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간증/가수 윤형주(온누리교회 장로)

매일종교신문 | 기사입력 2011/03/29 [14:38]

간증/가수 윤형주(온누리교회 장로)

매일종교신문 | 입력 : 2011/03/29 [14:38]

간증/가수 윤형주(온누리교회 장로)


“나의 사명은 예수를 만난 사건의 증인이 되는 것”


부인 김보경 여사와 자리를 함께 한 윤형주씨.

 

나의 집안 어른들은 함경북도 회령에 사시다가 하나님을 제대로 믿고 애국하기 위해 만주 용정으로 이주하셨다. 나의 가문의 가훈은 하나님사랑과 나라사랑이다. 저의 아들이 조기유학을 가서 학교에 우리나라 국경일에 태극기를 달게 하고, 한국 아이들의 기숙사에 걸게 했다. 시인 윤동주는 우리 형제 중의 맏형이다. 그는 신앙시인이다. 그의 시에는 하나님의 말씀대로 살려고 몸부림치는 고뇌가 담겨있다.

6년 전 새벽기도 중에 하나님이 나에게 꿈을 주셨다. 나와 내 가족이 미국 뉴욕 카네기홀에서 콘서트를 갖는 것으로 내가 생각해도 불가능한 꿈이었다. 그런데 해가 바뀌면서 그 꿈이 현실로 가까이 다가오는 느낌이 들었다. 큰 딸이 작곡하는 길로 가고, 둘째 딸이 소프라노 길로 갔다. 신청서를 냈고, 1년 후 연락이 왔다. “당신은 한국의 통기타문화를 일궜고, 많은 곡이 히트해서 한국 사람들에게 사랑을 받고 있다. 당신 혼자 이곳에서 공연을 갖기 원한다면 긍정적으로 허가를 검토하겠다.”는 것이었다. 즉, ‘당신 가족들은 왜 따라오느냐. 검증된 뮤지션이냐, 국제적으로 인정받고 있느냐. 이곳이 가족 잔치하는 덴 줄 아느냐’는 비슷한 충고였다. 하마터면 그 꿈을 접을 뿐 했다. 그러나 믿음이 생겨 다시 신청서를 냈다.


카네기홀에서 가족콘서트 열다


‘우리 가족이 카네기홀에 서야 할 이유가 있다. 첫째 딸은 서울음대를 졸업하고 버클리 음대에서 공부하고 있으며, 둘째 딸은 오스트리아 모차르트국립음악원을 나온 소프라노이고 베르디국립음대를 나와 독일에서 데뷔하게 되고, 내 아내는 어려서부터 영락교회, 온누리교회에서 소프라노를 하고 있다. 아들은 대학생이지만 기타를 잘치고 노래도 잘한다. 큰 사위는 의사이지만 작곡을 잘하고, 둘째 사위는 이태리 밀라노에서 공부한 바리톤이다. 우리 가족이 한 가정 안에서 얼마나 다양한 문화가 창조될 수 있는지 보여주겠다. 클래식을 한 딸과 내가 노래하고, 클래식을 한 아들과 사위가 노래하고, 내가 아내와 뮤지컬을 노래하고… 22개 각각 다른 장르를 그곳에서 발표하는 것은 특별한 의미가 있다.’

마침내 허락을 얻어 작년 2003년 7월 1~2일 카네기홀 100년사에 처음으로 한 가족이 무대에 오르는 영광된 콘서트를 성황리에 마쳤다. 올해는 조선일보 주최로 세종문화회관에서 8월 11일~12일 카네기홀에서의 콘서트를 그대로 재연하기로 했다. 가정이 뭔지, 가족이 얼마나 소중한지 깨달았다는 관객들의 반응에 조선일보가 가정에 관한 메시지를 찾다가 우리 가족의 콘서트를 선택한 것이다.

