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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과 베트남, 그 역사적 혈연적 관계

김주호 | 기사입력 2019/03/01 [06:51]
800여 년 전 혈연 맺어, 외교관계는 400년전

한국과 베트남, 그 역사적 혈연적 관계

800여 년 전 혈연 맺어, 외교관계는 400년전

김주호 | 입력 : 2019/03/01 [06:51]

 


800
여 년 전 혈연 맺어, 외교관계는 400
년전  

 

베트남 민족은 서력기원전 6세기경 중국 절강성(浙江省)에 살고 있던 월인(越人) 이었다. 월이 기원전 333년 초()에 패하자 여러 종족들이 남하, 백월(百越)의 이름아래 각지에 봉건제도의 번령(藩領)을 조직했다. 이 월의 4대족 중에서 3족은 중국의 온주(溫州) 복주(福州) 광주(廣州, 廣東)에 머물러 살게 돼 완전히 중국에 동화되고 말았다. 그러나 제4족인 맥월(貉越, Lac-viet)은 기원전 3세기 전반에 남부 광서(廣西)에 이동하여 3세기말 통킹(東京, Tonkin)과 북 월남에 퍼져서 오늘날 베트남 민족의 시조가 되었다.(최상수 韓國越南과의 關係p.19, 1966. 전 하노이 遼東 프랑스학원 올소의 설)

 

옛날 베트남의 중부지방을 안남(安南, Annam)이라 했다. 이를 베트남 사람들은 투룽키(中析, Trungky)라고 한다. 탕호아(淸化, Thanhhoa) 이남에서 판티에트(Phanthiet)부근 이북을 말한다. 북부지방인 통킹(東京, Tonkin)은 박키(北析, Backy), 남부지방은 코친 차이나(交趾支那, Cochin China)로 남키(南析, Namky), 주로 메콩평야를 아우르는 지역을 말한다중부지방인 안남지역은 중부 남지나해에 임하는 좁고 긴 지방이다. 안남산맥이 동남해안으로 뻗어 있고 바다와 급경사를 이루고 있다.

 

종족분포를 보면, 10여 종족으로 이루어져 있는데 베트남 민족이 약 80%로서 대부분이고 주로 해안을 끼고 저지대 평원에서 살고 있다. 베트남 족과 거의 같은 무옹(Muong)족은 베트남 북부 구릉지대에 많이 산다. 중남부와 캄보디아 사이에는 참바(占娑)족이, 중부 산악지대에는 모이(苗族, Miao, Meo)족이 살고 있다. 이 모이족 즉, 묘족은 우리 동이조상 치우천황(蚩尤天皇)의 후손들이다. 그렇다면 그들은 이미 한 옛적부터 우리와의 혈족관계를 지닌다 하겠다. 치우에 관해선 지난 611일자 한남 글 마당동이조상 치우와 붉은 악마란 제목의 칼럼에서 필자가 밝힌바 있다.

 

베트남은 건국 이래로 국체의 변혁이 많고 또 왕조의 흥폐와 국명의 변경이 심했다. . 고대에는 적귀국(赤鬼國, Xich-qui) 문랑국(文郞國, Vanlang) 구맥국(甌貊國, Au-Iac) 남월국(南越國, Nam-Viet) 등으로 불리었다. 그런가 하면 교주(交州, Giao-chau) 또는 교지(交趾, Giao-chi)라 일컫고, 중국 육조(六朝)시대 말기에는 한 때 독립하여 만춘(萬春, Van-xuan)이라 했다가 당()이 이를 점령해 안남(安南, Annam)이라 지었고, 그 뒤 한 때 대구월(大瞿越, Daico-Viet)이라 일컬은 적이 있었다.

 

거기에서 대월국(大越國, Dai-Viet) 또는 교지국(交趾國)이라 부르다 11세기에서 16세기 까지는 안남국(安南國)이라 했다가 완(, Nguyen)왕조 초기에는 월남국(越南國, Viet-nam)이라 고치고 약 반세기 뒤에는 대남국(大南國, Dainam)이라 하다 그 뒤로 또 안남국이라 일컬었던 것이다. 고래로부터 일반적으로 안남이란 명칭으로 알려져 왔다. 세계 2차 대전 후 한 때 국토가 분단되었다가 1970년대 중반부터 통일국가를 이루었고 이때부터 지금까지 베트남으로 부르게 되었다.

▲ 화산이씨 조상 베트남 이왕조 사당    

 

화산이씨 시조는 안남왕자 이용상

 

베트남은 옛 적부터 한() () ()의 세력 하에 오() () ()의 왕조를 거쳐 서기 1010년 이공온(李公蘊, Ly cong-uan)이 왕위에 올라 이조(李朝)의 조상이 된다. 그러나 이씨 왕조가 권신인 진씨(陳氏) 일족에 의해 왕위가 찬탈되자 왕자인 이용상(李龍祥, 혜종왕의 숙부)은 친족 윤필(尹苾)과 같이 제기(祭器)를 안고 1226년 망명의 길을 떠난다.

 

그는 이공온의 6세손. 배를 타고 당도한 곳이 동쪽으로 고려국 옹진현(甕津縣)의 화산(花山). 옹진군 마산면 화산리에 살고 있었는데, 여기서 그리 멀지 않은 두문동 이을봉 아래에는 그를 비롯해 아들 및 손자에 이르기까지 3대의 무덤이 있다. 광대산(廣大山) 위에는 월성암(越聲岩)이란 바위가 있으니, 망명 후 고향 생각에 사무칠 때 마다 이 바위에 올라 남쪽 하늘을 바라보며 방성통곡 했다고 한다. 또 화산에는 그가 단을 쌓고 아침저녁으로 고국을 향해 바라다보았다는 망국단(望國壇)이 있다.

