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고

서양문화와 불교-㉛ 불교와 영지주의 그리고 기독교와 마니교와의 관련

보검 이치란 스님 | 기사입력 2021/07/26 [08:19]
로마제국에 전해진 여러 종교, 결국 기독교에 용해되고 말아

서양문화와 불교-㉛ 불교와 영지주의 그리고 기독교와 마니교와의 관련

로마제국에 전해진 여러 종교, 결국 기독교에 용해되고 말아

보검 이치란 스님 | 입력 : 2021/07/26 [08:19]

로마제국에 전해진 여러 종교, 결국 기독교에 용해되고 말아

 

그리스-로마의 종교는 결국 기독교를 공인함으로써 여러 종교가 기독교에 흡수되는 결과를 가져왔다. 기독교가 로마제국에서 공인되고 주류 종교가 되기까지, 3백년이란 장구한 시간이 걸렸다. 공인되기 이전에 기독교는 상당한 세력을 형성했고, 공인된 다음에는 승승장구하였다. 초기 기독교시대에는 페르시아의 조로아스터교, 인도의 불교가 로마제국에 유입되었고, 영향도 미쳤다. 그 중에서도 영지주의는 초기 기독교 교파에도 상당한 영향을 미친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인도에서 불교도 전해졌지만 결국 뿌리를 내리지 못하고 말았다.

▲ 초기 기독교 교파에 영향을 미친 영지주의의 상징그림     

  

그리스 철학자들은 인도 종교수행자(불교)들에 관심을 가졌고, 로마제국 시대에는 오히려 인도의 불교 수행자들이 그리스의 헬레니즘과 로마제국 시대의 그리스 철학에 매료되었다는 설이 있기도 하다. 그런가하면 불교수행자들은 로마제국 영내에서 불교사상을 전파하기도 했다. 기독교 신학자들로서 작가들인 히폴리투스와 에피파니오는 로마제국 시대의 기독교인들이다. 이들의 글에서 1세기경 홍해 근방에 살고 있던 스키타이누수가 인도를 방문한 사실을 기록하고 있다. 스키타이누수는 스키타이의 후예로서 홍해 근처에 살면서 인도와 무역을 한 상인이었다고 하는데, 그는 동시에 철학자였다고 한다. 그는 인도 불교철학에 정통했으며 문하에 제자들을 두고 있었으며 인도의 불교철학을 전수했고, 한편 그리스-로마의 사상을 인도에 전해주는 가교역할을 한 것으로 상상된다.

 

히폴리투스(Hippolytus, 170년대~235)2세기 기독교 신학자 중 한 사람으로, 그의 어록은 신학자들과 역사학자들에게는 아직 뚜렷하게 밝혀지지 않고 있으나, 당대에 가장 중요한 신학자로 주목받고 있다. 에피파니오(315~403)4세기 말엽 키프로스 살라미스의 주교이다. 로마 가톨릭교회와 동방 정교회, 오리엔트 정교회 등에서 성인이자 교부로 공경 받고 있다. 그는 정통 신앙의 강력한 옹호자라는 명성을 얻었다. 그의 대표적인 저서는 당시 이단들의 목록을 작성하고 이를 비판한 파나리온이다. 이처럼 이들 기독교 신학자들의 기록에서 로마제국과 인도와의 교류 기록을 찾을 수 있으며, 상인 뿐 아니라 철학적인 지식과 이론의 교류와 접촉이 있었음이 확인되고 있다.

 

예루살렘의 키릴로스(313~386)에 의하면, “스키티아누스의 제자인 테레빈투스는 자신을 부처’(그는 스스로를 부처라고 불렀다)”라고 소개했다고 기록하고 있는데, 이것은 아마도 테레빈투스가 자신이 부처의 제자로서 불교도임을 나타내는 말이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테레빈투스는 팔레스타인과 유대로 가서 불교 사상전파 활동을 했으며, 이단으로 몰리기도 했다. 그는 나중에 바빌론에 정착하여 마니에게 자신의 가르침을 전함으로써 마니교의 기초를 만들었다고 전해진다. 마니교는 사산 제국의 예언자 마니가 창시한 이란 계통의 종교로, 사산 제국(226~651) 시대의 주요 페르시아 영지주의 종교 가운데 하나이자 현존하지 않는 고대 및 중세 종교다.

 

키릴로스는 초대 교회의 유명한 신학자이다. 로마 가톨릭교회, 동방 정교회, 성공회 연합에서 성인으로 존경받고 있으며 팔레스타인의 기독교 공동체에서는 매우 존경받는 성직자로 여겨지고 있다. 1883년에는 교황 레오 13세에 의해 교회학자로 공인되었다. 350년경에는 막시무스로부터 예루살렘 주교 자리를 승계 받았지만 여러 황제들과의 정책상의 이견 때문에 한 번 이상 유배되었다. 그는 당대에 교리 문답과 전례의 순서를 기록한 중요한 글을 남겼다.

