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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사, 배우, 사업가 신영균 "돈은 좋은데 쓰면 행복하고 보상있어"
원로배우 신영균 "내 나이 92세...100세에는 멋있는 영화 만들어야겠다는 욕심생겨"
기사입력: 2020/09/18 [15:47]  최종편집: ⓒ 매일종교신문
문윤홍 대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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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로배우 신영균 "내 나이 92...100세에는 멋있는 영화 만들어야겠다는 욕심생겨

 

노병은 죽지 않는다. 다만 사라질 뿐이다.(Old soldiers never die. They just fade away.)" 한국전쟁의 최고 영웅 더글라스 맥아더의 명언이다. 이 말은 역시 6·25 한국전쟁의 영웅으로, 지난 710일 별세한 백선엽 장군(예비역 대장) 회고록의 제목이기도 하다. 이 명언에 어울리는 인물이 또 있으니 원로배우 신영균이다.

 

신영균이 제56회 대종상 공로상을 수상했다. 신영균은 63일 서울 광진구 그랜드워커힐서울호텔 씨어터홀에서 열린 제56회 대종상영화제에서 공로상 트로피를 받았다. 그가 수상 무대에 오르자 심사위원이자 한국영화100년추진위원장인 이장호 감독, 시상자로 나선 배우 안성기 한지일 이병헌 등 후배 영화인들이 대거 무대에 올라 꽃다발을 건네면서 축하했고 객석에 자리한 영화인들은 기립박수로 존경의 마음을 표했다

▲ 제56회 대종상영화제에서 공로상을 수상하고 소감을 밝히는 원로배우 신영균 /사진=MBN 캡쳐    

  

이 자리에서 신영균은 “"옛날 생각이 난다. 32세에 제1 대종상영화제에서 남우주연상을 탔다. 그때 너무 기쁘고 좋아서 잠을 못 잤던 기억이 나는데 60년이 흘렀다. 지금 내 나이가 92세다. 이 공로상을 받으니까 책임감이 느껴진다. 영화 인생을 멋있게 마무리 잘하라는 상인 것 같다고 말했다. 이어 그는 “60년대 영화는 충무로가 뿌리가 됐는데 그때 영화인들이 고생을 많이 했다. 그때 만든 뿌리가 튼튼해져서 한국영화 100년을 맞아 봉준호 감독이 기생충으로 아카데미, 칸에서 한국영화의 우수성을 과감하게 인정받았다. 안성기 후배도 휴스턴에서 남우주연상을 받았다. 세계에서 우리 한국영화를 인정해주고 있다. 그래서 90이 넘은 나이에 욕심이 생긴다. 내가 92세이니까 8년만 열심히 몸 관리해서 100세에 멋있는 영화를 만들어야겠다는 욕심이 생긴다. 지금 시청하고 있는 여러분들, 사랑하는 후배들, 많이 관심 가지고 많이 도와주시길 바란다는 소감으로 큰 박수를 받았다.

 

구순의 신영균은 지금도 규칙적으로 생활한다. 오전 10시 서울 명동에 있는 호텔28 사무실에 출근하며 하루를 시작한다. 호텔28은 영화 촬영장 분위기가 물씬 나는 부티크 호텔로, ‘28’은 이곳 명예회장인 그가 태어난 해(1928)를 가리킨다. 1m7268, 회색 재킷 정장에 중절모를 쓴 그의 인상은 ‘28년생보다 ‘28청춘에 가깝다.

