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수회 창립자 이냐시오 환시로 예수님 만나 분부 받아
서양문화와 불교-㉝ 예수회 선교사들 아시아진출, 불교정보 전해와예수회 창립자 이냐시오 환시로 예수님 만나 분부 받아예수회 창립자 이냐시오 환시로 예수님 만나 분부 받아
서양불교를 리서치하는 과정에서 생각되는 것은 대개 종교의 생명도 국가의 운명과 궤를 같이한다는 점이다. 유대교 같은 경우 나라의 운명과 상관없이 유대민족이 어느 곳에 간들, 시종일관 자신들의 종교적 신념을 지켜가는 민족도 있다. 또 힌두교 같은 경우에는 비교적 왕조의 교체가 수없이 진행됐지만, 인도 아 대륙에서 굳건하게 주류 종교의 지위를 보존하는 종교도 있고, 자이나교 같은 경우 아예 인도가 아니면 전파가 되지 않는 종교도 있기는 하다.
불교의 경우처럼 많은 나라를 여행하고 동시에 흥망성쇠를 거듭한 종교도 없지 않을 것 같다. 불교가 인도에서 여행을 시작하여 중앙아시아에서 한동안 전성을 구가하다가 서진(西進)은 멈추고 동점(東漸)만을 계속하여 중국에 정착, 크게 번성하게 되는데 오늘날은 동아시아 불교라는 전통을 형성하게 됐다.
창립자인 로욜라의 성 이냐시오(1491년~1556년, 스페인 어 :이냐시오 데 로욜라)는 스페인 바스크 귀족 가문의 기사출신으로, 1537년 이후로는 로마 가톨릭교회의 은수자이자 사제, 신학자이다. 그는 예수회의 창립자이자 초대 총장이기도 하다. 이냐시오는 가톨릭 개혁 시기에 특출한 영적 지도자로 급부상하였다. 가톨릭교회에 대한 그의 충성은 가톨릭교회의 권위와 제도확립에 기여하였다.
그가 사제로 서품 받은 다음, 자신의 동지들과 함께 다시한번 예루살렘에 가려고 했지만, 갑자기 건강이 악화되어 스페인으로 돌아와 1년간 요양하며 치료에 전담해야만 했다. 건강을 되찾게 되자 연기된 성지 순례 계획은 다시 시도되었다. 이냐시오는 이탈리아의 베네치아로 가서 그곳에서 동지들과 예루살렘으로 떠나는 배를 타려고 하였으나 이번에는 튀르크족과의 전쟁 문제로 계획에 큰 차질이 생겼다. 결국 그들은 자신들의 성지 순례 계획을 1년 뒤로 미루기로 결정하고 교황의 처분만을 기다리고 있었다.
1537년 겨울, 기다림이 끝나가는 그해에 교황에게 자신들의 순명을 서약하는 시간이 찾아왔다. 이냐시오는 교황을 알현하기 위해 로마로 길을 떠났다. 로마로 가던 도중 한 마을의 경당에서 이냐시오는 특별한 환시를 체험하였다. 경당에서 그는 황홀한 탈혼 상태에 빠져 성부와 그의 옆에 성자 예수가 십자가를 짊어진 환시를 목격하였다.
예수는 이냐시오를 부드럽게 내려다보며 “로마에서 너에게 은혜를 베풀겠다.”라고 말하였다. 이 특별한 환시를 체험한 후, 이냐시오는 자신들의 단체를 ‘예수의 동반자’, 즉 예수회로 부르자고 제안하였다. 대개 창립자의 이름에 따라 수도회의 이름을 붙이던 중세의 전통인 베네딕토회, 도미니코회, 프란치스코회라는 이름의 전례를 따르지 않는 파격이었다. 예수가 이냐시오에게 한 말대로 로마에 도착하자 만사가 순조롭게 진행되었다. 이냐시오와 그의 일행은 당시 교황 바오로 3세에게 알현을 요청, 교황의 눈에 들어 쾌히 승낙을 얻고 열렬한 환영을 받았다. 그들은 자신들이 세울 수도회의 첫 회헌을 교황에게 제출하여 인가해줄 것을 요청하였다. 결국 그들의 회헌에 대한 약간의 수정이 가해진 후, 1540년 9월 27일 인가를 받았다. 이냐시오는 교황이 지시하면 무슨 일이든지 실천하며, 어느 곳에라도 갈 수 있는 기동성과 융통성을 가진 준비된 마음으로 예수 그리스도의 군사가 될 것이라고 선언하였다.
