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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정태 박사의 한국종교학●공자가 모셔진 오산시 궐리사(闕里祠)(下)

장정태 논설위원 | 기사입력 2021/02/03 [08:21]
궐리사의 유적과 기능

장정태 박사의 한국종교학●공자가 모셔진 오산시 궐리사(闕里祠)(下)

궐리사의 유적과 기능

장정태 논설위원 | 입력 : 2021/02/03 [08:21]

<연재순서

()오산 궐리사 건립의 배경

()궐리사의 유적과 기능

 

청나라 문화정책에 대한 반향과 화성 육성하려는 정조의 정치적 목적

 

17929월 정조는 공자의 후손이 살았던 수원부에 공자의 초상을 모신 사당이 있었음을 거론하면서 그 자리에 궐리사를 짓도록 명하였다. 그리고 이듬해 궐리사가 완공되자 직접 궐리사라는 편액을 써서 하사하고, 내각에 소장된 공자 영정과 수원부 광덕면(현재 평택시 현덕면)의 영당에 봉안된 공자 영정을 이안시켜 공자 후손들이 제사를 지내게 하였다. 이로 인해 노성 궐리사에 이어 화성 궐리사(궐리사, 오산 궐리사, 화성 궐리사라는 여러 가지 명칭을 현재는 사용하고 있으나 여기에서는 실록에 있는 명칭은 궐리사로 표현하고, 나머지는 화성 궐리사로 기입한다) 라는 이름의 또 하나의 공자 영당이 또 만들어진 것이다.

 

하지만 정조는 이전까지 공자 영정을 빌미로 서원이나 영당이 남설 되는 것을 경계하였고 공자를 모시는 제사의 사체(사리와 체면)와 도상의 진위에 대한 문제로 공자 영당과 공자 영정에 대해 부정적인 견해를 갖고 있었다. 그러므로 정조의 화성 궐리사 건립은 지극히 이례적이었다. 정조가 기존의 부정적인 견해를 바꿔 화성 궐리사를 건립한 이유에는 청나라 건륭제(6대 황제 17111799)의 문화정책에 대한 반향과 화성을 육성하고자 했던 정조의 정치적 목적이 숨어있다고 볼 수 있다.

 

원래 공자를 향사하는 일은 한나라 때 유교가 국교로 정해지면서 공자의 지위는 확고해졌고, 공자의 옛집이 있는 곡부(曲阜) 궐리사에서 제향을 올리는 것도 이때부터 시작되었다.

 

대명집례를 살피건대, 한나라 때에는 단지 궐리묘만 있었는데 후위 태화 13(489)에 비로소 경사에 문묘를 건립하였고, 당나라 고조 무덕 2(619)에 국자감에 문묘를 건립하여 제사하였으니, 이것이 국학에서 향사한 최초의 일이다. 그런데 마단림의 문헌동고와 구준의 대학연의보그리고 명나라 장황이 편찬한도서편에는 위나라 정시(正始, 위나라 제왕의 연호) 7(246)에 벽용(辟雍)에 제사하였다고 하였다. 이후 당나라 때에는 국자감에 별도로 공자묘를 세워 제향을 올렸으며 정관(당 태종 연호) 2년에 공자를 승격하여 산성(先聖)이라고 하였고, 개원(당 현종 연호) 27(739)에 왕으로 존숭하고 문선이라는 시호를 올렸고, 송나라 진종 대중상부 원년(1008)에 현상(玄聖)이라는 시호를 더 올렸다. 진종 5(1012)에 현()자가 휘를 범한다는 이유로 지성(至聖)이라고 개칭하였고, 동서 양무제를 채택하여 문묘 제도가 확정되었다. ()나라 무종이 1307년 대성(大成)이라는 시호를 더 올렸다.  

 

궐리사의 유적과 기능  

. 성묘본당

  

화성 궐리사는 문산 자락에 평지에 가까운 경사지를 깎아 남향으로 외삼문을 배치하여 외부와의 경계를 구획하고 있다. 건축적 의미에서 문은 하나의 공간 영역을 이루는 경계와 그 영역에 이르기 위한 통로 지점의 역할을 한다.

 

정문은 학문으로서 진입을 의미하는데 배운 학문은 반드시 그 문을 통해서 세상에 쓰여 져야 하며 이 문의 상징성은 누구든지 들어 갈 수가 있지만 아무나 들어갈 수는 없다는 다소 난해한 어휘로 표현된다. ‘궐리사현판이 붙은 솟을 대문이다. 본래의 의미는 초헌, 사인교, 가마, 말등이 드나들 수 있도록 좌우 양쪽의 행랑채보다 높게 용마루를 얹어 만든 문이었는데 점차 권문세가나 부유한 가문임을 과시하는 표본의 구실을 하게 되었다. 대문, 중문, 염문등 문의 수효도 많아 집이 크다는 뜻으로 열두 대문집이라 했다.품격이 있으며, 외삼문을 들어서면 양쪽으로 측백나무가 심어져 있다.