 

그의 남다른 건강 비법은 뭘까. 신영균은 한창 촬영할 때는 피곤하니까 초콜릿·사탕을 많이 먹었다. 40대 중반쯤 되니 당뇨가 왔다. 그래서 단 음식은 주의하고 하루 5000보 이상 걸으려고 노력한다. 매일 오후 헬스장에 가서 한 시간 이상 가벼운 근육운동과 러닝머신을 한다.” 당뇨 외에 배우시절 너무 소리를 질러서인지 기관지가 좀 안 좋은 것 빼고는 다 괜찮다고 한다

 

남은 것 다 베풀고 가면서 인생을 아름답게 마무리하고 싶다

 

원로배우 신영균은 2019년 남은 재산을 사회에 환원하겠다고 밝혀 화제가 됐다. 독실한 크리스천인 그는 그러면서 자신의 관() 속에는 성경책 하나 넣어 함께 묻어 달라고 했다. 그는 이미 2010년 명보극장(명보아트홀)과 제주 신영영화박물관 등 500억원 규모의 사유재산을 한국영화 발전에 써 달라며 기탁했고 모교인 서울대에도 시가 100억원 상당의 대지를 발전기금으로 기부했다. 아울러 남은 인생을 아름답게 마무리 하고 싶다는 뜻도 밝혔다

 

신영균이 재산의 사회 환원을 밝히면서 전한 말은 그저 남은 것 다 베풀고 가면서 인생을 아름답게 마무리하고 싶다는 것이었다. 그는 일제 강점기 신사참배를 거부하며 하나님에 대한 신앙을 지킨 고() 주기철 목사의 일대기를 다룬 영화 일사각오’(一死覺悟) 주연을 맡기도 했다. 일생을 신앙인답게 향기를 발하며 살다가 이 세상 끝자락에 다다라서는 하나님으로부터 받은 은혜를 세상에 나누고 가겠다는 뜻을 밝혔다.  

▲ 한국 영화 발전을 위해 500억원 규모의 사유재산을 기부한 원로배우 신영균

 

신영균은 가장 좋아하는 성경구절이 고린도전서 1510절이라고 했다. ‘내가 나 된 것은 하나님의 은혜로 된 것이니 내게 주신 그의 은혜가 헛되지 아니하여 내가 모든 사람들보다 더 많이 수고를 하였으나 내가 한 것이 아니오 오직 하나님과 함께하신 하나님의 은혜로다.’

 

개신교 장로인 그는 "돈을 버는 것도 중요하지만 쓰기를 잘 써야한다. 좋은데 쓰면 행복하고 그 만큼 보상이 꼭 있다. 빌 게이츠 같은 부호들이 기부하고 돈을 잘 쓰기 때문에 미국이 세계강국이고 잘 되는 것이다. 기부문화 정착에 내가 조금이라도 보탬이 됐으면 좋겠다"고 뜻을 전혔다.

 

신영균은 1928년 황해도 출신으로 초등학교 시절 크리스마스 때 교회에서 연극을 한 것을 계기로 연기를 시작했다. 20대 때에는 학업과 연기에 모두 두각을 보여 진로를 두고 고민하다가 서울대 치과대학을 지원해 합격하면서 잠깐 연기를 접었다. 이후 군의관으로 복무하며 개인병원을 개업해 많은 돈을 벌었지만 연기에 대한 미련을 버리지 못하고 다시 연극무대에 섰고, 이어서 영화에 출연하게 되었다.

 

그는 주로 60~70년대 영화에서 활동했던 배우이다. 선이 굵은 남성적인 캐릭터를 내세웠기 때문에 사극이나 시대극, 혹은 가부장적인 남성 역할로 활동했는데, 신상옥 감독의 연산군이나 대원군 등의 역할로 유명했고, 6.25한국전쟁 당시 대한민국 공군을 소재로 한 영화 빨간 마후라의 주인공을 맡기도 했다. 그밖에도 '미워도 다시한번' 시리즈 등으로 거의 300여 편에 달하는 영화에서 열연했다. 청룡영화제 남우주연상을 3회나 수상했고, 1978년 영화 화조를 끝으로 배우생활을 접었다

 

신영균은 사업수완도 뛰어나 1977년에는 서울 을지로의 랜드마크 격인 명보극장(현 명보아트홀)을 인수했고, 1991년에는 맥도날드의 한국법인 신맥을 설립하는 등 현금으로만 500억을 상회하는 개인재산을 보유했다. 그런데 2010년 명보극장과 제주도 신영영화박물관을 영화계, 예술계의 공유재산으로 기증해 화제가 되었다. 또한 정치에도 뛰어들어 1996년 제15대 신한국당 국회의원, 2000년에는 제16대 한나라당 국회의원을 지낸 바 있다.  

