 불교와 연관을 짓고 있다. 초기에는 주로 증산의 가르침에 의존했으나 현재 법상종에서는 불교의 「미륵경」을 함께 공부한다. 초기에서부터 본교에서 특이하게 주장했던 것은 증산이 종도들의 수련시에 주로 가르쳤던 태을주를 별로 쓰지 않고 시천주를 썼고, 또 증산이 그렸던 「현무경」의 부보다 수련하는 신자 각자의 생년지지에 해당하는 동물을 그린 물형부를 날마다 수십장씩 그린 뒤에 그 동물과 각자의 성명을 새긴 4각형의 인장을 찍어서 불사르게 했다.    

법상종은 신라 혜공왕 2년 (1210년)에 진표율사가 변산 월명암에서 천일기도 후 미륵존불과 지장보살의 지시를 받아 모악산하 금산리에 3층 미륵전과 36척 미륵금불을 조성함으로써 비롯된다는 것이다. 고려때 혜덕왕자가 주지로 입사할 만큼 비중이 큰 사찰이 되었다.   

진표율사를 종조로 하는 것은 종사와는 상당히 거리가 멀다고 하겠다. 그러므로 최선애, 김정학 등이 금산사와 진표율사를 표방하고 나온 것은 순전히 저들의 증산교 신앙에서 연유된 것으로 보여진다.

진표율사는 신라 대의 고승으로 지장보살과 미륵보살에게서 수기와 간자를 받고 신라불교에 점찰법회란 독특한 수행법과 미륵신앙을 고취한 분이다. 금산사를 중창한 후 이곳에서 법을 교설하였는데 조선조 말에 와서 증산 강일순이 ‘내가 곧 미륵이요 나를 보려거든 금산사 3층전 미륵불을 보라’고 한데서 금산사의 미륵불상은 증산교인들에게 있어 강증산의 영체로 인식되었고 성역화했으며 더불어 증산교인인 최선애 등도 자연 금산사를 신앙의 본거지로 하여 증산교적인 측면에서 불교를 이해하고 진표율사를 종조로 모신 것이다.

진표의 미륵신앙은 크게 두가지 갈래로 볼 수 있다. 하나는 민중적 측면이고, 다른 하나는 법상종과의 관계이다.

신묘(辛卯1951)년 섣달에 유제봉은 성계리 최선호의 집에 와서 머물렀다. ‘미륵불교 종지’라는 책자를 보면 ‘김태운이 유제봉에게 법계를 전하고 서거한 뒤에 2대 회장이 된 유제봉은 계속하여 불사를 하다가 6.25 동란을 금산사에서 겪었는데 갑오(甲午1954)년 12월 26일 최선호의 부인 최선애에게 선사로부터 받은 유법으로 법계를 전하고 입적하였다.’고 한다.

최선애는 갑진(甲辰1964)년 6월에 미륵불의 계시를 받고 용화동에 사는 여처자파 신도인 김정학을 방문하여 미륵불교를 법상종이라는 새로운 종단으로 문공부에 등록하는 문제를 상의하니 뜻을 함께 하기로 하었다.. 이로부터 노력하여 7년만에 이 일이 이루어져서 경술(庚戌, 1970)년 2월20일 문화공보부에 대한불교법상종이라는 종교단체 제24호로 등록할 수 있었다.

당시 본 종단의 간부로 있던 김정기(일명 정학)와 함승국, 김옥봉, 최선애 등의 노력이 지대하였다. 그런데 이들은 모두가 증산교인들로서 전북에 주거하는 사람들이다.

김정기는 본래 경북청도 사람으로 그의 아버지 때부터 보천교에 입신하였다. 이들은 모두가 처음 보천교에 있다가 뒤에 같은 증산교파인 여처자교(선교)에 전향하여 전북 김제군 금산면 금산리에 도장을 세우고 있었다.

그러나 이 교단이 큰 발전이 못 되자 김정학은 하나의 교단을 구상하게 되었던 것이다. 그도 그럴 것이 서백일의 용화교가 본래는 증산교계의 한 교파에 지나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분명 증산을 신앙대상으로 한 교단이지 불교 그 자체는 아닌데 문공부에 등록하여 어였한 종단 행세를 하면서 교인을 포섭하는 것에 착안하여 불교와 무관하면서 불교종단화를 시도한 것이다.

최선애와 갈등관계에서 종단대표 위치를 차지하게 된 고 남궁규 종정 측은 후토성모신앙과 미륵관을 토속적인 배경 위에서 설하고 있으며 최선애 등의 여경암측에서 증산 신앙을 계속하여 증산 강일순이 곧 미륵불이요, 옥황상제로 믿고 있다.

1975년 남궁규 종정이 펴낸 수첩용 종지와 강령이 나왔고, 최선애가 지은 <정심교육 양정회>와 <법상종략사>가 있을 뿐 소의경전 <점찰선악업보경> 등은 아직 구비조차 되지 않고 있다.

현재 본종의 미륵사상은 불교의 근본사상과는 별개로 증산신앙과 도수에 의한 한열사상으로 양분되었다.

길흉화복을 점쳐 재앙을 미리 예방하는 것을 내용으로 하는 점찰선악경을 소의경전으로 한 종파로 법상종이 있다. 전통적인 법상종 본래의 소의경전은 해심밀경, 유가사지론, 성유식론 등임에도 불구하고 중국에서 찬술한 위경인 점찰선악경을 소의경전으로 하고 있는 것은 종명이나 교리와는 관계없이 퍼져있는 미신과 부응하고자 한 의도가 엿보인다.

몇 차례 교단 지도부의 종권 다툼으로 교세는 많이 약화되었다. 최근에는 일부 사찰에서 개인적으로 일본 진언종과 교류를 모색하는 등 종파불교의 한 일면을 보이고 있다.

앞에서 밝히고 있는 김형렬이 창교했다는 미륵불교와 현재 한국불교 종단협의회(회장:송월주) 산하 법상종과는 근본적으로 다름을 밝힌다. (삼국유사문화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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