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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왕릉 조영의 사상적 배경●태종의 헌릉

장정태 논설위원 | 기사입력 2020/09/18 [21:36]
대모산 헌릉입지에 대한 풍수분석

조선왕릉 조영의 사상적 배경●태종의 헌릉

대모산 헌릉입지에 대한 풍수분석

장정태 논설위원 | 입력 : 2020/09/18 [21:36]

 

▲ 태종과 왕비 원경왕후 민씨의 헌릉


대모산 헌릉입지에 대한 풍수분석

 

세종실록 9, 세종 297일 임신 2번째 기사를 보면 헌릉은 태종이 직접 상왕 시절에 직접 지시하여 정한 곳임을 알 수가 있다.

 

그 내용을 보면 광주 대모산에 천광하는데, 깊이가 133촌이니, 주척으로 계량한 것이다. 흙의 빛이 번지르르하고 윤택하여 수기는 없었다. 상왕이 일찍이 이양달을 시켜 수릉을 살펴보았다가 이 땅을 얻은 것이다. 또 진산 부원군 하륜과 지신사 유사눌을 시켜 살펴보게 하였던 곳이다. 이날에 이르러 상왕이 선지로 이르기를, 조금 동쪽으로 하고 그의 오른편을 비워 두어서 나의 백세 뒤에 쓰게 하라." 하였다.

 

이 내용으로 보면 태종은 당시 천장의 깊이 그리고 토색에 대해 논의를 한 것을 보면 태종이 풍수에 대한 관심도가 높았음을 알 수가 있으며 또한 이러한 사실은 세종실록에 자세히 나와 있다. 여기서 주척은 1자가 20cm 정도이며 왕릉의 천광은 10자 내외이므로 깊이가 2m 정도 임을 알 수가 있겠다. 세종 6(1424) 512일은 헌릉에 신도비 세웠다.

 

예문관 대제학 변계량(1369-1430.4.24)이 짓고 예조 참의 성개(?-1440.10.18)가 쓰고 동지좌군총제 윤회(1380-1436.3.12 57세 졸)가 음기를 지었다. 윤회가 지은 음기에 산형세가 다음과 같이 기록되었다.

 

산 내맥은 장백산<태종 14(1414) 821 일조에 백두산이라고 처음 불렀음>으로부터 내려와 남쪽으로 수천 리를 넘어 상주의 속리산에 이르고 여기서 꺾어 북서쪽으로 또 수백 리를 달려 과천의 청계산에 이르고 또 꺾여 북동으로 달려 한강을 등지고 멈췄는데 이곳이 바로 대모산< 세종실록지리지 광주 목에는 할미산이라 하였고 정조실록정조 24(1800) 59일에 헌릉의 주봉은 대모산으로 표기하였음>이다. 땅의 영기가 멈추어 솟아 맑은 기운이 꿈틀거리니 아아 하늘이 만들고 땅이 간직하여 능침의 길조로 기다림인가라고 하였다.

 

▲ 과천의 청계산에서 하나의 용맥이 북동쪽으로 떨어져 나온 구룡산(306m). 구룡산서 왼쪽으로 돌아서 헌릉의 주산인 대모산(290m)이 연결되어 있다.  


풍수적 분석

 

1) 용세

과천의 청계산에서 하나의 용맥이 북동쪽으로 떨어져 나와 경부고속도로를 넘어 서초구 구룡산(306m)이 되고 구룡산에서 왼쪽으로 돌아서 헌릉의 주산인 대모산<290m, 정조 24(1800) 59 일조에는 세상 사람들은 할미산이라고 하여 대모산이라고 하였음>이 되어 속리산을 뒤돌아보는 회룡고조형국이 된다. 구룡산에서 오른쪽으로 돌아 헌릉 전방에 있는 재실 뒷산(91.5m)이 백호겸 횡안산이 되고 대모산에서 왼쪽으로 돌아서 후미 안골로 뻗은 산줄기가 청룡이 되며 조산은 성남대로 건너편의 인릉산(326.5m)이다.

 

대모산의 내룡이 몸을 해치고 임방(북쪽에서 서쪽으로 15도 방향)으로 곧게 내려와 두 줄기로 나누어서 하나는 건해방(북쪽에서 서쪽으로 30~45도 방향)으로 55~60고지에 머물러서 건좌손향(동남향)이 되어 헌릉이 되고 다른 하나는 임방으로 60~65고지에 머물러서 자좌오향(정남향)이 되어 인릉이다. 주산과 좌우의 여러 봉우리 모두 토산으로 돌이 있으니 이는 임방으로서 임방에 응하고 돌로서 돌을 호응한 것이므로 이른바 자식이 어미를 떠나지 아니하여 기운이 온전한 땅이라 하였으니 산 이름 대모산에 걸맞다고 볼 수 있다. 명당수가 세곡천의 지류로서 오는 것은 근원이 없고 나가는 것은 흐름이 없으며 현무 주작 청룡 백호의 사방이 합하여 두루 돌았으니 최상의 길지라고 하였다<세종실록세종 27(1445) 44 >.

