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고

장정태 박사의 한국종교학●나주향교 탐방연구

장정태 논설위원 | 기사입력 2021/03/23 [08:03]
역사적, 규모‧내실면에서 그 가치와 비중이 유교문화의 대표상품

장정태 박사의 한국종교학●나주향교 탐방연구

역사적, 규모‧내실면에서 그 가치와 비중이 유교문화의 대표상품

장정태 논설위원 | 입력 : 2021/03/23 [08:03]

 


역사적
, 규모내실면에서 그 가치와 비중이 유교문화의 대표상품 

*요점 정리한 나주향교의 연혁과 위상

 

(1)향교가 1392년 조선 개국과 동시에 창설되었으나 나주향교는 987년 고려 성종 612목 시대에 설립되었다는 고려사의 기록

(2)한국 내 상존하고 있는 234개 향교가 거의 지방문화재임에도 불구하고 나주향교는 전라남도 지방문화재 128호이자 국가 보물 394(대성전), 국가 사적 483호로 지정

(3)1592년 임진왜란 때 성균관이 소실되자 선조 34년 성균관 복원시에 나주향교를 본으로 삼았다.

(4)대부분의 향교 건물 배치가 후묘전학인데 반해 나주향교는 전묘후학의 특징을 가졌다.

(5)나주향교에서 사마시(생원,진사)에 합격자수가 480명이나 되며, 성종 11년에는 동시에 10명이 공등연방하여 금성별곡을 지어 노래하고 축하연을 베풀었으며, 영상, 상신, 현인달사, 문장, 충절이 다른 지역에 비해 월등히 많다.

(6)구전이지만 대성전 벽토 일부를 중국 곡부에서 반입하였다고 하며, 대석의 용두조각이 고려시대 작품으로 평가 받고 있다.

(7)향교의 상징목인 은행나무의 수령이 600년이 넘는 보호수로 이태조가 식수하였다는 전설이 있다.

(8)내산문이 삼문의 정형을 깨트리고 단일체로 되어 있다.

(9)정유재란 때 수복 김애남이 생명을 걸고 대성전에 봉안된 위패를 짊어지고 금성산에 잠복하였다가 왜적이 물러간 뒤 복설한 선행으로 면천을 받고 국명으로 충복사를 지어 봉양하게 한 점.

(10)호남지방의 대표향교로서 사장관(四掌官 전주,나주,광주,남원)의 하나라는 점.

 

그 외에도 1895년 민비 시해사건과 단발령 등 일제의 강점이 노골화되자 장성의 기우만이 1896년 장성에서 의병을 창의할 때 나주향교에 격문을 보내옴에 나주의 유생들이 중심이 되어 향리들과 함께 향교 동계에서 집회를 갖고 유생 이승수 등이 전 주서 이학상을 의병장으로 추대하여 의병활동의 중심에 서기도 하였다.

 

나주향교는 역사적으로나 규모면에서나 내실면에서 그 가치와 비중이 대한민국 모든 향교와 차별되고 유교문화의 대표상품이 되기에 충분하다 할 것이다. 따라서 모든 시민들은 물론 지방자치단체장을 비롯하여 각 기관단체 지도자들이 유교의 경전에 내재하고 있는 가치를 부단히 구현하여 인성교육의 중심이 되도록 하여야 할 것이다.

 

* 수목 수려하고 경관 뛰어난 곳에 성균관과 매우 유사한 구성의 나주향교

 

나주향교가 위치한 곳은 조선 시대에는 나주읍성의 서문 밖으로 나주목의 서부 교촌 지역이었으며, 풍수를 고려하여 나주 북쪽에 있는 진산인 금성산(해발 450.3m로 나주의 북쪽 5리에 있는 진산)의 줄기인 장원봉(주성의 서북쪽에 있으며 월정봉과 장원봉)의 두 봉우리가 모두 금성산의 서쪽 갈래로서 주성을 돌아 안고 있다.) 아래 지역에 있어 산자락이 향교를 둥글게 감싸고 있는 수목이 수려하고 경관이 뛰어난 곳에 있었다.