이제 본격적인 예수회 선교사 이야기로 들어가 보자. 아시아 선교에서 불교와 관련하여 접촉한 선교사는 성 프란치스코 하비에르(1506년~1552년)와 이폴리토 데시데리(1684년~1733년)이다. 두 선교사는 180년이라는 시간차가 있다. 성 프란치스코 하비에르는 나바라 왕국(지금의 스페인 바스크) 하비에르 출신의 가톨릭 선교사이자 로마 가톨릭교회 소속인 예수회의 공동 창설자이기도하다. 하비에르 선교사가 아시아 선교에 있어서 중요성을 띠게 되는 것은 그가 인도와 일본에서 활약을 크게 했기 때문이다. 하비에르 신부는 1542년 5월 6일 인도 고아주에 도착하여 가톨릭 교리해설서와 성가를 현지어로 번역하는 등 활발한 선교활동을 했으며, 교회 지도자를 키우기 위해 고아 신학대학교를 설립하였다. 그는 또 종교개혁 후 개신교로 전향한 사람들의 전도를 막기 위해 직접 선교에 나선 그는 포르투갈사람인 알파르스 선장을 통해 사쓰마 국 태생의 일본인 부시(武士) 야지로를 알게 되었다.
하비에르는 야지로와 부하에게 기독교 교리를 가르쳐, 1548년 3월 성령강림주일에 세례를 받게 하였다. 야지로가 포르투갈 말을 잘하게 되자, 하비에르는 1549년 8월 야지로를 포함한 7명의 일행(로마 가톨릭 사제, 수도사, 중국인 봉사자 등)들과 일본 최남단 사쓰마 국과 오스미 국에서 전도하기 시작했다. 1549년 9월 29일 하비에르 일행은 다이묘 시마즈 다카히사의 초대로 그의 성에 갔는데, 하비에르 일행은 이곳에서 다카히사에게 화승총을 선물했다.
다이묘는 크게 기뻐하며 전도를 허용하는 것은 물론 종교의 자유도 인정하였다. 이에 자신감을 얻은 하비에르 신부는 《예수의 길》이라는 가톨릭 책을 일본어로 발간했다. 당시 하비에르의 기록을 보면 그가 일본에 대해 어떻게 생각했는지 그리고 당시 일본문화가 어떠했는지 알 수 있다.
“일본 사람들은 대단히 예의가 바른 사람들인데, 잘 사는 것보다 명예를 중요하게 생각합니다. 무기를 무척 중요하게 여겨서 남자는 14세가 되면 항상 칼을 옆에 차고 다닙니다. 사무라이는 가난을 부끄럽게 여기지 않고, 무기를 항상 갖고 다니며, 다이묘에게 충성을 바치는 일을 무척 중요하게 생각합니다.”라고 쓰고 있다.
하비에르 신부는 《공교요리》(公敎要理)라는 가톨릭 교리해설서를 쓰기도 했는데, 이를 읽고 감명 받은 베르나르도라는 무사가 하비에르 신부에게 세례를 받았다. 하비에르 신부는 베르나르도를 일본 교회의 지도자로 만들기 위해 예수회에 가입시켰으며, 로마에 보내 신학공부도 하게 했다. 얼마 후에는 미켈이라는 농부를 포함한 15명이 신자가 되었으며, 1년간의 전도로 1백 명에서 1백 50명이 신자가 되었다.
하지만 불교 신자들의 반발로 다카히사가 그리스도교에 대해 차가운 모습을 보이자, 야지로에게 교인들을 맡기고 교토로 가기로 했다. 1551년 하비에르 신부는 히라도 섬과 나가토 국, 스오 국을 거쳐 교토에 갔지만, 별다른 성과를 얻지 못하고, 다시 스오 국에 되돌아갔다. 예수회는 스오 국주 오우치 요시타카에게 화승총 등을 선물하자 이에 크게 기뻐하며 대도사라는 빈 절을 교회로 내줄 정도로 하비에르의 전도활동을 도와주었다. 야마구치에서 5개월간 전도한 하비에르는 중국에서의 전도를 위해 1551년 중국에 갔지만 입국하지 못하고, 이듬해 11월 27일에 광둥성 앞의 섬에서 열병으로 죽음에 이르고 말았다.
하비에르가 전도활동을 한 가고시마와 야마구치에는 하비에르 기념교회가 있다. 가고시마의 하비에르 상륙 기념교회는 1908년 세워졌으나, 제2차 세계대전으로 파괴되어 1949년 당시 교황 비오 12세의 기부금으로 재건되었다. 1622년 3월 성인으로 시성되었으며 모든 선교사의 수호성인이다. 성 바오로 이후 가장 많은 사람을 그리스도교에 입교시켰다고 알려져 있다.
불교가 중앙아시아에서 무슬림 군사들에 의하여 파괴되고 자취를 감춘 반면, 중국과 일본 등지에서는 국교나 다름없는 지위를 누리고 있었다. 박해받던 기독교는 로마제국의 종교가 된 다음 승승장구하여 유럽의 제1의 종교가 되고 종교개혁으로 개신교까지 탄생하였으며, 동로마로부터 중앙아시아 인도에는 아시리아 동방교회로 소급되는 콘스탄티노플의 네스토리우스 총주교를 시조로 하는 네스토리우스파(景敎)라는 기독교의 일파가 전파되기도 했다. 보검<세계불교네트워크 코리아 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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