 

중국 곡부현에 공묘에도 수만 그루의 측백나무가 심어져 있다. 화성 궐리사에도 외삼문을 지나 내삼문으로 오르는 길 양쪽으로 도열해 있어 참배객을 맞이하고 있다. 계단을 오르면 묘정의 공간에 이른다. 성묘에서 홍살문까지의 공간이 공자의 도가 일이관지로 통하듯 한다.

 

화성 궐리사는 성균관이나 향교와 서원과 같이 제향 공간과 강학 공간을 갖추었다. 관학과 마찬가지로 사림의 교육을 위한 장소와 선현 봉사의 공간과 기능이 필요하였다. 다만 봉사의 대상이 문묘의 경우 국가적인 기준에 의해 선정된 것이었다면 화성 궐리사는 정조로부터 대상이 지정되었다.

 

내삼문을 지나면 나오는 성묘는 화성 궐리사 경내에서 가장 깊숙한 곳에 자리 잡고 있다. 성묘는 앞에만 문이 있고 사방으로 문이 없다. 채광만 약간 들어오게 되어 있다. 신을 모시는 곳은 근엄한 곳이기 때문에 창문도 크게 안 만들고 소박하고 검소하고 창문도 크게 안 만들며 아득하고 햇빛도 안 들어오게 하고 있다.

 

성묘는 제향 공간의 중심으로 화성 궐리사의 정신적인 지주가 되는 공자의 위패와 영정을 모시고 춘추로 제향을 지낸다. 주로 성균관이나 향교에서 공자와 그 제자들을 모시는 것과 달리 화성 궐리사의 성묘는 오직 공자 한 분만을 모시고 있다.

 

정면 3칸은 모두 격자 창문으로 소박하고 검소하지만, 창문을 측면 한 칸 뒤로 물려 설치하여 오히려 깊은 느낌을 준다. 측면 한 칸의 공간을 비워둠으로써 신을 모시는 곳의 근엄함을 시각적으로 나타내고 있다. 비교적 작은 규모의 성묘이지만 4 분합문의 창문을 걸쇠로 들어 올리면 제향의 공간을 바깥 정원까지 넓힐 수 있도록 하였다.

 

제향 공간의 중심에는 화성 궐리사의 정신적인 지주가 되는 공자의 위패와 영정을 모셨으며 춘추로 제향을 올린다. 성균관이나 향교에서는 공자와 그 제자들을 함께 모시는 것이 일반적이나 이와는 달리 화성 궐리사의 성묘는 오직 공자 한 분만을 모시고 있어 한국에서의 공자의 고향은 오직 화성 궐리사임을 보여 주고 있다.

 

. 성상전

 

산은 높지 않아도 신이 있으면 유명해지고 물은 깊지 않아도 용이 있으면 영기가 있다. 공자 제자의 가슴속에는 문산은 인과 도덕의 화신이고, 이 물은 지혜의 원천이라 느낀다. 인자는 산을 좋아하고 지혜로운 자는 물을 좋아한다.”는 공자의 말씀이다. 문산과 오산천이 있는 오산은 옛날부터 지혜로운 자와 인자가 찾아오는 그러한 지역이다.

 

19937월 중국 곡부시 인민 정부로부터 봉헌된 공자의 성상을 공씨대종회에서 성상을 조성하여 성균관에 봉안코자 하였으나 성균관의 사정이 여의치 못하여 화성 궐리사에 봉안하게 되었다. 8월 공자 성상봉수추진 위원회성역화 사업이 추진되었다. 솟을 삼문에 오르기 전에 좌우의 계단과는 달리 전면에 커다란 사각형의 돌이 비스듬히 박혀 있다. 이 돌을 답도라고 한다.

 

밟는 길이라는 뜻이다. 그러나 실제로는 이 돌은 밟고 지나가는 것이 아니라 가마를 탄 왕이 그 위로 지나가는 길이라는 뜻이 되겠다. 거기에는 성적도에 있는 이룡도를 본떠서 새겨져 있다. 답도 양옆에는 서수인 사자 두 마리가 있다.

