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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양문화와 불교-④ 그리스-인도 왕국과 불교

보검 이치란 스님 | 기사입력 2021/01/18 [08:19]
그리스 신화 영웅 헤라클레스, 금강역사(金剛力士)의 기원이 되다

서양문화와 불교-④ 그리스-인도 왕국과 불교

그리스 신화 영웅 헤라클레스, 금강역사(金剛力士)의 기원이 되다

보검 이치란 스님 | 입력 : 2021/01/18 [08:19]

 

▲ 그리스 신화에 등장하는 영웅, 헤라클레스가 부처님의 수호자인 바즈라빠니(금강수 보살 金剛手菩薩)로 묘사되어 있다. 바즈라빠니(오른 쪽)는 금강역사 또는 인왕(仁王)으로도 알려져 있으며, 우리나라 사찰에서는 수문 신장(守門 神將) 역할을 하고 있다. 2세기 간다라. 대영박물관 소장.    

 

그리스 신화 영웅 헤라클레스, 금강역사(金剛力士)의 기원이 되다   

 

알렉산더 대왕의 동방원정은 그의 죽음으로 막을 내리고, 3대 후계 왕국이 출현했다. 알렉산더 대왕이 이집트 페르시아 인도서북부를 점령하고 나서 동서융합 정책을 시도했다. 이집트 문명, 페르시아 문명, 인도문명은 너무나 다른 문명체계였다. 공격과 점령을 하면서도 문화적 이질감을 느낀 것은 당연했고, 그리스 정신으로 통합해야 한다는 생각을 하게 된 것이다. 어디까지나 통치전략이었다.

 

우선 다수의 그리스 사람을 소아시아(터키) 지역으로 이주시켰다. 또한 가장 획기적인 이벤트는 국제결혼이었는데, 그리스 사람과 피정복 지역의 주민들을 결혼시켰고 페르시아인 관리들을 대거 등용했다. 알렉산더 자신도 페르시아의 군주이자 적이었던 다리우스 3세의 딸과 결혼했으며, 페르시아 여성과 자신의 그리스 군인들 간의 사실혼을 정식 결혼으로 인정했다. 알렉산더의 동서 융합 정책은 동방과 서방문화를 융합시켰는데, 그리스 조각예술은 불교 미술에도 큰 영향을 끼쳤고, 결과적으로 간다라 미술이라는 새로운 미술 양식이 만들어졌다.

 

간다라 미술은 그리스 불교 미술로도 알려져 있다. 인도의 서북단 간다라 지방을 중심으로 알렉산더 인도 침공 이후, 수세기 동안 번영한 불교미술이다. 불교에서는 부처님을 상()으로 표현하지 않았는데 그리스 헬레니즘 영향을 받으면서 그리스 조각수법을 사용하여 불상이나 보살상을 만들어서 불상 숭배의 유행이 일어나게 되었다.

 

간다라 불상의 특징은 머리카락이 물결모양의 장발이고 용모는 눈언저리가 깊고 콧대가 우뚝한 모습이 마치 서양인(그리스인) 같고 착의(着衣)의 주름이 깊게 새겨져 그 모양이 자연스럽다. 조각은 거의 부조(浮彫)이고 대개는 스투파() 기단(基壇)의 벽면을 장식하였다. 간다라 조각은 대월지족이 세운 쿠샨왕조의 카니슈카 왕 때에 많은 발전을 하였다. 그리스 식 불상 조각으로 대표되는 이 불교 미술은 발생지의 이름을 따서 간다라 미술이라 불린다. 간다라에서 시작된 불상 숭배는 불상 조각의 기술과 함께, 인도 본토는 물론 중앙아시아를 거쳐 중국·한국·일본에까지 전래되었다.

 

알렉산더가 죽자, 후계자 선정을 두고 휘하 장군들 사이에서는 의견일치를 보지 못하고, 타협안으로 알렉산더 아들이 출생하면 알렉산더 4세로 옹립한다는 것과, 당장은 알렉산더 이복동생 필리포스 3세를 명목상의 왕으로 추대했다. 하지만 이것은 다만 명분상으로 이렇게 정했을 뿐이다. 알렉산더 후계 장군들은 40여 년 동안 후계계승(디아도코) 전쟁에 돌입하면서 결국은 프톨레마이오스의 이집트, 셀레우코스의 메소포타미아와 중앙아시아, 아틀리드 아나톨리아, 안티고노스의 마케도니아가 서로 권력 투쟁을 벌였고, 진행과정 중 알렉산더 4세와 필리포스 3세는 불운을 당했다.