 

현재 이 지역은 주택지로 변하여 민가들이 주변에 들어서 있고, 또한 광주-목포 간 1번 국도가 장원봉의 허리를 잘라내어 지나게 됨으로써, 명륜당 뒷담장 뒤로는 상원봉의 줄기와 분리된 채 큰 도로로 인하여 맥이 끊겨 있는 형국을 이루고 있다.

 

나주향교의 배치는 일반적으로 향교의 건축 구성은 성균관과 매우 유사하다. 다만 규모 등에서 차이가 있을 뿐이다. 즉 문묘가 반드시 있고 이와 함께 공부할 수 있는 독자적인 강학 영역을 별도로 마련되었다.

 

현존하는 향교의 영역을 살펴보면 몇 가지 유형이 있는데, 거기에는 지형을 세심히 고려한 흔적이 보인다. 즉 평지와 산지가 갖는 지형이 다름으로 해서 위계적으로 가장 높은 제향 공간인 대성전을 어느 곳에 배치하느냐는 가장 중요한 문제였다.

 

전묘후학(前廟後學)의 배치로서 대표적인 향교는 서울 문묘를 비롯하여 나주향교, 전주향교, 경주향교 등이 있는데, 이들은 평지에 배치됨에 따라 전모후학의 배치 형식을 따르고 있다. 즉 문묘부를 전면에 큰 규모로 배치하는 것이 서울 문묘의 조영계획과 맥락을 같이 하는 것으로 보이며, 이는 강학 기능보다 향사 기능을 더욱 중요시 했음을 의미한다.

 

이러한 건축규범이 잘 드러난 향교는 비교적 고을의 규모가 크고, 평지인 전라도에 많이 나타난다. 이러한 서울 문묘와 같은 전묘후학의 배치 형태를 띠고 있는 나주향교는 솟을삼문인 외삼문을 들어서면 바로 맞배지붕의 내삼문이 있고, 내삼문을 들어서면 문묘 공간이 있어 중앙 뒷쪽에 대성전이 있고, 전면 좌우에 동서무가 있으며, 대성전 후면 동측에 있는 편문을 통하여 강학 공간으로 들어가게 되어 있다. 강학 공간은 중앙 뒤편에 솟을집의 명륜당이 있고 그 전면 좌우에 각 11칸의 동서재가 배치되어 있다.

 

나주향교의 배치에서 특이한 것은 일반적으로 내외삼문이 각 공간별로 정문으로 사용되는 것과는 달리 내외삼문이 중첩하여 놓여 있고, 내삼문 안에 문묘부가 배치되었으며, 대성전의 동쪽 옆으로 협문을 두어 옆으로 돌아서 강학부를 출입하도록 된 것은 서울 문묘의 배치수법과 많은 공통점이 있으며 또한 명륜당의 건물 형태를 솟을집으로 꾸민 것이나 계성사를 갖추고 있음도 공통되는 점이다.

 

나주향교는 남북 방향으로 길게 형성된 장반형의 대지 안에 전묘후학의 배치를 하고 있다. 문묘 구역 내에는 대성전을 비롯하여 그 좌우로 동·서무가 복원되어 있으며 강학 구역 내에는 동·서익사를 양쪽에 둔 명륜당과 정면 11칸 규모로 복원된 동·서재가 위치하고 있다. 서쪽으로는 서재가 있으며 서재와 명륜당의 서익사 사이에 연못이 있다. 부속 건물군을 보면 동무의 동쪽으로는 도로 건너별도의 담장으로 구역을 이룬 사마재가 있다. 동재의 동쪽으로는 충효관과 보전각이 있다. 각각의 건물군은 독립된 구역처럼 담장으로 나누어져 있으며, 특히 도로 건너편에 사마재가 독립되어 담장으로 구획되어 있는 것이 특징이다.

