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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뎅의 ‘칼레의 시민’서 다시 보는 노블레스 오블리주

심재길 | 기사입력 2019/03/29 [15:18]
“예수를 영접한 사람들이 이 시대 실천적인 리더십 보여주어야”

로뎅의 ‘칼레의 시민’서 다시 보는 노블레스 오블리주

“예수를 영접한 사람들이 이 시대 실천적인 리더십 보여주어야”

심재길 | 입력 : 2019/03/29 [15:18]


1337
년 부터1453년 까지 영국과 프랑스가 전쟁과 휴전을 반복하면서 벌린 전쟁의 발단은 프랑스 왕위 계승 문제 때문이었다.

 

1328년 프랑스의 까페왕조의 샤를4세가 아들없이 죽자 4촌 형제인 발루아가의 필립 6세가 왕위를 승계하자 영국의 에드워드3세가 자신의 모친이 까페왕조임을 내세워 프랑스 왕위 승계를

주장하면서 시작된 전쟁을 백년 전쟁이라 한다. 여긴 또한 영토 소유권 문제도 복합적으로 작용 하기도 했다.

 

1337년 영국의 선전 포고로 시작된 이 전쟁은 기간 중 흑사병이 창궐해 전쟁이 중지되기도 했디. 이 전쟁 때 영국의 에드워드3세의 아들 흑기사의 활약과 이시대를 배경으로한 로빈 훗전설. 잔다크의 활약 등 많은 이야기가 전해 오고 있다.

 

전쟁 발발 10년 만에 영국이 프랑스 크레시(Crecy)전투에서 프랑스 필리프6세 에게 큰 부상을 입히고 그의 동생 샤를2세 등 수많은 기사들을 죽이며 승기를 잡았다. 영국왕 에드워드3세는 이어 13469월 도버해협에 면한 프랑스의 칼레('Calais)항을 포위했다. 이후 1년간 성채를 기반으로 한 칼레시민들의 눈물겨운 저항이 이어졌지만 끝내 식량이 떨어진 시민들은 항복의사를 전하며 칼레시 와 시민에 대한에 관용을 간청했다. 하지만 1년간 갖은 고생한 에드워드3세는 관용의 대가로 칼레시의 지도급인사 6명의 목숨을 요구했다.

 

이때 칼레시에서 가장 부유한 유스타슈 생 피에르(EuStache de Saint Pierre)가 선뜻 자원하자 감동한 지도급인사 6명이 앞 다퉈 죽음에 자원했다. 피에르는 6명의 희생정신과 용기가 흔들리지 않게 하기 위해 스스로 목숨을 끊었고 나머지 6명은 담담한 태도로 머리에 동아줄을 매고 허리에 끈을 맨 후 칼레시의 열쇠를 들고 에드워드 3세와 그 옆에 놓인 교수대로 향했다. 다행히 사형집행 직전 임신 중이던 에드워드 3세의 왕비 필리파 에노(Philipp of Hainault)가 배속의 아기를 위한 관용을 간청하자 에드워드 3세가 받아들였다. 결국 시민을 대신해 죽음을 자청한 지도급 인사들은 목숨과 가정 재산 뿐 아니라 이웃과 도시 전체를 구했고 상류층이 갖추어야 할 도덕적 의무. 즉 노블레스 오블리주(Nobblesse Oblige)의 전형으로 기억 되었다.

 

이들의 노블레스 오블리주는 500년 뒤 "생각하는 사람"을 조각한 로댕(Auguste Rodin)의 작품 "칼레의 시민(The Bungher of Calais)"으로 부활하며 알려지게 됐다. 프랑스 작가 장 프루아사르(Jean Froissart)"연대기"를 비롯해 다양한 일화들이 지도급인사들의 자발적인 희생을 다루고 있는데 시민대 표들의 형식적인 의례가 후일 마담으로 부풀려 졌다는 견해도 있다.

 

예수 그리스도를 개인의 구주로 영접한 사람들은 이 시대 에 실천적인 리더십을 보여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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