카네기홀에서 마지막 부른 우리 집안의 주제곡은 내가 세상에 태어나 제일 먼저 배운 노래이다. 내가 어렸을 적부터 나에게 찬송을 가르쳐주신 분은 여든일곱 되신 김귀순 권사님, 나의 어머니이다. 어머니가 즐겨 불렀던 찬송이 내 찬송이 되었고, 아내의 찬송이 되었으며, 나의 세 자녀의 찬송이 되었고, 두 사위의 찬송이 되었다. 어머니가 그 찬송을 하실 때 하나님이 주신 위로와 평강과 소망이 우리 부부와 나의 자녀와 손자들에게 임하는 것을 본다. ‘저 장미꽃 위에 이슬’ 이 찬송은 우리 어머니의 찬송, 우리 부부의 찬송, 우리 자녀들의 찬송이다. 내가 하나님께 돌아가기에는 너무 부끄러워 떨고 있을 때 일어나 하나님께 걸어가게 한 것은 어머니의 이 찬송이었다.


내 인생을 전환시킨 것은 찬송


나는 내성적이고 두려움이 많았다. 초등학교 2학년 때 아버지가 KBS노래자랑 ‘누가 누가 잘하나’ 프로에 나가게 했는데 어찌나 긴장했던지 가사를 바꿔 불러 탈락하고 말았다. 그 후 사람이 무서워졌다. 노래 부르라 할까봐 소풍가서도 숲에 숨어 있었다. 그런 내가 KBS 열린음악회 프로를 만들었고, 초대 MC가 됐다. 여의도광장에서 12만 명을 앉혀놓고 두 시간 전국 생방송을 진행했다. 그 많은 사람 앞에서 방송을 진행하며 노래한 나의 어린 날 모습은 숲에 숨어있었던 한 소년이었다. 이런 나의 성격이 어떻게 바꿔졌느냐. 고등학교 때 어머니에 의해 성가대 들어갔는데 테너파트 맨 끝에 앉혔다. 찬송하러 일어나면 전 교인들이 나만 바라보는 것 같아 악보도 안 보였다. 그런데 찬양은 용기와 담대함을 줬다. 사람들의 눈빛을 바라보게 했다. 찬양은 내 성격을 바꿔줬다.

동신교회 고등부 성가대를 잊을 수가 없다. 베이스파트의 한 선배는 헌금시간만 되면 내 등을 찌르며 연보 돈 꿔 달라, 가르자고 했다. 나의 아버님은 총각 때에 장로직분을 받았고, 어머니는 캐나다재단의 신학교를 나와 선교사로 헌신한 사람이다. 이런 믿음의 부모 밑에 자란 나는 헌금은 정성껏 준비해서 하나님께 드리는 예물이라 생각하고 갈등이 많았다. 선배는 “헌금은 하나님에게 드리는 것이니, 네 것도 아닌데 왜 그러냐”고 반문했다. 그 선배가 가수 조영남 씨이다.

선배는 내가 평생 잊을 수 없는 장면을 보여줬다. 강문고등학교 3학년 조영남이 고난주간 대예배 때 특별찬송을 불렀는데 어른 4백여 명이 눈물을 닦았다. 나는 그 찬양을 들으면서 하나님이 주신 목소리에 감탄했고, 노래에 대한 꿈을 갖게 됐다. 조영남이 어느 날 기타를 가져와서 노래를 불렀는데 이 세상사람 같지 않았다. 종일 뒤를 따라다니며 수발을 했으나 만지지도 못하게 했다. 그때 자극을 받아 고등학교 3학년 때 팝송 가사 2백여 곡을 외웠다. 연대 의대를 우수한 성적으로 합격한 후 경희대 학장인 아버지께 기타를 사달라고 했으나 ‘우리 가문에 풍각쟁이는 없다.’며 반대했다. 그러나 졸라서 끝내 기타를 샀고, 기타 학원에 이틀간 다니다 독학을 했다. 노래 하나를 익혀 이대․연대 합동카니발에서 불렀는데 난리가 났다. 그 후 미팅이나 페스티발, 카니발 등에 초대되어 바빠졌고, 유명해졌다. 신문에 나오고 TV에도 나갔다. 이어 무교동 세시봉에 내 무대도 갖게 됐다. 거기서 만난 송창식과 36년 전 한국에 통기타문화를 만들었다. 하얀 손수건, 웨딩 케익, 슬픈 운명, 축제의 노래, 축제의 밤 등 우리 노래가 전국으로 퍼져나가기 시작했다.


