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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양문화와 불교-⑭ 쿠샨제국과 제4회 불전결집

보검 이치란 스님 | 기사입력 2021/03/29 [07:07]
교리상의 혼란 바로 잡으려 4차 결집회의 개최, 논장주석서 편집성과 이뤄 내

서양문화와 불교-⑭ 쿠샨제국과 제4회 불전결집

교리상의 혼란 바로 잡으려 4차 결집회의 개최, 논장주석서 편집성과 이뤄 내

보검 이치란 스님 | 입력 : 2021/03/29 [07:07]

 

▲ 쿠샨제국(기원후 30년〜375년) 영토와 카니슈카 대왕 통치시대의 최대범위. 지금의 중국 신장 지역도 관할했다.  

 

교리상의 혼란 바로 잡으려 4차 결집회의 개최, 논장주석서 편집성과 이뤄 내

 

종교나 철학사상 등 문화전반에 관한 체계를 세우는데 있어서 문헌 자료는 정말 중요하다. 철학사상을 논할 때, 왜 그리스철학이냐 하는 것을 생각해 볼 필요가 있다. 그것은 문헌이 체계적으로 집대성되어 있기도 하지만, 신화나 종교적 신앙에 지배받는 관념이 아니라, 그야말로 인간 이성을 통한 사고를 제대로 시도했기 때문에, 철학하면 그리스 철학으로부터 시작하는 것이다. 물론 중국 철학도 있고 인도철학도 있지만, 소위 말하는 철학함의 사색작용이 존재론 인식론 가치관에 입각하여 물음을 던지며 탐구한 것을 그리스 철학에서 찾기 때문이다.

 

불교사상은 큰 범주에서 본다면 인도사상이나 인도철학의 한계 내에서 탐구해야하겠지만, 불교가 보편적 진리성을 띠게 된 것은 불교사상 자체에 이런 그리스적 철학사상과 일치되는 점이 많이 내포하고 있기 때문이다. 보는 관점에 따라서 다르게 평가하겠지만, 헬레니즘 시대에 그리스 사상과 불교사상의 대논쟁에서 우위를 차지할 수 있었던 것은 그만큼 불교사상이 심오하고 인간의 내면으로부터 출발하고 있었기 때문이라고 본다. 그리스 철학이 아테네 학파이후 인간이성을 전제로 한 철학사상의 정립이라고는 하지만, 그리스 사상 저변에는 신화적인 요소와 관념이 항상 잠재되어 있었다.

 

인도사상에서도 그리스의 신화처럼 신화적인 사유와 베다철학시대가 강하게 작용하고 있었지만, 불교라는 인간 이성을 바탕으로 한 종교철학이 그리스철학처럼 로고스에 의한 진리탐구의 전통이 강하게 정립되어 한 흐름을 형성하고 있었다. 이런 초기불교사상이 그리스 식민지 지역에 전파되면서 그리스 사상과 불교사상이 정면으로 충돌하는 대사상전쟁이 벌어지게 되는 과정에서 메난드로스 같은 그리스 왕이 불교에 귀의하여 불교도 왕이 되었고, 불교진흥을 위하여 적극적인 후원을 하여 불교가 국교의 지위를 갖게 되고 지리적으로 확장되는 계기가 되었음은 전회에서 이미 여러 차례 살펴봤다.

 

불교가 역사적으로 서양과 접촉하는 과정을 탐구하는 과정에서 알렉산드로스 대왕의 동방 원정과 함께 그리스 식민지가 형성되면서 불교와의 교섭이 시작되었음을 이미 밝힌 바 있다. 그리스-박트리아, 인도-그리스 왕국을 거치면서 불교는 그리스 사상과 정면으로 충돌하면서 상호 영향을 받고, 융합하는 데에 까지 이르게 되었다. 이 과정에서는 페르시아의 문화, 종교사상이 자연스럽게 섞여졌고, 불교는 그리스 사상과 페르시아의 조로아스터 종교사상과도 접촉하게 되는 그야말로 혼합과정을 겪는 일대 사상적으로 하모니의 향연 시대를 거치게 된다.

 

이런 과정을 거치면서 등장한 것이 바로 쿠샨제국이다. 쿠샨제국은 본래 중국 서북 변방과 둔황일대의 초원에서 유목을 하던 민족인데, 흉노족한테 밀려서 중앙아시아까지 이르게 되었다. 이 무렵 아프가니스탄과 타지키스탄 등 중앙아시아는 그리스-박트리아 왕국이 자리 잡고 있었는데 월지 족은 박트리아를 그리고 나중에 인도-그리스 왕국을 무너뜨리고 쿠샨제국을 세우게 된다. 쿠샨 제국은 월지를 건국한 토하라 민족의 일파인 쿠샨족이 세웠으며, 중국, 로마 제국, 페르시아의 사산 왕조 등과 교역했다.