 

신앙생활에 바탕한 감사와 보은의 삶 살아온 신영균가정의 행복, 삶의 목표 1순위  

 

신영균의 인생은 결기 그 자체였다. 한마디로 곧고 바르고 과단성 있는 성격으로 버텨낸 것이다. 누구나 그렇게 한번쯤 살고픈 생각이 드는, 실제론 어려운 삶이었다.

 

"조금 재미없게 살았다. 그래도 원칙 하나만큼은 절대 놓치지 않았다고 자부한다."

 

신영균은 어떻게 살았기에 가족과 지인들 앞에서 구순의 나이에 이렇게 당당하게 말할 수 있는 것일까. 한마디로 실수 없는 삶을 살았다고 할 수 있다. 연예인으로 살면서 수도자처럼 지낸 것이다. 술과 담배는 물론이고 여자와 도박도 멀리했다. 그러니 문제가 생길 리 없었다.

 

독실한 기독교 집안에서 태어난 데다 서울대 치과대학을 졸업한 치과의사로 결혼까지 한 상태에서 영화배우가 되었다. 그랬으니 배우가 되는 과정도 남달랐다. 운영이 잘되는 치과병원을 휴업하고 영화배우로 나설 때 아내의 동의를 구해야 했다.

 

신영균의 연기생활은 이렇게 남다르게 시작되었다. 학창시절 연극과 공부에 동시에 재능을 보였다. 고등학교를 졸업하자마자 연극을 선택했다. 당연히 대학 진학은 포기했다.

 

하지만 자식에 대한 기대가 컸던 어머니는 강하게 만류했으나 신영균의 고집을 꺾을 수는 없었다. 결국 19세 때 연기와 공부 중에서 연기를 택했다. 그러나 열정만 갖고 찾아간 연극판은 미래를 걸만한 분야가 아니었다. 불안하게 연극판을 버틴 신영균은 안정된 직업의 필요성을 자각했다. 그래서 연극을 선택한 열정으로 이번에는 공부를 시작했다. 그래서 남보다 2년 늦게 서울대 치과대학에 진학해 치과의사 자격증을 취득한 뒤 군의관으로 병역의무를 마치고, 치과병원을 개업했다.

 

연기판을 떠난 지 10여 년. 신영균은 평범한 생활인이 된 것처럼 보였다. 치과의사가 되어 치과병원을 운영하며 결혼까지 해서 생활의 여유를 갖게 되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연기에 대한 열정을 잃어버린 것은 아니었다. 치과의사 생활을 하면서 국립극단에 입단해 연기 활동을 재개한 까닭이었다.  

▲ 영화배우와 일상생활의 자신을 철저히 분리해 생활한 신영균  

 

30대에 다시 선택한 연기는 10대 후반에 대학 진학을 포기하며 결단했을 때와는 여러모로 달랐다. 안정된 직업과 가정이 있는 상태에서 여가 수준으로 선택한 일이기 때문이었다. 그렇게 연기를 재개했다.

 

그런데 바로 그때 신영균에게 결단을 요구하는 순간이면서 기회가 찾아왔다. 조긍하 감독이 제작을 준비 중이던 영화 '과부'에서 머슴 성칠이로 출연했으면 좋겠다는 제안이 온 것이다. 마다할 신영균이 아니었다. 자연스레 출연이 이루어지고 영화배우가 되었다.

 

신영균은 하루하루 열심히 살아온 자신에게 찾아온 기회라고 생각했다. 치과의사로 진료하면서 연기에 대한 열정을 버리지 않고 지켜온 자신에게 영화판이 주는 선물이라고 여긴 것이다.

