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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정태 박사의 한국종교학
조선왕릉 조영의 사상적 배경●정조 아버지 사도세자와 정조의 융건릉
용이 여의주를 가지고 노는 형국을 유지하고 있는 곳
기사입력: 2020/01/15 [08:12]  최종편집: ⓒ 매일종교신문
장정태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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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융릉과 건릉    


정조대왕은 효심이 지극하였다
. 아버지인 사도세자의 추존을 위하여 융릉 조성에 심혈을 기울였으며, 이 과정에 정조는 스스로 풍수 이론을 공부하고, 풍수지리서를 탐독하였다 한다. 수은묘와 천장지를 화성으로 할 때도 입지선정을 직접 판단할 정도였다.

 

홍재전서를 통하여 정조대왕의 풍수지리에 대한 관심도를 잘 알 수가 있다. 따라서 정조대왕의 풍수에 대한 관심도가 깊어 건릉 조성 시에도 그 입지조성이 특별했음을 알 수가 있으며 건릉의 풍수지리적 입지, 좌향, 천장의 과정이 정조의 천릉 비문에 자세히 기록되어있다. 정조의 건릉을 이해하기 위하여 비문의 내용을 살피며 다음과 같다.

 

정조 대왕 천릉 비문. 정종 문성 무열 성인 장효 대왕은 숭정기원후 125년인 임신년 922일 탄생하였다. 기묘년에 왕세손에 책봉되었고 을미년부터 대리 청정하다가 병신년에 즉위하였으며 경신년 628일에 승하하여 116일에 화성 현륭원 동편 둘째 산등성이 해좌 언덕에 장사했다. 24년간 재위하고 수한은 49세였으며 신사년 913일 다시 원의 바른편 기슭 자좌 언덕으로 옮겨 모셨다. ()는 예경 자수 효의 왕후 김씨인데 숭정 기원후 126년 계유년 1213일 탄생하고, 임오년에 세손빈에 책봉되었다가 병신년에 왕비로 책봉되고 경신년에 금상이 위를 이어받자 왕비가 되었다. 신사년 39일 승하하여 913일 건릉에 부장하고 봉분을 함께하였다. 천수는 69세를 누렸다. 좌의정 남공철이 제술하였다.”

 

조선왕릉의 풍수적 입지를 보면 조선 왕실과 국가의 번영을 위해 자연지형을 고려하여 터를 선정하는 것이 필수적인 사항이었다. 기본적으로 지형을 거스르지 않는 원칙을 고수하였기 때문에 크기나 구성에 있어 자연 친화적이며 주변 경관과 잘 어울리는 특징을 갖고 있다.

 

융릉이 입지한 이곳의 역사적 기록은 효종 승하후 후보지 선정에 대한 기록을 보면, '수원 호장의 집 뒷산이 용혈사수가 진선진미하여 그야말로 천재일우의 곳으로 다른 산과는 단연 비교가 되지 않습니다. 윤반의 묘소 등 네 곳은 결코 크게 쓸 곳이 못 되는데, 상의 하교에 따라 여러 지관으로 하여금 등급을 올리라 하였더니. 교하 윤씨의 산이 가장 낫고 남양이 그 다음이며 경주정씨의 산이 또 그다음이고 한강 북변이 네 번째라고 하였습니다.’ 라는 기록이 예조판서 윤선도 등의 주장으로 최고의 효종 능역 후보지로 주장되었다. 그러나 송시열 등의 반대로 지금의 동구릉 현 원릉 영조와 정순왕후 릉에 터를 잡게 되었다가 추후 여주 현재의 영릉 터로 옮기게 되었다.’는 기록이 있다.

 

현종실록에서는 현종 즉위년(1659) 619"지형 산세가 매우 훌륭하고 둘러싸인 형세가 흠결이 없어 신의 범인으로도 좋게만 보였습니다. 그리고 다른 세 곳 산들은 모두 흠결이 있어 나라 장지로는 맞지 않았습니다. 다만 수원 산에 있어 정혈을 지점 한 곳이 윤선도와 이원진의 소견이 달라 판단하기가 어려웠습니다." 라고 기록됐다.