▲ 그리스어로 된 주화. 왼쪽은 쿠샨제국의 카니슈카 대왕이며 오른 쪽은 그리스 신화의 태양신 헬리오스. 헬리오스는 원시 인도유럽 신화의 태양신에서 유래하였으며, 헬리오스는 로마 신화의 태양신 솔과 인도 신화의 태양신 수리야, 슬라브 신화의 태양신 호르스와 같은 기원을 지닌 신이다.  

 

한편, 중국 한나라 무제는 흉노족을 견제하기 위하여 월지 족과 손잡으려고 장건을 서역 사행으로 파견한 것은 너무나 유명한 이야기다. 장건 이야기만 하려고 해도 소개할 내용이 너무 많아서 상당한 지면이 필요할 정도이다.

▲ 장건의 서역 원정(기원전138년~기원전126년)을 출발하는 그림

 

장건(張騫,기원전 200~기원전 114)은 지금의 산시 성 사람으로 기원 전 2세기 중국 한나라 때 여행가이자, 외교관이었으며 탁월한 탐험으로 실크로드의 개척에 중대한 공헌을 하였다. 그는 한나라 때 서역으로 가는 남북의 도로를 발견하였다고 전해지며, 서역의 한혈마, 포도, 석류, 복숭아 등의 물품을 가져왔다는 전설 또한 존재한다. 장건은 지금의 산시 성(陕西省) 한중 시(汉中市)에서 태어났다. 한중 시는 지급 시(地级市)로서 인구 4백만 명의 제법 큰 도시이다. 중국은 인구 1천만 명 이상의 도시가 13개나 되고 충칭 베이징 상하이 탄진은 직할시로서 1천만 명이 훨씬 넘는 초대형 급 도시이다. 4백만 명의 지급 시 정도는 흔한 도시로 볼 수도 있겠다.

 

하지만 역사적으로 한중 시는 중국 한나라 때 지방의 중심지였다. 진나라의 붕괴 후, 초패왕 항우와 한나라의 유방이 다툴 때는 유방이 항우를 피해 험난한 지형을 가진 이곳에서 힘을 비축하였다고 한다. 3세기 삼국 시대에는 조조가 다스리던 위와 유비의 촉나라와의 국경 지대였으며, 전략적 요충지였고, 제갈량(공명)이 위나라를 치러 갈 때, 사마의(중달)20만 군대와 부딪혔던 곳으로, 제갈량은 결국 이곳에서 숨을 거두게 된 곳이기도 하다. 한중을 정벌하러 온 조조는 한중을 가리켜 계륵(鷄肋)이라고 칭하였다고도 한다. 한중은 서촉(西蜀의 관문 땅이기 때문에초한지삼국지관련 유적지가 많다. 전한 고조 유방이 활약한 관련 유적지로는 고한대(古漢台)와 배장단(拜将坛)이 있고, 3세기 촉나라 때 유적으로는 무후묘(武侯墓 제갈공명의 묘), 정군산(定軍山), 마초무덤(馬超), 명월협 고잔도(明月峽 古棧道), 무후사(武侯祠) 등이 있는 유서 깊은 곳이다. 중국사란 너무 방대하고 다뤄야할 인물과 사건이 너무 많아서 이 정도로 하고, 장건의 이야기로 마무리 해 보자.

▲ 서안의 역사박물관에 있는 장건(200-114 BC)의 상.    

 

사실, 장건은 처음부터 한나라 고급관료는 아니었던 모양이다. 당시 한나라 조정에서는 북쪽의 흉노 때문에 골치를 앓고 있었다. 한 무제는 이에 대한 방책으로 흉노에게 밀려서 저 멀리 서쪽 중앙아시아로 쫓겨 간 대월지(大月氏, 지금의 타지키스탄)가 흉노를 복수하려고 한다는 풍문을 듣고, 대월지와의 연합으로 흉노를 정벌할 군사적 필요를 느꼈다. 한 무제는 월지국까지 갈 외교협상 사절단장이 필요했지만, 아무도 자진해서 가려고 하질 않았다. 한나라 영토인 장안(長安)을 벗어나면 흉노가 장악하고 있었고, 월지까지는 너무나 먼 험지였기 때문이다.

 

이때 장건이란 낭관 정도의 하급관리가 자원하여 서역사행의 단장을 맡고 백 명 정도의 수행원을 거느리고 길을 떠났다가 13년 만에야 겨우 장건 자신과 그의 수행원인 감부(甘父) 두 사람만 겨우 살아서 돌아왔다고 한다. 장건은 10년간 감부와 함께 흉노에게 포로로 잡혀서 흉노 여자와 결혼해서 아들까지 두는 등, 흉노 지도자에게 신임을 얻었지만, 그는 그의 사명을 완수하기 위해서 흉노지역에서 탈출, 대월지까지 가서 협상을 벌였다. 그렇지만 대월지는 흉노에게 복수할 생각이 없었다. 그곳에서 이미 정착해서 안정되게 살고 있었기 때문에 그럴 필요성을 느끼지 않았다.