 

헌릉의 용세는 병풍바위에서 유룡, 대모산 쪽을 향해 나아간다. 이 용은 대모산(292m) 지점을 중심으로 하여 주 능선이 되어 간룡 내려오다 건룡으로 틀어 직 입수한다. 이 용은 구룡산(308m)지점에서 경유룡으로 183를 지나 대모산에 이르게 된 용이다. 헌릉의 백호 사가 되는 용이다.

 

또 다른 한 용으로 유룡으로 달리다 259m 지점에서 자룡으로 방향을 틀어 가는 용이 헌릉의 청룡 사가 된다. 주산에서 내려와 우선하며 입수하는 용이 순조의 인릉이다. 좌선을 하며 내려온 용은 헌릉이 된다. 헌릉과 인릉의 용세는 병풍바위에서 달려온 용이 대모산 묘룡 방향으로 동진하다 대모산에서 오룡으로 방향을 전환하여 A 지점으로 행룡 하며 헌릉과 인릉의 입술용이 되어 현무 봉이 된다. 다시 지현을 하며 내려오다 속기하여 입수하여 헌릉과 인릉을 결재하게 된다..

 

2)

 

혈의 입수는 좌선룡으로 입수하였으며 입장하였으며, 혈장 주변에는 삼성과 귀성과 요성이 있어 혈장을 더욱 튼튼히 보호하고 있다. 좌향은 건좌손향이다. 세종실록 세종 1277일 을사 두 번째기가에는 전 서운 장루 최양선이 글을 올리기를, "신이 그윽이 생각건대, 헌릉의 산맥을 배양하는 일이 심중에 간 절하와 잠시도 늦출 수 없는 일이옵기에 삼가 신의 소견을 써서 아래에 조열하나이다. 라는 상소의 글이 있다. 이는 입수 부분의 속기 처가 낮은 감이 있어 논의한 내용으로 보인다.

 

3) 사세

 

현무는 259m에서 서향하여 오다가 292m 지점의 대모산에서 임자룡 방향으로 틀어 내려오다 분지한다. 행룡 하다 109m 지점에서 매우 급하게 건룡으로 틀어 행룡 하였다. 이후 123m 지점에서 기복 하여 106m 지점에서 지현하고, 과협을 하며 행룡 하였다. 61m 지점의 현무 입수다. 안산은 산형이 금성의 형태이다. 안산(63m)과 조산(87m)이 혈장을 보호하는 나성처럼 되어있어 길사의 형태이다. 청룡을 살펴보면 과협처에서 건룡손향 하여 혈장을 보호하며 내려오다 간인룡 방향을 틀어 마무리하였다.

 

백호를 보면 주산에서 자룡오향으로 방향을 전환하여 내려오다 건룡손향으로 다시 전환하여 행룡 하였다. 계속 내려오다 계곡을 만나 멈추었다.

 

4) 수세

 

헌릉의 수세는 당 앞이 전답으로 되어있다. 평전수로 물이 있는 그것으로 인해 할 수가 있다. 물의 흐름은 보이지 않는다. 그러나 주변 사가 환표하듯 둥글게 나성 역할을 하고 있어 물이 있음을 알 수가 있고 물은 합수되어 길수로 보는 직(; 실로 섬유를 짤 때 한 올, 한 올씩 교차로 왔다 갔다 하며 비단을 짜는 방법으로 물의 흐름이 이런 모습으로 혈장 주변에 오래 머물면 구곡수가 되고 평전수가 된다고 풍수지리에서는 본다.)과 같은 물이다. 헌릉은 좌선룡으로 입수하며 물은 우선수가 되어 용수배합이 된다다. 물길의 흐름은 Y자형이다 분합의 원리에 합치한며, 물은 우측 계곡의 물길을 만나 합수가 된후 다시 천천히 백호 쪽으로 방향을 전환하여 빠져나가는 모습을 하고 있다. 이러한 결과로 볼 때 헌릉의 물은 양이 풍부하고 물의 흐름 또한 좋은 길지 임을 알 수가 있다.

 

5) 풍수지리적 특징

 

입수룡에 속기와 입수가 있어 당이 크며, 용호의 갓 부분은 비보로 소나무숲이 식재되어 있다. 입수 1절과 2절은 낮게 보이며 삼성중 하나인 귀성의 사가 있다. 청룡이 백호보다 크다. 청룡의 안대로 안산이 자리 잡고 있으며 청룡 국쇄이다. 헌릉은 당이 넓고 국이 크다. 역시 건원릉과 같이 조산과 안산이 거리가 있기 때문이다. 당이 큰 반면 앞이 허해 보이는 형국이다.

 

이러한 점을 보완하기 위해 정자각과 신도비로 비보를 하고 혈장 주변에 소나무를 심는 등의 비보는 건원릉과 일맥상통한다. 태종의 헌릉은 세종실록을 통해 보면 여러 차례 풍수적 논란이 있었음을 알 수가 있다. 입수 맥의 봉 요에 관련한 논란이 그 예이다. 헌인릉은 처음부터 태종이 여러 가지 혈증을 판단하여 태종이 먼저 길지라는 판단을 한 연후에 정혈을 한 길지이다.

장정태 삼국유사문화원장(철학박사. 한국불교사 전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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