 

. 행단

 

중국 곡부현 공묘의 행단은 대성문으로 들어서면 북쪽으로 대단히 웅장한 황유리와 건물이 보이는데 이것이 바로 대성전이다. 그 대성전의 계단 앞을 보면 중첨형 2층 누각 형식의 아담한 건축물이 있으니 이것이 곧 행단이다. 이는 공자가 가르침을 베풀던 곳으로 장자』 「어부편에 언급하기를 공자가 치유의 숲에서 놀고 횡단 위에서 앉아 쉬었으며 제자들은 공부하고 공자는 현금을 타며 노래하였다.”라 하였다. 송 시가 이전에 행단 건물이 없었다. 원래는 공자의 사당 자리인데 송 천희 2(1018)에 공자 제45세손 공도보가 문묘를 확대 건설하면서 정전을 뒤쪽으로 새로 건설하고 그 자리에 행단 건물을 건설하였다. 최초의 모습은 흙으로 만든 토대이고 주변에 은행나무를 심었다. 금나라 학사인 당회영이 행단이란 두 글자를 썼는데 지금도 곡부 행단 내에 보존되어 있다. 또 하나의 석비는 청나라 건륭제가 어필로 남긴 행단찬이다.

 

공자는 속수(육포 10) 이상을 행하는 것으로부터는 내 일찍이 가르치지 않은 적이 없노라.”라고 하였다. 예기 곡례편에 의하면, ‘천자는 울창주, 제후는 규, 경은 염소(), 대인은 기러기(, 선비는 꿩(), 서인은 집오리()를 선물로 쓴다고 한다. 오늘날 수업료에 해당하는 내용이다. 예나 지금이나 예를 갖춰 다른 사람을 방문할 때에는 선물을 가져가는 것이 통상적인데 당시 예법에서는 신분에 따라 선물의 범위를 규정하였다. 이때 선물에 해당하는 폐백이란 뜻의 는 지나치면 뇌물이 되기에 손에 들고 갈만한 물건으로 국한하였다. 당시의 교육제도는 귀족 관료들이 교육을 독점하고 있었는데, 공자는 민간 차원에서 강학을 시작하여 최초로 사학 제도를 도입하여 공부의 기풍을 불러일으킨 것이 공자의 행단강학이다. 공자가 집 뜰 안에 있는 은행나무 밑에 강단을 설치하여 강의를 시작한 데서 나온 말이다. 학문을 숭상한 정조가 은행나무의 의미를 생각하며 행단에 오르다라는 시를 지었다.

 

和氣冲然杏樹陰 좋은 기운 충만하고 은행나무 그늘졌는데

農山化雨語春琴 농산의 꽃비 속에 봄 거문고 소리 울리네

二三子各言其志 두 세 사람 각각 자기의 뜻을 말하지만

魚躍鳶飛是我心 물고기 뛰고 솔개 나는 게 바로 내 마음이라오

 

화성 궐리사의 행단은 중국 곡부궐리사 대성전 앞에 있는 행단을 참고로 하여 우리나라 궁궐식(宮闕式) 양식으로 조성되었다. 새 놀라고 꿩 나는 것 같다는 표현은 웅장하고 화려한 건물을 비유할 때 쓰는 말이다.

 

시경》〈사간공중에 우뚝 선 건 물의 모양은 마치 새가 깜짝 놀라서 날개를 펴는 듯하고, 화려하게 장식된 추녀는 마치 꿩이 날아 오르는 것 같다. 如鳥斯革, 如翬斯飛.라는 말이 나온다. 주희의 시경집전그 동우가 높게 일어남은 새가 놀라 낯빛을 변함과 같고, 처마가 화려하고 높으며 날아갈 듯함은 꿩이 날아 날개를 펴는 것과 같다. 대개 그 당의 아름다움이 이와 같다.”라는 말이 나온다.其棟宇峻起如鳥之驚而革也其簷阿華采而軒翔如翬之飛而矯其翼也蓋其堂之美如此

 

이처럼 아름답게 건축된 행단은 공자의 정신을 보여 주는 듯, 유교 정신을 고스란히 담고 있다.

 

 

행단 현판의 글씨는 당시 경기도지사 김문수 씨가 썼고 행단의 규모는 11529평이며 초익공 팔작지붕이다. 이곳 궐동은 산성의 세손들이 화성 궐리사를 중심으로 집거하던 집성촌이며 정조는 화성 궐리사를 창건한 배경도 역시 공자의 64세손인 문헌공 공서린의 보국충정을 기리고 공자의 도덕 문화를 꽃피워 문화국가로서의 명성을 드높이기 위한 정책의 소산이라 할 수 있다. 아담하고 고아한 이 건축물은 공자가 교육을 중시한 것에 대한 중요한 상징성을 갖는다. 현재 행단에서는 시민참여학교 궐리사 탐방학교, 하계에 실시하는 청소년 충효 예절교육, 전통혼례 등 다양하게 체험공간과 강학 공간으로 이용되고 있다

 

라.공자행교상

 

중국은 근대에 들어서서 공자를 둘러싸고 많은 비판과 정치적 파란을 일으켜왔다. 호적에서 비롯된 타도공자점(打倒孔子店)”이라는 구호는 중국 문화대혁명 시기에 비림비공(批林批孔)의 정치파동에서 절정을 이뤘다.