 

그래서 과거에 어머니처럼 만류하는 아내를 설득해서 연기를 시작했다. 그렇게 시작된 영화배우 생활이었다. 신영균은 치과의사가 환자의 치아를 치료하는 자세로 연기에 몰입했다. 항상 온전한 연기가 나올 수 있도록 일상생활을 청결하게 관리했다.

 

그래서 신영균의 충무로 영화판 별명은 '바른생활 사나이'. 화면 속 신영균과 일상생활의 신영균을 철저히 분리했다. 신영균은 자신의 연기를 치과의사가 환자 치료할 때 하얀 가운을 입는 것으로 여겼다. 하얀 가운을 벗으면 신영균은 자연인 신영균이라는 사실을 잊지 않았다. 그는 가정의 행복을 삶의 목표 1순위로 삼았다.

 

그런 철저함으로 연기에 몰입하니 인기와 명예가 동시에 찾아왔다. 각종 영화에서 주연을 도맡았고, 그 영화들은 국내외 영화제에서 신영균에게 주연배우상을 가져다주었다. 이에 신영균은 끊임없이 감사했다. 그리고 자신이 세운 원칙을 꿋꿋이 지켜나갔다.

 

신영균은 1960년에 영화판에 들어와 1978년까지 무려 320편의 영화를 찍었다. 한 달에 1.5편을 찍는 고강도 스케줄이었다. 여한 없는 인생이었다. 2012년에는 이순재, 심양홍 등 서울대 연극동아리 출신 후배들과 함께 '하얀 중립국'이라는 연극에 출연해 대중들에게 모처럼 배우로써의 존재감을 드러냈다

 

신영균은 철저한 자기 관리 못지않게 탄탄한 재무관리도 했다. 그래서 수백억 원대 재산을 일궜다. 이는 신영균이 강조하는 신앙생활의 힘이 바탕이 되었음에 틀림없다. 그런 재산을 신영균은 자식들에게 남기지 않고 사회에 환원하기로 했다. 가족들의 적극적인 찬성이 있었기에 가능했다. 신영균은 자기 관리, 재무 관리 못지않게 자녀 교육에서도 성공했다. 엄청난 재산을 앞에 두면 누구나 욕심이 생기게 마련이다. 그러나 신영균의 자녀들은 아버지가 숭고한 의지를 결행할 수 있게 동의했다. 가진 게 많든 적든 하나를 가지면 또 하나를 탐하는 게 보통 사람의 마음이다. 물질만능의 시대를 살아가는 현대인은 특히 재물을 우상화하고 부()의 유혹에 빠지기 쉽다. 맘모나스란 헬라어를 의인화한 맘몬(mammon)은 재물, 재물의 신을 뜻한다. 맘몬을 섬기는 건 하나님과 대립하는 것이다.

 

"바쁘게 살다 보니 마음과 달리 혹시 제대로 베풀지 않았는지 모르겠다. 명보극장을 기부했을 때 정말 기뻤고, 가족들도 적극 지지해줬다. 충무로의 자취를 살릴 수 있었잖은가."

 

평생 영화인으로 살아온 신영균은 자신을 아끼고 사랑해준 영화팬들은 물론 동료 영화인들에 대한 애정을 숨기지 않는다. 영화판에서 번 돈을 영화판으로 환원하겠다는 것은 10대 후반, 그리고 30대 초반 연기를 선택할 때 연기에 가진 고마움을 잊지 않았기에 가능한 일이다. 재산 환원은 그런 고마움을 평생 간직했기에 가능하다. 감사로 인생을 마무리하는 신영균은 한국판 노블레스 오블리주(noblesse oblige: 높은 사회적 신분에 상응하는 도덕적 의무)의 대표적 전형이다.

수암(守岩) 문 윤 홍<大記者/칼럼니스트>moon4758@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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