정상에서 죄수로-성경에서 빛 찾아


공연이 끝나면 여학생들은 내 안경을 빼앗아갔고, 옷의 단추도 떼어가고, 머리카락도 뽑아갔다. 고관대작 자녀들도 나를 만나고자 난리였다. 캐딜락을 탄 중학교 1학년 박지만 군도 나를 만나러 왔다. 주일날 오후 극장 가자고 하여 갔더니 전회 매진된 극장 가운데 좌석이 텅텅 비어있었고, 나와 지만 군이 앉아 관람했다. 나는 21살에 자가용을 사고 기사를 고용했으며, 맨션도 샀다. 당시 나는 사람들이 갖고자 하는 모든 것을 가졌다.

박수를 받는 그 자리는 하나님이 보시기에는 더럽고, 악하고, 오만하고, 죽음의 그림자가 드리운 자리였다. 1975년 12월 2일 한국의 연예인 200명이 구속된 대마초사건에 내가 1호로 구속되었다. 내가 데뷔시킨 후배들이 마리화나를 구해다 줬는데 보사부 마약반이 들이닥쳐 나의 손에 수갑을 채워 질질 끌고 감방에 처넣었다. 내 인생은 자살밖에 없었다. 유명한 세 명의 변호사도 나를 구해내지 못했다. 어머니가 면회 와서 준 성경을 벽에 던졌다. 어느 날 이리저리 채이던 어머님의 성경이 햇살을 받는 순간 진지하게 읽어볼 마음이 들었다. 성경은 내 영혼에 두꺼운 껍질을 한 꺼풀 한 꺼풀 벗겨나갔다. 영하 16도의 추운 겨울 감방에서 내 영혼에 말씀이 닿는 순간 나의 인생관과 가치와 철학은 무참히 부숴 졌다.

나는 의과공부를 했지만 의사되는 게 싫어 광고회사를 차렸다. 1976년부터 만든 CM송이 1400곡인데 한국 CM송의 3분의 2를 내가 만들었다. 한국 10대 CM송 중 7~8곡이 내가 만든 곡이다. 농심 ‘새우깡’은 연간 매출액이 7백50억 원이다. 장애인사역을 22년째 하고 있는데 해도 해도 끝이 없다. 이 사역 앞에서 지칠 때가 있다. 요즘은 잠 좀 잤으면 좋겠다. 내 영과 육이 지칠 때 나를 일어나게 하는 것은 서대문구치소에서 밤마다 울며 부른 ‘주 예수 내 맘에 들어와’ 찬송이다.

내가 술을 배운 것은 의대생시절 시체를 해부할 때 교수님이 양주를 줘서 마시고부터다. 당시에는 하룻밤에 양주 1병반을 마셔도 끄떡없었다. 방송할 때도 술 실컷 마셔도 사고 안치고 재미있게 진행하여 기자들은 내 이름 윤형주의 ‘주’ 자를 ‘술 주’(酒) 자로 표기할 정도였다. 그러나 내 마음속에 예수님이 들어온 후에는 소주 두 잔을 마시고 밤새 토사광란을 일으켜 창자가 뒤집어지는 아픔이 왔다. 

어느 날 예수님이 나를 만나주셨다. 내가 이 땅에서 해야 할 사명은 예수님을 만난 사건의 증인이 되라는 것이었다. 땅 끝까지 가서 예수님의 증인이 되라, 전도하라, 선교하라는 명령이다. 예수님이 우리 곁을 떠나시면서 우리에게 주신 마지막 사명이 전도와 선교이다. 어느 날 주님 앞에서 서는 날 나에게 주신 달란트를 통해 얼마나 많은 열매를 맺었는가 하는 것이다. 나 때문에 구원 받고 천국 간 사람이 몇 사람이나 되는가 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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