 

그만큼 공자는 동아시아에서 중세적 가치의 담지자이자 근대성 결핍의 원인 제공자였다. 그러나 오늘날 중국 공산당은 공자열풍을 주도하면서 세계에 중화주의 문화를 선전하고 국내 통치 시스템의 안정화를 꾀하고 있다. 공자상은 그 형식에 따라 행교상, 빙궤상, 승로상, 사구상, 성상, 대성지성문선지상등 다양하게 분류되었다. 그 중에서도 행교상은, 공자의 다른 형상들이 대부분 제사나 숭배를 위해 예배용으로 제작되었던 것에 반해 만세사표로서의 공자의 이미지를 대표하는 초상화의 전형으로 당대부터 현대까지 지속적으로 제작되었다.

 

 

공자행교상은 오도자(685년경760년 이후)에 의해 처음 그려졌다고 한다. 오도자는 화성이라고 불릴 정도로 그림을 잘 그렸다. 그가 그린 인물의 의대가 바람에 휘날리듯 보인다고 해서 오대당풍이라는 찬사가 붙을 정도였다. 공자행교상은 오도자의 전설적인 필력을 짐작할 수 있는 걸작으로 당대이래 현재까지 공자의 초상화로 가장 많이 알려진 작품이다.

 

공자상의 명칭을 정확하게 행교상으로 지칭한 데서 중요한 의미를 지닌다고 하겠다. ‘행교행하고 교한 공자의 삶즉 공자가 자신이 공부한 바를 제자들에게 가르치고 실천한 만세 사표로서의 삶을 압축한 표현이다. 공자상을 묘사한 작품은 사구상, 성상, 대성지성문선왕상 등 다양하지만 공자행교상이 공자를 상징하는 표상이 된 이유는 행교야말로 공자 삶의 본질을 가장 정확하게 드러낸 작품이기 때문이다.

 

현재 수원향교에서는 6.25 병화로 모든 자료가 소실되어 확인할 수 없었다. 또한 강릉향교와 오봉서원의 공자행교상의 옛 기록은 확인할 수 없었으며 현재 강릉향교에서 봉안하고 있는 채색된 공자 행교상은 1990년대 중국에서 구입해온 것이고 오봉서원의 공자행교상은 강릉향교의 것을 복사하여 봉안하고 있음을 확인 할 수 있었다. 이러한 점으로 보아 현재 화성 궐리사에 봉안된 공자영정은 1903년 황성신문 기사내용으로 보아 1851(철종2) 825일 강릉부에서 모셔온 영정으로 추정된다.

 

현재 화성 궐리사에 봉안된 공자 영정은 행교상으로 황색 비단에 채색본으로 그려졌다. 크기는 97.5*47.5로 좀이나 탈색 등 훼손 되지 않고 잘 보존된 영정이다. 현재 행교상으로 채색된 영정은 단 두 점으로 화성 궐리사와 호림박물관에 소장되어 있다. 그 가운데에서도 화성 궐리사 행교상은 공자의 모습을 한국인의 얼굴 모습으로 가장 잘 그린 뛰어난 영정으로 평가되고 있다.

 

공자의 행교상은 검은색 비단으로 상투를 모아 싼 치촬(緇撮)을 하고 심의는 큰소매에 긴 치마를 입었으며 고리를 신고 왼쪽 팔 겨드랑이 사이로 검은색 문도를 끼고 왼손이 오른 손을 감싼 채 양손을 올려 가슴 앞에 모은 공경한 모습이다. 약간의 주름진 이마는 넓어 시원하고 귀태가 둥글고 귓밥은 커서 복스럽다. 상대를 응시하는 눈동자와 흰 눈썹, 흰 수염, 빗어 올린 흰 머리카락은 범접하지 못할 신비스러움이 가득하다. 약간의 입을 벌려 앞니 4개가 보여 상대에게 말씀을 하려는 듯 부드러움이 묻어난다. , , , 빰 등에 나타난 부드러운 음영은 살아 계시는 듯하다. 풍성하고 커다란 심의와 교령과 대수의 깃은 구름 문양으로 여유로움을 나타내고 있다. 또한 길게 늘어진 장군은 공자의 넉넉함을 그대로 표현하였다. 풍성하고 커다란 도포와 도포 깃과 소매 끝단의 구름 문양, 길게 늘어진 치마는 공자의 넉넉함을 그대로 표현하였다. 머리, 눈썹, 수염 등 모발은 흰색으로 칠하였지만 덧칠을 한 얼굴에 음영이 잘 드러나 있다.