 

고려에 망명 귀화한 그는 고려에 침입해 온 몽골군을 격파, 항복받은 공적을 칭송한 수항문(受降門) 기적비(紀蹟碑)가 있다. 1253년 고려 23대 고종은 그의 공을 높이 사 화산군(花山君)으로 작위를 봉했다. 이때부터 그는 화산이씨의 시조가 된다. 그의 후손들은 예문관 대제학, 예조참의, 성균관 박사 등 명문을 이어 왔다. 한국과 베트남은 이미 800여 년 전부터 역사적 혈연적 관계를 지닌 셈이다.

 

우리나라와 베트남의 외교관이 만난 것은 412년 전 이다. 선조30(1598) 겨울 이수광(李晬光)이 명나라 황극전(皇極殿) 화재로 진위사(進慰使)가 되어 연경(燕京)에 머무를 때였다. 이때 베트남(당시는 安南) 사신 풍극관(馮克寬)과 만나 교제한 사실이 그의 지봉집(芝峰集)’에 전한다. 두 나라 사신은 객관인 옥하관(玉河館)에서 50일 동안 머무는 사이 친하게 되어 서로 시를 읊고 필담으로 문답을 주고받았다. ‘증수시(贈酬詩)’문답록(問答錄)’이 그것이다.

 

우리나라 민간인으로 베트남을 최초로 갔다 온 사람은 진주(晋州) 출신 조완벽(趙完璧)이다. ‘지봉집(조완벽전)’에 의하면 그는 약관에 정유왜란(1597)을 만나 왜군에 붙들려 일본 교토(京都)로 갔다. 왜는 그가 글을 아는 사람임을 알자 7년만인 갑진년(1604) 그를 데리고 베트남을 왕래 했다. 이 때 베트남 고관 식자층에서 이수광의 시책(詩冊)을 송독하는 등 그의 이름이 널리 알려져 있더라고 했다.

 

숙종 때인 정묘년(1694) 제주도 사람 21(24인 이었으나 표류로 도중에 3인은 사망)이 안남(베트남)에 표류, 그곳에서 지내다 고국에 돌아온 일이 있다. 정동유(鄭東愈)주영편(晝永編)’에 보인다. ‘주영편1805년 순조 5(을축년)에 기록한 것이다. 조선조 영조 때(정미년) 역관 이제담(李齊聃)이 제주도에 갔다가 그곳 주민 고상영(高尙英)이란 이를 만나 안남에 표류한 제주도 사람 이야기를 듣고 이를 다시 정동유에게 전하자 그가 이를 주영편에 기록하게 된 것이다.

 

안남국왕 표류 제주인 인후로 배려

 

당시 제주도민이 안남국에 당도한 곳이 회안군 명덕부(會安郡 明德府)라는 지역 이었다. 이 회안은 지금 중부 베트남의 해안 지방인 파이푸(Faifoo, 會安市)로서 다랑(Tourane) 아래에 있다. 당시 안남국왕이 표류당한 제주도 사람들을 불쌍히 여겨 600양의 돈으로 청나라 상선을 세내어 조선에 보내 준다는 국서를 선주 진건(陳乾)과 상인 주한원(朱漢源)에게 주며 부탁하기를 너희가 임무를 마치고 돌아 올 때 반듯이 조선 문서를 받아 가지고 오면 다시 상급을 후히 하리라고 했다.

 

안남국 왕은 조선인에게 양식, 채소류, 식염 등을 주어 항해하는 기간 식량을 충당하도록 배려했다고 정동유는 주영편에서 전하고 있다. 그는 끝으로 족히 안남 풍속이 인자하고 후한 것을 알겠도다라고 역설했다. 그러나 우리나라 조정에서는 그 배 삯과 쌀값은 갚기로 했으나 안남국왕의 국서에 대해선 감사의 회답 문서를 보내지 않았고 또 그들을 북경까지 압송하고 말았다. 안남의 인자하고 후한 은혜를 인후(仁厚)로 갚지 못했으니 부끄럽다.

 

그런가하면 17세기경 안남 상인들도 제주도에 표류해 오기도 했다. ‘조선왕조실록 광해군일기(15) 임자 2월조에 보이는 내용이다. “청나라 남경사람과 안남상인 등이 모두 화패(貨貝)를 함께 싣고 바다에 표류해 왔는데 그 배의 크기와 모양을 보아 왜구가 아님을 알고서 이기빈(李箕賓)과 문희현(文希賢) 등이 처음엔 예로서 여러 날 접대하더니 배에 보물이 가득함을 보고 도리어 그 재물에 욕심이 생겨서 그들을 유치(誘致)하여 다 죽여 버리고 그 보화를 몰수하고 또 무고한 수백의 인명을 죽였다. 그 자취마저 숨기기 위하여 그 배 까지 불살라 버리고 마침내 왜구를 잡았다고 떠들어 대고.” 당시 제주목사란 자들이 얼마나 물욕에 눈이 어둡고 천인공노할 만행을 저질렀는가를 알 수 있다.

 

과거 공산화를 막기 위해 월남파병용사들이 고귀한 선혈(鮮血)을 이역산천에 뿌렸던 그 베트남. 전쟁이 끝나고 다시 국교가 맺어져 친선유대가 깊어가고 있는데, 비록 합의가 무산됐지만 북·미 정상회담이 베트남 하노이에서 27~28일 열린 것 또한 우리로서는 역사적 의미를 짚어 보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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