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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종시 출범 후 첫 건축문화재 '비암사 극락보전' 보물 지정

이광열 기자 | 기사입력 2020/12/24 [19:51]
17세기 전란의 경제적 어려움에 규모 축소 건축술 관심

세종시 출범 후 첫 건축문화재 '비암사 극락보전' 보물 지정

17세기 전란의 경제적 어려움에 규모 축소 건축술 관심

이광열 기자 | 입력 : 2020/12/24 [19:51]

 

   

세종시의 유일한 조선 사찰인 '비암사 극락보전(碑巖寺 極樂寶殿·세종시 유형문화재 제1)'이 보물로 지정된다. 세종시 출범 이후 건축물로는 처음으로 국가 보물이 탄생한 것으로 조선 시대 사찰 문화재를 이해하는데 기여할 것이란 기대를 받고 있다.

 

문화재청은 한 달간 각계 의견을 수렴하고 문화재위원회 심의를 거쳐 지정 여부를 확정한다고 24일 밝혔다.

 

전의면 다방리에 있는 '비암사 극락보전'은 정면 세 칸, 측면 두 칸의 팔작지붕 건물이다. 통상 조선 불전은 측면이 세 칸이다. 이보다 한 칸이 적은 건 임진왜란과 병자호란의 영향으로 추정된다. 사찰이 경제적 어려움에 직면해 규모가 축소된 것이다. 이 불전은 예불공간도 협소하다. 안둘렛간을 감싸는 기둥을 뒤로 물리고 후불벽(後佛壁)을 세워 공간을 확보하는 정면 세 칸, 측면 세 칸의 방식이 그대로 적용됐다.

 

부적합한 조합에도 팔작집(네 귀에 모두 추녀를 달아 지은 집)으로 완성된 건 어칸 전면 기둥과 내부 고주 사이를 대들보로 가로지르고, 좌우 협칸에 충량을 각각 세 본씩 설치했기 때문이다. 충량은 한쪽은 대들보에 걸리고 반대쪽은 외곽기둥에 걸리는 대들보와 직각을 이루는 보다. 보통 건물에서는 한 본만 둔다. '비암사 극락보전'은 측면 주 칸이 긴 편이다. 충량을 보조로 설치해 추녀에 걸리는 하중을 감당하게 했다.

 

처마 끝의 무게를 받치기 위해 기둥머리에 짜 맞추는 공포는 내외 3출목으로 구성했다. 조선 중기에는 내부 출목(出目)이 외부보다 늘어나는 경향이 있었다. 측면 두 칸의 팔작집의 경우는 더 그랬다. 하지만 이 건축물은 내외 출목을 똑같이 짜 올렸다. 문화재청 측은 "고창 선운사 대웅전, 김천 직지사 대웅전 등에서 볼 수 있는 형태"라고 설명했다.

 

비암사는 통일신라 도선 국사가 창건했다고 전한다. 삼국시대 유물인 계유명전씨아미타불비상(癸酉銘全氏阿彌陀佛碑像·국보 제106) 등이 출토되면서 널리 알려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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