▲ 예루살렘의 키릴로스(313년~386년), 초대 교회의 유명한 신학자.

 

예루살렘의 키릴로스의 교리학 강의 6의 내용가운데, 

"그러나 그의(스키티아누수) 제자인 테레빈투스는 그의 돈과 책과 이단을 상속받아 팔레스타인에 와서 교리를 펴다가 유대에서 (이단)으로 알려지고 정죄를 받았기 때문에 페르시아로 건너가기로 작정하였다. 그는( 테레빈투스) 자신을 부처라 하였다."라고 기록했다. 액면그대로 믿는다면 테레빈투수는 불교 수행자임에 틀림없어 보인다. 스키티아누수는 상인이면서 철학자 였으나 테레빈투수는 출가한 불교 수행자임이 분명해 보인다. 적어도 기원후 4세기경이면 인도 아대륙 서남부에는 불교가 왕성하게 전파되어 전성을 이룰 때이다.

 

그레코(그리스) 불교가 인도 북부 중앙아시아에서 확장되었다면, 로마제국 시대에는 주로 해로를 통한 인도의 종교, 철학사상이 아라비아 해와 홍해를 거쳐 로마제국에 전파되었다. 불교사상은 로마제국에 알려지고 전파되었지만, 불교라는 이름을 걸고 정착하는 데에는 상당한 어려움이 있었지 않나 상상된다. 반면 영지주의는 로마제국 시대와 초기 기독교 교파에 상당한 영향을 미쳤다고 본다.

▲ 로마제국과 인도와의 무역루트, 기원후 1세기경 지도.    

 

수세기 동안, 영지주의에 대한 대부분의 학문적 지식들은 리옹의 이레네우스와 로마의 히폴리투스 같은 정통 기독교 인물들의 반이단적으로 쓰인 기록물들에 국한되었다. 1945년에 이집트의 나그함마디 문서들이 발견된 후 영지주의에 대한 관심이 새로워졌다. 이 문서들은 토마스 복음서와 요한의 외경을 포함한 희귀한 초기 기독교 및 영지주의 문헌 모음집을 포함하고 있다. 학술 연구의 주요 쟁점은 영지주의가 종교 간 현상 또는 독립 종교로서의 자격에 관한 부분이다. 학자들은 헬레니즘, 유대교, 조로아스터교, 플라톤주의 등의 영향을 인정하고 있다. 그리고 일부는 불교와 힌두교에 대한 가능한 연관성을 지적했지만 후자로부터 직접적인 영향을 받았다는 증거는 결정적이지 않다고 보고는 있다. 그렇지만, 콘즈 같은 서양불교학자들은 영지주의는 불교논리와 비슷하여 영향을 받았을 것으로 추론하는 것이다.

 

영지주의는 나스티시즘(Gnosticism)을 뜻에 따라 번역한 것으로, 음을 따라 그노시스파 또는 그노시즘이라고도 한다. '영지주의자' '영지주의파' 또는 '영지주의적'이라고 번역되는 나스틱(Gnostic)이라는 낱말은 그리스어로 '신비적이고 계시적이며 밀교적인 지식 또는 깨달음'을 뜻하는 그노시스(gnosis)로부터 따온 것으로, 이 낱말은 고대의 영지주의 종교 운동의 반대자들이 이 운동에 속하는 사람 또는 단체를 지칭하는 용도로 주로 사용되었다.

 

영지주의 운동은 헬레니즘 철학·유대교·기독교와 영향을 주고받았다. 학자들은 대체로 영지주의가 이원론적인 종교 운동이었다고 보고 있으나, 가장 유력했던 영지주의 분파인 발렌티누스파를 비롯한 후대의 영지주의 운동들에서는 일원론적인 세계관을 가졌다. 데미우르고스(만드는 자)에 대한 다양한 견해와 함께 이러한 세계관의 다양성은 영지주의 운동에 여러 가지 다양한 입장들이 서로 공존하였다는 것을 나타내는 지표로 간주되기도 한다.

 

발렌티누스주의 또는 발렌티누스파는 기원후 2세기에 발렌티누스(Valentinus: 기원후100기원후 180)에 의해 설립된 나스티시즘(Gnosticism, 영지주의) 운동의 한 분파이다. 발렌티누스주의는 당시의 주요한 나스티시즘 운동 분파들 중의 하나였다. 발렌티누스주의가 영향력을 미친 지역은 아주 광범위하였는데 로마에만 국한되지 않고 소아시아, 시리아, 이집트 그리고 북서아프리카에까지 영향력을 미쳤다.