▲ 그리스 조각예술의 영향을 받아서 제작한 간다라의 부조(浮彫). 마이뜨레야보살, 고타마 붓다, 관세음보살상. 2〜3세기, 간다라.

 

셀레우코스 1세 니카토르(기원전 358~기원전 281)는 간다라 지역 등 가장 넓은 영토를 차지한 알렉산더 후계자였다. 그는 알렉산더 제국이 분열된 후, 바빌론의 총독으로 임명되었고, 후에 시리아와 이란 지역에 셀레우코스 제국을 세웠다. 알렉산더가 생존하면서 정복했던 지역에는 알렉산드리아란 이름을 붙인 도시를 건설했는데, 이것은 헬레니즘 문화 형성에 큰 역할을 하였다.

 

앞에서도 살펴봤지만, 그리스의 헬레니즘은 알렉산더 제국 동쪽 끝자락인 박트리아까지 미치게 되었다. 이 지역은 인도 마우리아 왕조와 접경을 이루면서 헬레니즘과 불교가 맞닥뜨리는 문화의 최전선이 되었다. 셀레우코스는 이란 동부에 많은 그리스 식민도시를 세웠고, 이 지역은 그리스어가 주로 쓰이게 되었다.

 

알렉산더 제국은 몇 개의 왕국으로 분열되었고 셀레우코스 왕국은 그리스와 페르시아의 융합으로 탄생되었다. 그리스인과 페르시아인은 하나의 왕국이 되었다. 지금도 파키스탄 페샤와르에 가면 후예들이 잔존하고 있다.

 

박트리아는 셀레우코스 왕국과 이집트의 프톨레마이오스가 싸우는 과정에서 독립을 선언하고 박트리아 왕국을 세웠다. 이 무렵 파르티아도 셀레우코스 제국에서 독립을 선포하였다.

▲ 그리스-박트리아 왕국(기원전 256년~기원전 125년).  

 

결국 그리스-박트리아 왕국과 페르시아 계(이란)의 파르티아 왕국이 출현하게 되었다. 박트리아와 파르티아는 인도로부터 전파되는 불교와 관련을 맺게 된다. 그리스-박트리아는 한 때 매우 강성하였고, 영토를 인도까지 팽창시켰다. 박트리아는 힌두쿠시 산맥을 넘어 북부 아프가니스탄과 인더스 강 유역 일대를 정복하기 시작했다.

 

그리스-박트리아 왕국의 드미트리우스 왕은 인도로 침입하면서 북인도의 북서부 지역에서 여러 인도-그리스 왕국들이 등장하였으며, 탁실라, 사갈라를 포함한 여러 도시들을 통치하였다. 인도-그리스 왕들은 인도 지역에 그리스 문화를 전파하며 헬레니즘 문화의 일종인 인도-그리스 문화를 형성하였으며, 이들의 문화는 불상 등의 불교 예술에 영향을 미쳤다. 기원전 10년 인도-그리스 왕국은 스키타이의 침입으로 사라졌으며 그 후 이들의 영토에 파르티아와 쿠샨 제국이 들어섰다

▲ 스키타이족(사카)은 동부 이란어군을 사용한 이란계 유라시아 유목민들이며 기원전 9세기에서 기원후 4세기까지 중부 유라시아 스텝의 넓은 지역들에서 거주했다.    

 

그리스-박트리아 왕국은 토하라인(인도-유럽어족)들이 세운 월지국에 의해서 멸망하고 말았다. 월지는 본래 현재의 중국 간쑤(감숙) 지역에 존재했으나, 흉노의 공격을 받아 서쪽의 박트리아로 쫓겨난 후 그리스-박트리아를 멸망시켰다. 장건이 한나라의 사절로서 기원전 128년 월지를 방문하였을 때 그들이 소그디아나(이란계)를 지배하고 있었다고 기록했다. 이후 박트리아에 자리 잡은 월지국 세력의 일부가 인도로 들어가서 쿠샨 제국을 건설하게 된다.

 

그리스-박트리아, 그리스인도 왕국은 헬레니즘을 이 지역에 전파했다. 인도 마우리아 왕조 의 등장은 우리가 담론하려고 하는 그레코(그리스 사상)와 인도 불교사상과의 교섭을 전개해 가는데 주역이 된다. 마우리아 등장 이전에 이미 알렉산더 인도침공이후 수 세기동안 그리스 문화는 인도 서북단 지역에 꾸준히 전파되고 있었다.