 

같은 달 30일 수원부는 나라의 요새이고 고을을 옮기고 거주민을 이주시키는 폐단이 있다고 좌참찬 송시열(1607~1689), 영의정 정태화(1602~1673), 영돈령부사 이경석(1595~1671), 연양부원군 이시백(1592-1660), 완남군 이후원(1598-1660), 영중추부사 원두표(1593~1664)등 대신들의 반대로 성사되지 못하던 곳이 130년 후에 능침으로 선정되었으며 융건릉의 입지는 많은 관심 속의 혈지였으며 풍수적 논의의 대상이었음을 알 수가 있다

 

풍수지리적 분석

 

1) 용세

 

융건릉의 지형을 분석하면 산 내맥은 백두대간에서 한남 금북정맥을 거쳐 한남정맥으로 이어지는 용맥이다. 한남정맥의 용인, 의왕, 수원, 세 고을의 경계에 걸터앉아 있는 광교산592m)이 융릉의 조종산이다. 용인의 부아산으로부터 시작하여 오른쪽으로 낀 것이 석성산광교산백운산오봉산과 수리산의 중간에서 분기구봉산칠보산고금산호산을 잇는 용맥이다. 융릉의 조산은 태조산을 백두산으로, 중조산을 광교산으로, 소조산을 칠보산으로 하여 주산을 화산 해발 108m로 하고 있다.

 

광교산 북쪽의 산봉우리에 항상 흰 구름이 덮여 있어 붙여진 백운산(560m)에서 남서쪽으로 달려가 지지대고개에 이르러 낮아졌다가 다시 솟아 오봉산(204m)이 되고 왼쪽으로 서봉지맥이 떨어져 달려서 수원, 화성, 안산의 3 개시 경계에 있는 칠보산(233.8m)이 되었는데 칠보산은 중조산(종산이라고도 함)이 된다. 칠보산을 치악산 또는 증악산이라고도 부르는바, 이 산 가운데서 나온 한 맥이 구불구불 내려오는 형세가 아주 완벽히 끊어져 계곡을 보호하여 영접하고 전송하며 겹겹이 둘러 서쪽에서부터 동쪽으로 넓은 들 가운데서 서렸다가 몸을 뒤틀어 우뚝 솟아 남쪽을 향해 마치 소용돌이치면서 흐르는 물결 같기도 하고 곧은줄기와 당기는 맥이 혹 솟기도 혹은 엎드리기도 하여 서쪽으로 10여 리를 내려와서 고금산(86.6m)이 되고 정남면과 봉담읍 경계에 있는 서봉산(250m), 평택 청북면과 양감면 경계의 덕지산(138m)과 계두봉으로 이어지는 서봉지맥이 된다. 고금산에서 몸을 돌려 물을 거슬러 올라가 화산(108m)이 되었다. 화산은 옛 수원부 소재지의 북쪽에 있는 주산이다.

 

2) 혈세

 

융릉은 화산의 왼쪽으로 뻗은 내룡이 을방(동쪽에서 남쪽으로 15도 방향)에서 엎드렸다가 크게 솟아 뒤의 장막이 되어 연주맥으로서 기복을 하고 건방(북서쪽)에서 봉우리가 솟고 조금 내려와 해방(북쪽에서 서쪽으로 30도 방향)으로 돌고 다시 임계방(북쪽에서 동쪽으로 15도에서 30도 방향)으로 지그재그 돌아오면서 축방(북쪽에서 동쪽으로 30도 방향)으로 내려가서 간방(북동쪽)에서 입수하여 50고지에 머물러서 계좌정향(남쪽에서 서쪽으로 15도 방향)으로 현륭원소(1899.11 융릉 격상)를 점혈하였다. 바로 이곳이 수원부 김호장의 집 뒷산이다. 정조 즉위년(1776) 원호를 영우원(永祐園)이라 하였다가 정조 13(1789) 89일에 현륭원으로 고치고 107(己未). 화산으로 옮겨 장사 지내고 현융의 현()자는 시경의 그윽한 곳에서 보는 듯 삼가고(不顯亦臨 ,詩經文王之什 大雅)시경에서의 크게 드러나도다(밝도다) 문왕의 계책이여 (丕顯哉 文王謨,書經周書 君牙) 하였고 두시(杜詩)'낳아주시고 길러주신 드러난 은혜에 보답한다(報玆劬勞顯)에서 현()자를 취하고 륭()설문해자'풍성하고 큰 것을 말한다, 물건의 가운데가 높고 성대한 것을 뜻한다.'에서 취하였다.