▲ 알렉산드리아의 성 클레멘트.     

 

기독교 학자였던 에피파니우스(Epiphanius 310403)에 따르면, 발렌티누스는 이집트에서 태어났으며 알렉산드리아에서 교육을 받았다. 또 다른 기독교 학자이자 교사였던 알렉산드리아의 클레멘스(Clement of Alexandria:150c215)는 발렌티누스가 사도 바울의 제자였던 테우다스에게서 가르침을 받았다고 보고하였다. 발렌티누스는 대단한 카리스마와 사람들을 끌어당기는 천부적인 능력을 가졌으며 화술이 매우 뛰어난 사람이었던 것으로 명성이 높았다.

 

클레멘트(클레멘스)는 알렉산드리아 학파의 기독교 신학자였으며 유명한 알렉산드리아 교리문답 신학교의 수장이었다. 또한, 그는 오리게네스의 스승이었다. 오리게네스(185년 경254년 경) 또는 오리겐은 알렉산드리아학파를 대표하는 기독교의 교부이다. 매우 독창적인 신학 체계를 세웠기 때문에 이단과 논쟁하였고 교회와도 마찰을 일으켰다. 그는 금욕주의에 따라 스스로 고환을 자른 것으로 유명하다.

 

클레멘트는 개종(改宗)하기 전에 각지를 편력하며 철학과 기독교를 배웠다. 알렉산드리아에서는 판타이노스에게 사사하여, 그의 뒤를 이어 알렉산드리아 교리문답 신학교의 수장이 되었다. 그는 그리스 철학에 대해 이전의 어떤 신학자보다도 깊은 이해와 존경을 보이고 있었다. 조직된 교회에 대해서는 여러 교부(敎父)중 가장 냉담했던 사람이라고 볼 수 있는데, 그 유연한 사상은 초대 교회에서도 귀중한 존재로 되어 있다. 한편 그는 불교에 대해서도 언급한 최초의 신학자이기도 하다. 당대 불교 수행자들은 알렉산드리아까지 여행하면서 사상전파를 위해서 활동했다는 증거가 된다. 

▲ 공부에 열중하는 히에로니무스.  

 

클레멘트는 그리스의 철학적 전통들을 기독교 교의와 결합시켰다. 그는 그리스 철학의 그노시스(영지주의)를 높이 평가하여 그노시스는, 보편적인 영적 친교와 더불어, 신에 의해 특별히 선택된 일반 기독교인들이 가질 수 있는 것이라고 주장하였다.

 

에우세비우스 소프로니우스 히에로니무스(347420) 또는 예로니모, 제롬은 기독교 성직자이다. 1차 니케아 공의회 이후의 보편교회 신학자이자 4대 교부 중 한 사람으로서 특히 서방교회에서 중요한 신학자이다. 제롬은 부처를 언급했으며 마야부인은 성모 마리아처럼 부처를 처녀 잉태했다는 내용을 언급했다고 한다. 성 바를라암과 성 요사팟 전설은 석가모니 부처님이야기를 배경으로 하고 있다.

 

서양문화와 불교 담론은 중세시대라는 타임라인에 직면하게 되는데, 불교는 동로마제국 시대와 유럽의 중세시대를 건너 뛸 수밖에 없다. 반면 인도 아대륙 북쪽과 남쪽 그리고 동쪽으로는 계속 확장되어 갔다. 서양은 기독교 일색으로 변화되어 갔으며, 기독교는 16세기 초, 예수회 선교사들과 아시아에서 조우하게 된다.

 

예수회는 로마 가톨릭교회의 엄밀한 학문과 사도적 열성으로 알려진 수도회이다. 이 수도회는 1539년 이냐시오 데 로욜라에 의해 창립되어 1540년 교황 바오로 3세로부터 정식 승인을 받았다. 선교사 지원 활동, 복음화, 연구와 교육의 분야에서의 활동으로 명성이 높다. 널리 알려진 예수회 수도사로는 프란치스코 하비에르와 피에르 파브르가 있다.

 

성 프란치스코 하비에르와 이폴리토 데시데리 선교사는 불교에 대한 구체적인 많은 정보를 유럽에 전달하는 역할을 하였다.

보검<세계불교네트워크 코리아 대표> 

▲ 필자 보검스님이 한적한 산골에서 걷기 명상으로 망중한을 보내고 있다.    



  • 도배방지 이미지

모바일 상단 구글 배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