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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광현의 탐방 스케치●수원 화성
정조는 수원화성 건설이 숙명이었나
기사입력: 2020/05/12 [21:36]  최종편집: ⓒ 매일종교신문
황광현 대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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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익산 미륵사지 동탑: 사월 초파일 석가탄일을 맞아 수원화성 행궁광장에 익산 미륵사지 동원 9층 석탑이 자비의 탑으로 설치됐다. 이 동탑은 1993년 복원됐으며, 자비로운 마음이 꽃피는 세상을 기원하고 있다.     ©황광현

 

▲ 초파일 연등: 수원시 팔달산 동쪽에 소재한 대승원에서 밝힌 연등이다.  

 

▲ 서장대(화성장대): 장대(將臺)는 장수가 군사를 지휘하는 곳이다. 화성의 서쪽, 팔달산 정상에 위치한 서장대는 군사 지휘 본부이다. 편액(현판) 글씨는 정조가 썼다.  

 

▲ ‘고향의 봄’ 노래비: ‘고향의 봄’ 악보는 수원이 낳은 음악계의 선구자 홍난파(1898~1841) 선생이 지은 곡이다. 선생이 태어난 지 70돌에 노래비로 담아 팔달산 동쪽 기슭에 1968년 10월 15일 세웠다.  

 

▲ 정조대왕 동상: 세계문화유산 화성의 성곽을 축조하고 효를 실천한 그 귀감을 후세에 알리기 위해 동상 조형물을 설치했다.  

 

▲ 장용영 훈련 벽화: 세계문화유산 수원화성을 찾는 관광객을 위한 항상 쾌적하고 아름다운 진달래 화장실. 그 외벽 벽화는 정조 친위군사 장용영의 훈련 모습이다.  

 

▲ 동북각루(방화수류정): 화성의 동북 모퉁이에 위치해 성 주변을 관방(關防) 할 수 있는 요해처(要害處)로 비상시는 군사지휘소의 구실을 하는 곳이다.    

 

▲ 공방거리 벽화: 수원화성 공방의 거리 벽에 벽돌로 화성장대를 디자인한 벽화이다.  

 

▲ 성곽 정원: 화홍문에서 동장대로 가는 길 성곽 밖의 정원에 동북포루(東北舖樓)가 모퉁이에 보인다.    © 황광현


정조는 수원화성 건설이 숙명이었나

 

조선 제22대 정조대왕정조(正祖), 1752~1800의 지극한 효심과 더불어 정치개혁을 실현시키기 위해 축성된 성곽도시가 수원화성이다. 왕위에 오른 직후 아버지 사도세자의 존호(尊號)를 장헌세자(莊獻世子)로 올리고, 아버지의 묘소인 수은묘(垂恩墓)의 이름을 영우원(永祐園)으로 높였다. 1789(정조 13)에 양주 배봉산(현재 서울 동대문구 전농동) 기슭에 있던 아버지의 묘소 영우원을 조선 최대 길지(吉地)로 알려진 옛 수원 화산(花山, 현재 화성시 태안읍)으로 이장(移葬)했다. 일찍이 실학의 선구자 반계 유형원(磻溪柳馨遠)이 수원(水原)은 땅의 국세(國勢)가 크게 트여 가히 큰 고을을 조성하는 데 마땅한 곳이라 했다. 풍수지리상 명당으로 알려진 북쪽 20리 수원 팔달산(八達山, 146m) 기슭 아래로 화산의 백성들을 이주했다. 조선시대는 왕이나 세자의 묘소가 들어서면 그 무덤을 보호하기 위해 주위 10리 이내의 민가를 철거하는 법이 있었다.

 

정조는 이주해온 백성들에게 구실(세금이나 공과금) 대신으로 부담시키던 강제 노역인 요역(徭役)을 면제하는 여러 가지 혜택을 주었다. 그 결과 만 1년이 되었을 때 원주민 63, 구읍(舊邑) 221, 인근지역 294, 전라도경상도충청도 등 타관 141호 모두 719호의 민가가 들어섰다. 이러한 혜택이 큰 도시로 변모돼 갔다. 여기에 여론이 성곽 축성에 힘이 모아졌으며, 행궁의 수비를 위해 반드시 필요한 방안이었다.