 

좌향을 정할 때 산운(장례일, 망자 출생년 등을 고려하지 않으면 매우 해로워 삼살 방을 피해야 하며 좌향이 털끝만치의 차이가 나도 재앙과 복이 천 리 간격이 되니 (毫釐之差 禍福千里) 신중히 하여야 한다.(금랑경, 지리신법, 동국세시기)고 하였다.   

 

화산의 주룡(화산)으로부터 오룡으로 남진하는 용은 융릉이 되며 화산에서 유룡으로 서진하는 용은 건릉이 된다. 융릉의 좌향은 계좌정향이다.

 

홍제전서 57 정원1을 살펴보면 다음과 같이 계좌를 정한 내용이 서술되어 있다.

 

계좌를 놓으면 건방의 물은 탐랑성에 해당하고 을방의 물은 무곡성에 해당하니 선천과 후천이 서로 만나는 격이 된다. 오방(남향)의 파문은 거문성에 해당하니 물과 불이 맞부딪치지 않는 격이고 3가지의 길성이 모두 갖추어지고 내룡과 망향이 모두 좋으므로 지리의 묘법에서 간룡에 계좌를 놓으면 제일 귀격이 된다고 방외사 <지사가 아닌 사람, 참여인사 : 봉조하 조돈, 판중추부사, 김익, 우의정 채제공(1720~1799), 좌의정 이성원(1725~1790), 관상감제조 김종수(1728~1799), 승지 김이성,윤선도1587~1671) 용인현령 이지원, 부사과 박대량, 사용 주남술, 진사 채윤전, 예조판서 윤강(1597~1667), 지관 목릉참봉 이최만홍여박박세욱반호의기중윤이필부호군 이원진이유필김극만윤흥경, 방외사 성몽룡> 김양직이 말하였다.”

 

건릉의 주산은 융릉과 같이 북쪽의 108m의 화산이며 갑인룡으로 경유향으로 우선하여 내려오다 87m의 평탄한지에서 갑묘룡 경유향으로 행룡하여 같은 방향 즉 갑묘룡 다시 일어나 내려오다가 올라가 81m에서 다시 복()하고 87m의 높이의 주산으로 올라 멈춘 연후에 우선룡으로 방향을 90° 틀어 행룡하여 임자룡(午向)으로 한 후 속기하여 힘 있게 입수를 하였다. 이 용이 건릉의 용세이다. 건릉은 좌선룡으로 하여 유혈로 볼 수 있다. 좌향은 자좌오향이다. 융릉과 건릉은 함께 부자지간에 같은 능원에 조성되어 있다는 것이 특징이다.

 

3) 사세(砂勢

 

융릉의 사세를 보면 청룡은 4중이고 백호는 3중으로 되어 형체가 팔뚝 어깨와 같아 모두 몸을 감싸 혈성을 에워싼 것은 마치 자애로운 어머니가 자식을 껴안은 형상이다. 안산은 정방의 정남면 괘량리 하남산(116m)이고 조산은 손사방(남쪽에서 동쪽으로 3045도 방향))의 오산시 지곶동 독성산(207m, 산 정상에 세마대가 있다.

 

건릉의 사세에 있어 현무는 화산에서 유룡으로 서진하여 건릉의 현무가 되었다. 안산은 백호사를 안대로 하고 있으며 혈을 감싸 안듯이 혈장을 보호하고 있는 형국이다. 청룡은 주산의 81m의 지점에서 오향으로 방향을 틀어 내려오다가 갑묘룡경유향으로 다시 틀어 혈을 감싸 안듯이 행룡하여 오다가 계곡에서 멈추었다. 백호의 국세는 주산에서 본신룡이며 갑묘룡 경유향으로 내려오던 중 임자룡 병오향 내려오다가 마을을 만나 경유룡 갑묘향으로 방향을 전환하여 혈을 감싸 안듯하며 계곡을 만나 멈추었다

 

4) 수세 

 

