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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길수의 일상에서 찾는 삶의 구원과 행복●면티

박길수 | 기사입력 2019/08/30 [08:31]
“조금 옹졸하고 시시하게 사는 삶이 나에게 잘 맞아 편할 듯싶다”

박길수의 일상에서 찾는 삶의 구원과 행복●면티

“조금 옹졸하고 시시하게 사는 삶이 나에게 잘 맞아 편할 듯싶다”

박길수 | 입력 : 2019/08/30 [08:31]

조금 옹졸하고 시시하게 사는 삶이 나에게 잘 맞아 편할 듯싶다

  

색 바랜 내 검정 면티 겨드랑이에 구멍이 났다. 반팔 양쪽이 거의 비슷하게 찢어졌다. 찌는 듯한 이 삼복더위 날, 위에 걸칠 옷도 마땅치 않은데, 찢어진 면티 때문에 정신 바짝 차리고 꼼짝없이 부동자세로만 친구들과 식사하며 이야기 나누기도 사실 힘들다. 아무리 허물없는 친구들이라고 해도, 겨드랑이가 해져 맨살이 드러난 모습을 차마 보이면 안 된다. "친한 친구일수록 예의를 차려야 한다."라고 들은 적 있는데. 꼼짝없이 아내랑 둘만 붙어서 안 나다니고 살아가면 좋은데, 가끔은 바빠도 괜히 나가 그들과 쓸데없이 시시덕대다가 들어오고 싶다.

 

헐어 찢어진 옷은 꿰매서 단정히 입어야겠다. 친구들 앞에서는 조금 누추한 듯해도 큰 상관이야 없겠지만, 해진 면티를 입어 창피당할 모습은 보이지 말아야 한다. 궁색한 처지라서 그렇지만은 아니라고 그들도 이해는 하겠으나, 맨살이 노출된 채, 낡아 색이 바랜 옷을 걸치고 모임에 가는 일은 차마 변명하기 힘든 뻔뻔하고 무지한 소치(所致)일 것이다. "친구들의 사회적 위신도 생각해줘야 한다."라고, 한 차례 들은 적 있는 어떤 친구의 충고가, 내 귓전에서 윙윙댄다. 아내가 누워버리지만 않았어도 큰 문제는 아닌데. 별수 없다. 얼른 꿰매서 입어야겠다.

 

아내가 오래전에 사준 이 까만 색 면티는 나도 모르는 사이에 진회색처럼 탈색되었고 부분부분 바랬지만, 입으면 여전히 푸근하고 편해서 좋다. 마치 정겨운 아내 향기가 물씬 배어있는 듯싶고, 시간이 흐를수록 내 얼굴에 잘 맞아 몸 일부처럼 익숙해지는 듯해 좋다.

 

색이 바래거나 조금 탈색된 면티는 어쩌면 유명 패션처럼 여겨질 수도 있겠으나, 낡아 겨드랑이 쪽이 찢어진 티는 구멍 난 청바지와는 달리 문제가 될 듯싶다는 생각도 든다. 아내가 4년 반이 지나도록 의식 없이 누워지내면서 내가 가지고 있는 면티 대부분은 겨드랑이 부분이 조금씩 헤어진 듯싶다. 엊그제 사준 티 같은데, 옷에 흐른 세월도 참으로 덧없다.

 

아내 옆에서 해어진 면티를 꿰맨다. 바느질은 아직 굼뜨지만, 한땀한땀 집중하고 열중할 수 있는 일이어서 좋다. 터진 옷 꿰매는 일이 나에게 여전히 낯설고 쉽지 않은 일이지만, 어렵다는 생각은 들지 않는다. 다행히 찢어진 부위는 모두 겨드랑이 쪽이라, 설령 바느질이 약간 투박하고 엉성해도, 깔끔한 듯이 여미어져 어깨 안으로 감춰진다. 웬만큼 팔을 벌려도 얼추 알아보기 힘들어 너무 좋다. 내친김에 아내가 갈아입을 해어진 환자복 겨드랑이도 대략 꿰매놓았다. 바느질이 나에게 명상적 삶을 가져다줄 확실한 연결고리가 될지도 모르겠다는 느낌이 들었다. 앞으로 기회가 되면 뜨개질도 배워야겠다. 아내가 좋아하는 빨간색 고운 털실로 예쁜 가디건을 떠, 환자복 위에 살며시 입혀주면 좋을 것 같다.

 

바느질을 하면서, 이제는 조금 옹졸하고 시시하게 사는 삶이 나에게 잘 맞아 편할 듯싶다는 생각이 든다. 새롭게 자리 잡은 내 일상이 구불구불 나 있는 비탈길 위 아기자기한 샛길 같은 옹졸함으로 느껴지기 때문이다. 작고 귀여운 참새 눈동자로 세상을 처음 쳐다보듯 이리저리 바삐 두리번대거나, 여린 새 가슴처럼 나도 모르게 팔딱대는 호기심이 신비로운 행복의 느긋한 삶임을 이제야 느낄 수 있을 듯싶다. 그동안 상상할 수도 없었던 일상의 소소함을 행복의 눈으로 다시 살펴보고, 몸을 움직이며 살고 싶은 생각이 솟는다.

 

사는 일 자체야 원래 조그마한 일의 집합이 시간 속의 흐름이고, 집중해야 할 일이라, 이제는 굳이 크고 작은 일로 남 눈치보며 구분지을 필요 없을 듯싶다. 이왕 사는 날까지 일로 벌어먹으며 살기로 마음 정했으니, 몰입하며 즐겁게 살아야 할 듯싶다. 아내 옆에서 가장 하찮게 여겼던 바느질 일을 비로소 열심히 즐기면서 살아갈 수 있을 듯싶다. 나는 수시로 방안을 환기시키고, 침상 모서리에 쌓인 먼지를 닦고, 밥 먹을 때 그릇 긁는 소리를 내지 않도록 주의하기도 하고, 바짝 마른 옷이나 수건을 소리나지 않게 개서 제 자리에 가지런히 넣어두는 일을 낡은 면티 꿰매는 일처럼 함께 즐기고 싶다. 뜬 구름 같이 허망한 자존심은 내려놓은지 이미 오래 되었다. 아내 옆에서 해진 면티를 꿰매고, 새로 뜨개질도 배우면서 옹졸한 듯싶지만, 작고 내실있게, 소소하지만 확실한 행복을 나도 누리며 살아야겠다.

 

 

필자 박길수는 이 시대를 성실하게 살아온 평범한 인물이다. 41년 결혼생활 중 4년여 전 느닷없는 아내의 뇌출혈로 불행이 시작되는 듯했다. 그러나 그는 좌절하거나 포기하지 않았다. 의식없는 아내를 편안한 집에서 보살피기 위해 요양보호사 자격을 땄다. 치료비와 생활비, 그리고 자신의 건강관리를 위해 장애인 도우미 자격증도 따서 출퇴근한다. 항상 아내 곁을 지키는 아버지를 위해 딸과 사위, 그리고 누구보다 예쁜 손녀가 합류했다. 그는 불행한 생활일 듯한 일상에서 행복을 찾고 구원도 받는다. 그리고 개인 블로그 박길수의 일기’(https://m.blog.naver.com/gsp0513)에서 그러한 일상을 기록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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