 

정조는 홍문관 다산 정약용(茶山丁若鏞)에게 화성 성제(城制) 구상을 지시하였다. 조선과 중국의 성제를 연구한 성설(城說)’을 화성 축성 1년 전에 정조에게 올렸다. 아버지 장헌세자의 복권을 통해 정통성을 확고히 하는 일이기도 했으며, 화성은 삼도(三道, 충청도경상도전라도)로 통하는 관문이요 수도 서울을 방어하는 요새지였다.

 

수원 팔달산의 옛 이름은 탑산이었다. 사계절 따라 색동옷으로 바꿔가며 주민들을 안아주는 산. 역사가 있고 생명을 주는 어머니의 품속 구실을 한 산이었다. 고려 공민왕 때 대사성 집현전 제학을 지낸 이고(李皐, 1338~1420)가 은퇴 뒤 탑산 아래로 은거하여 날마다 탑산 오르기를 즐기며 살았다. 이성계가 조선을 건국하여 이고에게 벼슬(경기우도 안염사)을 내렸으나, 탑산이 떠나기 싫어 벼슬을 마다했다. 그 산이 어떤 산인지 이성계(태조 2, 1394)가 화공에게 탑산을 그려오게 하여 그린 산을 보고 산을 떠나기 싫어 할 만 하구나하며 사통팔달로 막힘이 없이 아름다우니 팔달산이라 하여라고 조선 태조의 명명으로 부르게 됐다.

 

정조는 화성에 내려와 팔달산을 중심으로 둥글게 성곽 축성 위치를 선정하려고 했다. 그러나 며칠 뒤 꿈에 어린동자가 나타나 성 쌓는 놀이가 산을 의지하여 산은 한쪽 편에 두고 성을 쌓고 있었다. 이어서 땅에 하얀 분가루로 성 모양을 그렸다. 잠에서 깨어난 정조는 선명한 꿈이어서 급히 화성으로 내려왔다. 하얀 서리가 놀랍게도 꿈에서 본대로 성터 자리에 내려있지 않은가. 서리가 내린 자리에 성곽을 축성하도록 명하여 쌓았다는 일화이다.

 

성곽 축조는 정조 18년인 17942월부터 시작돼 17969월에 완공됐다. 그 둘레는 5,744m로 성곽은 돌과 벽돌을 섞어서 축조된 점이 특이하다. 축조 뒤 400여 년이 지나온 동안 시설물이 무너지고, 특히 일제강점기와 625 전쟁을 겪으면서 파손이 많았다. 이는 화성성역의궤의 자료로 1975년부터 보수복원하여 현재에 이르고 있다.

 

화성 사랑이 특출한 정조는 행차할 때마다 화성과 인근 주민들만이 응시할 수 있는 특별 과거시험인 별시를 실시했다. 이는 다른 지역민이 얼마나 부러워하였을까. 또한 상공업 중심의 경제도시로 육성하기 위해 화성의 주민에게 요역을 면제해 주고 상인이나 장인에게도 여러 가지 혜택을 주어 상공업을 발달시켰다. 그리고 도시 주변에 저수지와 둔전을 설치하여 안정적인 농업기반을 확보했으며, 자급자족의 도시가 되도록 하였다. 이러한 여건 조성이 4년 뒤 1,347호에 5,000여 주민이 팔달산 기슭 아래로 보금자리를 잡았다.

 

팔달산 동쪽 중간 기슭에 정조 기념 동상 조형물이 방문객을 반갑게 맞아주었다. 화성 성곽을 축조하고 효를 몸소 실천하며 끝없는 개혁과 백성사랑으로 위대한 업적을 이룩한 정조대왕. 동상 주위 석물에 새긴 발자취는 후세에게 영원한 산교육의 광장이 되리라. 1997124일 유네스코(UNESCO) 세계문화유산으로 등록된 보물을 안겨주었다. 그 보은에 수원 시민의 뜻에 전 국민의 뜻도 모아 20036월 기념 동상을 준공했으리라 되새겨 본다. (황광현 대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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