 

* 숭유억불 정책에 따라 사찰 석재를 옮겨 사용한 것으로 추측되는 대성전 계단

 

나주향교의 중심건물인 대성전은 공자를 비롯한 27위의 위패가 모셔진 공간으로 정면 5, 측면 4, 단층 겹처마 팔작지붕이다.

 

주심포 양식의 건물이나 쇠서의 형태는 익공이 비슷하게 변하고 창방(昌枋) 위에는 익공집에서 나타나는 화반들이 배치되어 있다. 전면 1칸을 개방하여 툇간(退間)으로 하고 안쪽에 고주(高柱)를 세워 중앙과 좌우 양단문에 각각 문호를 달았으며 주문에는 큼직한 살 창()을 만들었다. 내부에는 마루를 깔았고, 후면에 고주 4개를 한 줄로 세워 앞뒤 고주에는 대들보를 걸치고 그 위에 동자주형의 태공을 세워 종양(宗樑)을 받쳤다. 건물 내부에 세운 고주와 주위의 평주와는 퇴양(退樑)으로 연결하였으며 이것을 받는 공포의 살미첨차는 한몸으로 합쳐서 양봉(樑奉)의 형식을 이루고 있다. 천장은 연등천장이며 초석 상면에 연화문을 새긴 장식이 특이하다. 대성전을 오르는 계단의 소맷돌 문양, 주춧돌에는 연꽃무늬가 새겨져 있는데 이것은 조선시대 숭유억불 정책에 따라 사찰이 헐리면서 그 석재를 옮겨 사용한 것으로 볼 수 있다.

▲ 대성전을 오르는 계단의 소맷돌 문양, 주춧돌에는 연꽃무늬가 새겨져 있는데 이것은 조선시대 숭유억불 정책에 따라 사찰이 헐리면서 그 석재를 옮겨 사용한 것으로 추측된다.  

 

이와관련 나주 향교 터는 원래 절터였다는 주장과 파주 염씨가 살던 집터였다는 설이 있다. 대성전 건물은 공포와 개가구재의 세부에 나타나는 특징으로 보아 조선 중기에 건축된 것으로 추측된다.

 

1407(태종 7)에 현유(賢儒)의 위패를 봉안, 배향하고 지방민의 교육과 교화를 위하여 창건되었다. 이 향교에는 1701(숙종 27)에 창건한 계성사(啓聖祠)가 있는데, 이로 말미암아 교궁(校宮)의 배치가 다른 향교와는 크게 다른 특색을 보인다.

 

일반적으로 교궁의 배치는 대성전이 위에 있고 그 밑에 명륜당이 위치하고 있으나, 공자 아버지 위패를 봉안하는 계성사가 있는 향교는 대성전과 명륜당의 위치가 바뀐 것이 특색이다. 나주향교의 특징으로 명륜당과 서재 사이에 자리한 네모형 연못이다.

 

호남지방의 향교 중 계성사가 있었던 곳으로는 나주향교 이외에 전주향교와 함평향교 등이 있다. 이 향교의 대성전은 보물 제394호로 지정되어 있으며, 5(五聖), 송조4(宋朝四賢), 우리 나라 18(十八賢)의 위패가 봉안되어 있다.

 

조선시대에는 국가로부터 토지와 전적·노비 등을 지급받아 교관이 교생을 가르쳤으나, 신학제 실시 이후 교육적 기능은 없어지고 봄과 가을에 석전(釋奠)을 봉행하며, 초하루와 보름에 분향을 하고 있다.

 

현재 전교(典校) 1명과 장의(掌議) 수명이 운영을 담당하고 있으며, 소장 전적 145195책 중 필사본인 금성연계방안(錦城蓮桂榜案)·유림안(儒林案)·청금안(靑衿案)·통문(通文)등은 이 지방의 향토사연구에 귀중한 자료가 된다. 이 향교는 전라남도 유형문화재 제128호로 지정되어 있다.

장정태 삼국유사문화원장(철학박사. 한국불교사 전공

 

 
  • 도배방지 이미지

많이 본 기사
1
모바일 상단 구글 배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