 

장건은 대월지와의 협상은 실패했지만, 장건은 서역에 대한 많은 유용한 정보를 갖고 오자, 한 무제는 벌을 주기는커녕 태중대부(太中大夫)란 벼슬에 봉하고 감부에게도 봉사군(奉使君)이란 칭호를 부여했다고 한다. 비록 대월지와의 협상은 이루어지지 않았지만, 장건은 흉노와 서역의 여러 나라와 신독(身毒 인도)에 대한 정보를 한 무제에게 보고하고, 촉도(蜀道)에서 버마를 거쳐서 신독(인도)으로 가는 길이 있다고 전하고, 촉도(사천 성)를 개척하여 대하(박트리아)와의 무역을 건의했다.

 

장건의 서역개척사에서 가장 흥미 있는 부분은 그가 흉노를 탈출하여 대월지까지 가면서 겪은 경험과 서역 여러 나라들에 대한 정보이다. 이 기록은 사마 천(司馬遷, 기원전14586BC)사기(史記)<대완열전>한서(漢書)<장건열전>에서 알 수 있다.

 

다시 쿠샨제국으로 돌아가서 이야기를 전개해 보기로 하자. 쿠샨제국과 불교와의 관련에서 쿠샨제국의 카니슈카 왕의 가장 큰 공적은 불교경전 결집회의를 후원한 것이다. 불교역사에서 경전결집은 매우 중요한 의미를 갖고 있다. 상좌부 전통에서는 인도에서 1,2,3차까지가 개최되었고, 4차는 두 군데서 개최되었는데 상좌부는 실론에서 기원전 1세기에 열렸고, 이 때 야자 잎에 문자로 기록되었다. 또 다른 4차 경전결집은 기원후 1세기 경, 쿠샨제국에서 설일체유부(Sarvastivada)의 주관으로 카슈미르에서 개최됐다.

▲ 카슈미르 스리나가르 교외 하르완 공원에 위치한 불교사원 유적. 제4회 경전결집이 이루어진 사원으로 알려지고 있다.    

  

설일체유부 전통의 제4회 불전결집회의는 쿠샨제국의 카니슈카 대왕(재위: 기원후78105)에 의해 카슈미르 스리나가르 근처의 하르완 불교사원에서 소집되었다. 여기서 주로 다루었던 불전은 논장(論藏)인 아비달마(阿毘達磨)였는데, 빨리어로는 아비담마(Abhidhamma)라고 하며 산스크리트어로는 아비다르마(Abhidharma)라고 한다. 문자 그대로의 뜻은 대법(對法: abhi + dharma = + )이다. 아비달마는 법() 즉 고타마 붓다가 설한 교법에 대한 연구와 해석을 말한다.  

 

()의 저술은 부파 불교(部派佛敎) 시대의 특징 중 하나로 각 부파는 고타마 붓다의 교법에 대한 해석·주석은 물론이고, 거기에서 도출된 설법의 해석에 의거하여 자파(自派)의 교리학설을 체계적으로 수립하는 데 노력을 기울였기 때문에 각 부파에 따라서 상이(相異)한 특징을 나타내게 되었다. 4회 불전 결집의 최대 성과는 아비달마대비바사론阿毘達磨大毘婆沙論(Abhidharma Mahāvibhāṣā Śāstra)라는 주석서이다.

 

카슈미르의 하르완이 불교의 중심지가 된 것은 기원전 3세기 아소카 왕 시대로 거슬러 올라간다. 3차 결집 시에 1천 명 정도의 정통 비구만 인정하고 6만 명 정도는 가사를 벗기고 갠지스 강에 수장 시킨다는 끔직한 소문이 돌자, 거의 대부분이 히말라야 산록으로 도피했고, 상당수는 카슈미르로 향했다고 한다. 기원전후가 되자 카슈미르 지역의 불교 승가는 교리상의 혼란에 빠지게 됐다. 그래서 상좌부의 분파인 설일체유부 중심의 4차 결집이 단행됐는데, 500명의 아라한과 500명의 보살과 500명의 재가 불교지도자들이 삼장(三藏:경율론)을 카로스티 문자에 의한 간다리어에서 산스크리트어로 재편집했다고 한다. 4차 결집의 중심은 아비담마의 주석서인 마하 비바샤(Mahā-Vibhāshā 佛敎論書)의 결집이었다. 이 논서는 불교철학 연구의 전환점이 되었고, 불교는 중국에 본격적으로 전파되는 계기가 되었다.

보검<세계불교네트워크 코리아 대표>

▲ 필자 보검스님이 인도 델리에서 개최된 국제불교연맹 총회에 참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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