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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교산 요양병원과 고려장

신민형 | 기사입력 2020/07/05 [22:53]
하늘소풍길 산책

광교산 요양병원과 고려장

하늘소풍길 산책

신민형 | 입력 : 2020/07/05 [22:53]

 


광교마을
요양병원서 시작하는 코스로 광교산 오르며 고려장이 생각났다. 장인·장모없는 나의 함도 받아주시는 등 장인 역할을 하셨던 큰 동서가 요양병원으로 옮기신게 마음 한편에 걸렸던 탓일게다.

 

요양병원 입원이야말로 어느 산 속 깊은 골짜기보다 완벽한 고려장이다. 이젠 광교산 어디에도 고려장 모실 만한 공간이 없다. 린 병원서 4km 이상 떨어진 천년약수터 골짜기는 곳곳에 벤치를 설치한 유원지가 됐다. 이곳서 동쪽 골짜기로 5km여 더 들어간 손골성지는 300년전 천주교 신자들이 숨어 들어간 으슥한 곳이었으나 이미 1866년 병인박해 때 포졸들에 발각되어 순교자가 나왔다. 아직도 외진 곳이지만 고려장 장소로는 택도 없다.

 

천년약수터에서 손골성지로 가는 아늑한 숲길을 보며 차라리 그 옛날 깊은 산속 고려장이 요양병원보다 훨씬 현명한 선택이 아닌가 하는 생각을 해보았다.

 

나이 들고 병들어 거동조차 못하는 몸으로 병원 오가다가 집에선 감당 못할 보조 의료기 주렁주렁 차고 가는 요양병원이니 그 삶의 의미가 얼마나 있겠는가. 그동안 대소변 등 받아내는 고된 수발로 진이 빠진 배우자 등 가족에겐 잠시 해방감을 맛보겠지만 집에서 내쳐진 환자의 고독감, 우울증은 얼마나 클 것인가. 차라리 의식을 잃거나 치매인 상태가 나을 듯 싶다. 그리고 곧 환자의 심경을 더 아프게 느낄 가족들이 아닌가. 자식들이야 제 새끼 신경쓰거나 일에 묻히며 그 아픔을 잊을테지만 간병을 하려해도 그럴 기력이 없는 배우자의 마음은 얼마나 쓰라리겠는가.

 

몸과 마음이 깊이 병든 아내를 헌신적으로 간병하는 남편을 그린 프랑스 영화 '아무르'가 떠오른다. 어머니가 수년간 요양병원 생활을 마치고 세상 떠나셨을 즈음 이 영화를 보며 칙칙한 현실을 그린 형편없는 영화라고 혹평했었다. 그러나 지금 다시 보게된다면 남편의 현실적 심리를 잘 표현한 영화로 평가할 것 같다. 그 표정의 변화를 읽으며 아내와 자신의 존엄을 위해 아내를 목졸라 죽일 수밖에 없는 상황을 이해할 거 같다. 그리고 그 죽음 과정을 아름답게 승화시킨 장면에 감탄할 듯 하다.

 

광교산 으슥한 숲길을 찾아 걸으며 어머니를 지게에 메고 고려장 치르러 가는 아들을 상상해봤다. 아들은 어머니를 떠나 보내는 슬픈 마음에 정신없이 산길에 들어섰고, 어머니는 혹여 자식이 집에 돌아갈 길을 잃을까, 있는 힘을 다해 나뭇가지를 꺾어 돌아갈 길의 표시를 해놓았다.

 

아들은 도저히 감당할 수 없는 어머니 병고를 대자연에 맡겼고 어머니는 마지막 희생과 보람으로 아들의 슬픔을 대신했다. 요양병원에선 느낄 수 없는 인간의 존엄성 아닌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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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이제 생로병사, 희노애락의 번뇌에서 어느정도 해방되었다고 자부했었다. 부모님 모두 여의고 세상풍파 겪으며 아들 딸 출가시켜 세 손주 보았으니 그럴 때도 됐다고 느꼈다. 그러나 막상 장인같은 큰 동서의 요양병원 입원을 마주하니 초탈함은 금방 허물어진다.

 

얼마나 자신을 잘 다스리며 주변을 챙겨주었던 분인가. 세속적으로도 성공해 남부러울거 없는 재력과 당당함으로 근년까지 자신만만하게 생활하셨는데...그렇기에 그 모든 것이 허망할 뿐이다. 더욱이 자존심 강했던 분이 아무런 의지없이 외롭게 병원에 버려지고 있다는 좌절감과 당혹감은 얼마나 클까. 거동 못한 1년여 집에서의 병상생활로 어느정도 각오는 했겠지만 요양병원에 적응하려면 얼마나 시간이 걸릴까.

 

큰 동서는 아마도 지금의 내 나이가 인생의 전성기이었던 듯 싶다. 은퇴 후 생활의 여유 갖고 현지 월드컵 축구경기에 열광하고 처형과 함께 시베리아 횡단열차와 크루즈 세계여행 등 인생의 버컷리스트를 실천했으니 여한이 없을 듯 했다. 아마도 큰 동서는 버킷리스트들을 실천하는 자신을 대견해 하면서 한편으론 생로병사, 희노애락의 번뇌를 어느정도 벗어났다고 느끼셨을 것이다. 마치 지금의 나처럼...

 

그때 모든 것 다 놓고 의료보조기만 주렁주렁 달고 요양병원에 들어가리라고 상상은 하셨을까. 초탈했다고 느꼈던 생로병사, 희노애락의 번뇌가 죽음을 앞두고 다시 찾아오리라 어떻게 알 수 있었겠는가.

 

죽음만이 번뇌에서 벗어나게 해준다는 사실을 인생의 전성기에서 느끼는 것은 여간 힘든 일이 아니다. 단지 느끼는 척 할 뿐이다. 다만 이런 번뇌들이 바로 삶의 과정이란 사실을 받아들이는 것이 초탈이라 하지만 그 초탈 역시 커다란 번뇌의 한 과정일 것이다.

 

그래서 존엄성을 유지하며 대자연에서 죽음을 맞이하는 고려장이 존엄성을 잃어가며 박탈감과 고독감 속에 죽어가는 요양병원 입원보다 훨씬 현명하고 바람직한 것이라는 생각을 더욱 들게한다. 떠나는 자, 남아있는 자 모두에게 말이다. 큰 동서와 처형의 아픔이 너무 진하게 전해져 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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