 

다만 공자의 얼굴 빰 부분에 약간의 곰팡이 흔적이 남아 있어 푸른색을 띠고 있다. 확대하여 본 결과 눈썹과 수염의 거친 표현 등으로 보아 왕실에서 그린 것이 아닌 지방에서 그린 것으로 여겨진다. 영정을 보관한 소나무 궤 또한 내부는 칠을 하지 않고 외부만 검은색 칠을 하였으나 퇴색이 되었다. 이 궤는 옷 칠이나 장식이 없고 궤를 열고 닫는 뚜껑 또한 궤위에 올려놓는 형태로 만들어져 단순하고 간결하다.

 

. 공자성적도 

 

한국의 유교는 제향·강학·교화의 기능을 비교적 유기적으로 구현해 왔다. 성균관(국학), 향교, 서원은 학교 시설 안에 문묘 혹은 대성전의 사원 공간을 결합함으로써 도통과 학통의 권위를 확보하고 과거제에 부응했다. 이들은 모두가 공자로부터 염원하는 학문 제국의 영토이자, 인륜적 가치 질서를 표상하는 종교적 성소였다. ‘공자성적도는 공자의 일생과 행적에서 의미 있는 사건을 뽑아 도해한 일종의 고사인물도이며, 성적도·공부자성적도·성적지도 등으로 지칭되기도 한다. 또한, 공자의 사상이나 행적을 편년체로 서술하고 있으므로 공자의 생애를 일목요연하게 그림으로 보면서 파악할 수 있고 그림을 통하여 공자의 행적과 그 사상을 쉽게 이해할 수 있다는 것이다. 공자의 제자는 모두 3천 명이 넘었다고 하는데 그중에서도 공자의 문하에서 학업에 힘써 육례에 통달한 사람은 72명이었다. 72명 중에서도 10명은 공문십철 또는 성문사과라고도 부르며, 공자의 제자 중 네 분야에서 가장 뛰어난 재능을 보인 제자를 지칭한다. 즉 덕행에는 안연·민자건·염백우·중궁 언어에는 재아·자공, 정사에는 염유·자로, 문학에는 자유·지하 등이 이에 해당한다.

 

공자성적도의 원천 자료가 되는 최초의 공자전은 전한의 사마천이 쓴 사기공자세가이며, 같은 책에 실린 중니제자열전도 보조자료로 활용되었다. 초기에는 공자와 노자의 만남과 같은 특정한 사건이 단편적으로 그려지다가 시대가 내려오면서 생애의 주요 사건과 일화를 수십 폭에 도해한 공자 성적도가 만들어졌다.

 

화성 궐리사 목판본에는 공자탄생에 얽힌 일화, 공자 유소년기의 행적, 미관이지만 직무에 성실했던 인품의 소유자로서의 공자의 모습, 공자의 박학다식한 면모, 공자의 생김새에 얽힌 일화, 교육자로서의 공자의 모습, 공자의 가르침의 본질, 성인으로서의 남다른 혜안, 수양의 모습, 수난과 시기의 대상으로서의 공자, 제자들의 스승 섬김과 덕행, 후대 왕들의 공자 섬김 등등 다양한 공자의 면모와 공자의 주변 인물들의 일화 및 행적이 들어 있다.

 

화성 궐리사 소장 공자성적도는 목각성적도로서 비록 연대는 1904년이지만 116매가 완본으로서 남아있는 아주 귀중한 자료가 되고 있다. 서중유화 화중유서(書中有畵畵中有書)로 마치 책속에서 지식과 교훈과 깨우침을 읽어 내듯이 화면에 그려진 이야기 거리 가운데에서 우리는 공자의 인품과 가르침의 내용을 포착해내야 한다.

 

화성 궐리사의 목판본은 피나무로 만들어져 있으며 가로 70, 세로 32, 두께 1.52정도 되는데 양단에 나무를 깍아서 판목의 유지케 했으며 글씨는 정교하지 못하나 판장에 조각된 공자성적도는 비교적 섬세한 편이다.

장정태 삼국유사문화원장(철학박사. 한국불교사 전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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