▲ 간다라의 중심지였던 페샤와르 구시가지. 그리스-박트리아, 쿠샨왕조 시대에 불교가 융성했으나, 998년 터키계 무슬림이 점령하면서 이슬람화되었고, 16세기에는 무굴제국의 악바르에 의해 지금의 페샤와르(고지대의 요새)란 이름이 붙여졌으며, 1838년 시크 왕국에 점령되었다가 1849년에는 제2차 시크 전쟁에서 승리한 영국의 통치 아래 들어갔다가 지금은 파키스탄에 속해 있다.    

 

그리스문화(철학)와 인도문화(불교사상)가 자연스럽게 충돌을 일으킬 수밖에 없었다. 그리스 헬레니즘과 인도사상(불교)은 큰 흐름이어서 강하게 충돌하면서 융합이 이루어지고 몇 세기가 흐르면서 그레코(그리스)-불교가 탄생하게 된다. 그레코-불교를 탐구하기 전에 인도불교를 입력해 둠으로써 서양문화와 불교라는 대주제(大主題)에 접근해 가는데 배경과 초석이 될 수 밖에 없다.

 

불교는 처음 고타마 붓다가 출현한 기원전 5세기경에는 인도 16대국 시기의 마가다 지역에 한정되어 있었다. 알렉산더가 이집트, 페르시아를 점령하고 인도 서북단 힌두쿠시 산맥을 넘어 박트리아 지역에 이르렀을 때쯤이면, 2차 경전 결집이 끝나고 승단은 보수 상좌부와 진보적인 대중부로 분열한 즈음이었다. 불교가 힌두쿠시 산맥을 넘는 데는 마우리아 왕조의 아소카 대왕이라는 대불교도 왕이 등장하게 됐기 때문이다.

 

알렉산더는 마우리아 제국이 탄생하기 전에 인도침공을 기도했다. 하지만 마우리아 왕조 초대 황제인 찬드라굽타는 상비군과 관료제를 기반으로 국력을 키운 후 북인도 지역을 통일하였다. 셀레우코스 제국과의 전쟁을 벌여 오늘날의 아프가니스탄 및 파키스탄 지역을 차지하였으며, 중부 인도와 남인도 지역을 정벌, 인도 아대륙의 대부분을 통일하였다.

 

마우리아 제국은 당시 셀레우코스 제국이 지배하던 인더스 강 서쪽의 아프가니스탄과 파키스탄 지역을 얻었다. 또한 이 전쟁을 계기로 프톨레마이오스 왕국, 셀레우코스 제국 등의 헬레니즘 문명들과 본격적으로 교류하기 시작함으로써 마우리아 제국의 위상이 한층 격상되는 결과를 가져오게 되었다.

 

마우리아 제국은 기원전 320년부터 기원전 185년까지 남아시아 지역 대부분을 지배한 고전기 인도의 제국으로, 인도 역사상 최초의 통일 왕조이자 동시에 제일 넓은 면적을 지녔던 국가이다. 3대 황제인 아소카 치세에는 마우리아 제국의 해상 무역을 방해하던 칼링가 왕국을 정복하였고 인도 아대륙 전역을 통일하면서 전성기를 맞이하였다.

 

아소카 대왕(재위: 기원전273~기원전 232)3차 불교경전 결집을 후원하고 불교 전도단(傳道團)을 각지에 파견했다. 기원전 250년경 아소카 대왕은 카슈미르, 간다라와 그리스 식민지에 불교 전도승을 파견했다.

 

미국 출신 철학자, 역사학자, 저술가인 윌 듀란트(Will Durant: 18851981)는 아소카 왕이 불교 전도승들을 인도의 모든 지역과 스리랑카, 시리아, 이집트, 그리스까지 보냈으며, 아마도 이들이 기독교 윤리학을 만드는 데 도움을 주었을 것이라고 지적한다.

 

일부 서양 불교학자들은 예수가 불교의 영향을 받았을 가능성이 있으며, 토마스 복음서와 나그 함마디 텍스트(Nag Hammadi texts)는 이러한 불교의 영향을 받았음을 배제하지 않고 있다. 이렇게 본다면 서양문화의 원류인 헤브라이즘. 헬레니즘과 불교와의 교섭은 23년 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고 할 수 있다.

보검<세계불교네트워크 코리아 대표>  

▲ 필자 보검스님이 터키 이스탄불 향신료 시장인 므스르 차르슈 바자르에서 포즈를 취하고 있다. 이집트에서 주로 향신료를 수입해서 판매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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