융륭의 풍수적 수세는 융건릉의 국내에서 득수한 물과 성황산에서 득수한 물이 합수되여 황구지천으로 흘러 들어가고 있다. 여러 봉우리가 모두 가까이 지척에 있는 듯하므로 돌고 도는 가운데 물은 혈처의 오른쪽 건방과 왼쪽 을방에서 발원하고 명당 수는 신방(서쪽에서 남쪽으로 30도 방향)에서 득수(혈처에서 바라볼 때 처음 보이는 물을 가리킨다) 하여 생방수가 되고 오방(남쪽)으로 파문(혈처에서 보아서 득수한 물이 흘러나가는 물길이 맨 끝으로 보이는 물, 파수 또는 수구라고도 함)하니 안팎이 합쳐진 것은 부부가 배합한 격으로 참으로 아름답고 흠이 없으며 극히 귀하고 좋은 길격이라고 한다. 융릉 진입로 대왕교를 건너 왼쪽에 곤신지가 있다. 정조가 지은 홍재전서에 의하면 곤신방(남쪽에서 서쪽으로 45~60도 방향)에 연못을 조성한 것은 곤신은 융릉의 계좌정향에서 바라볼 때 물이 처음 보이는 방위에 해당한 것이고<坤申方鑿塘事 坤申於本園 癸坐爲生方) 네모난 연못이 아닌 둥근 연못을 파게 된 것은 수성에는 오형이 있고 오행과 같아서 둥근 연못은 금체(솥을 엎어 놓은 형상)가 되고 금체는 계방(북쪽에서 동쪽으로 15도 방향)에서 물을 얻기 때문이라고 하였다.

 

조선조의 왕릉 중에는 연못이 조성된 곳이 여러 곳 있으나 연못 이름이 있는 곳은 정조의 건릉 천년지와 곤신지 및 영월 장릉의 경액지등 세 곳뿐이다. 옛날에는 하늘은 둥글고 땅은 모가 났다(天道曰圓 地道曰方, 회남자천문 훈)고 하고 둥근 것은 밝음을 주관하여 기운을 토해내고 모난 것은 어둠을 주관하여 기운을 삼킨다고 한다. 이를 모방하여 연못을 파는 양태를 사각형으로 팠다. 건릉의 수세를 살펴보면 우선수로서 흐르는 물길은 혈장을 안은 듯 흐르다, 좌측에서 흐르는 물길과 만나서 합수를 이룬다. 이 물은 흐르다가 다시 백호 자락을 따라서 지현굴곡(之玄 屈曲)을 이루며 구곡수로 흐르며 혈장에서는 보이지 않으며 마치 베를 짜는 것 같은 형국으로 서서히 빠져나간다. 건릉의 수구를 보면 관 쇄가 아주 잘 되어있다. 건릉은 융릉과 더불어 분합이 이루어진다. 혈장을 자세히 살펴보면 의 상부에서 물이 갈라져 혈의 아래쪽에서 물이 합을 이루어 1 분합이 이루어지며, 2 분합, 3분 합까지도 볼 수가 있다. 건릉에는 나성도 볼 수 있는 풍수지리적으로 길지의 수세가 있다.

 

5) 풍수 지리적 분석 

 

융릉은 용이 여의주를 희롱하는듯한 형국으로 반룡농주형국(蟠龍弄珠形局)이다. 정조가 178910월 대신들에게 말하기를 이 고을의 화산은 원래부터 영기가 모인 곳으로서 그 형상은 용이 여의주를 가지고 희롱하는 반룡 농주 형이라고 하였다. 당나라 복응천이 지은 설심부4편 혈형에는 반룡을 서릴 자를 써서 반룡이라 하였으며 즉, 구슬처럼 생긴 작은 산을 이리저리 서린 용의 장난감으로 삼아 논다는 반룡희주형국(蟠龍戱珠形局, 小山傍大山之下 未可指爲作蟠龍戱珠)이라 하였다. 정조 14(1790) 10월 사도세자의 넋을 위로하기 위하여 정조가 재궁을 세워 절이 완공되던 날 용이 여의주를 물고 승천하는(飛龍含珠昇天) 꿈을 꾸고 낙성식에 참여하여 절 이름을 갈양사에서 형국에 걸맞게 용주사로 정하였다고 한다.

 

건릉의 풍수적 특징을 보면 입수룡 1절은 경사가 크게 있어서 강하고 튼튼하고 보이는 모습이다. 관 쇄가 매우 잘되어 있으며 일자 문성과 함께 주변의 사격과 물이 혈장을 감싸 안은 듯한 국세를 가지고 있다. 좌선룡에 우 선수로 합국이며 주변을 이루고 있는 사신사가 좋고, 물길 또한 매우 좋다. 전체적으로 균형과 조화를 이루고 있다.

▲ 장정태 삼국유사문화원장    


 

 장정태 삼국유사문화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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