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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양문화와 불교-㉞ 티베트 불교와 문화에 매료된 예수회 선교사 이폴리토 데시데리

보검 이치란 스님 | 기사입력 2021/08/16 [10:00]
유럽인 최초로 티베트어를 구사하고 티베트 사원에서 불교를 학습한 가톨릭 신부

서양문화와 불교-㉞ 티베트 불교와 문화에 매료된 예수회 선교사 이폴리토 데시데리

유럽인 최초로 티베트어를 구사하고 티베트 사원에서 불교를 학습한 가톨릭 신부

보검 이치란 스님 | 입력 : 2021/08/16 [10:00]

유럽인 최초로 티베트어를 구사하고 티베트 사원에서 불교를 학습한 가톨릭 신부

 

서양 기독교의 선교사(신부)가 티베트 불교에 심취하여 티베트어를 구사하고 티베트 문화를 이해했다고 한다면 일반인들은 의심부터 할 것이다. 하지만 이것은 사실이다. 예수회를 창립한 로욜라의 성 이냐시오(1491~1556, 스페인어:이냐시오 데 로욜라)가 인도와 일본에서 활약했다는 소개는 전회에서 이미 했다. 이냐시오는 가톨릭 개혁 시기에 특출한 영적 지도자로 급부상하였고, 가톨릭교회에 대한 그의 충성은 절대적이었다. 물론 예수회 선교사 이전에도 마르코 폴로를 통한 동방 소식은 접했고, 그 이전에는 플라노 드 카르피니나 윌리암 뤼브룩 같은 수도사들이 몽골제국을 여행하였다. 

▲ 이탈리아 출신 예수회 선교사 이폴리토 데시데리 신부가 방문해서 달라이 라마를 친견했던 티베트 수도 라싸의 포탈라 궁.   


이전의 수도사들의 동방 방문과 예수회 선교사들의 동방전도는 확연히 달랐다. 이전의 수도사들이 탐험이나 교황의 화해 메시지를 전달하는 사절과 같은 형식이었다면, 근대 초기 예수회 선교사들은 달랐다. 이제 소개하려고 하는 이폴리토 데시데리(Ippolito Desideri, 1684~ 1733) 신부는 매우 특이한 선교사였다. 그는 이탈리아의 예수회 선교사이다. 그는 인도나 중국 일본보다는 티베트에 매력을 느꼈다. 티베트어를 구사하고 티베트 문화를 이해했으며, 티베트 불교에 대한 상당한 지식을 축적한 최초의 유럽인으로 평가 받고 있다.

▲ 이폴리토 데시데리 선교사.    

  

이폴리토 데시데리는 아주 어린 시절부터 예수회 학교에서 교육을 받았다. 로마 대학에 입학한 다음에는 신학은 물론 역사 문학 수업 등을 받아 인문지식을 넓혔다. 예수회의 총장인 미켈란젤로 탐부리니의 요청에 의해서 티베트로 떠나는 예수회 선교사의 일원으로 합류했다. 리스본을 출발하여 인도의 고아 주에 도착해서 수라트, 아마다바드, 라자스탄 주, 델리를 거쳐 아그라에 당도하였다. 그 뒤 델리로 복귀, 상관인 마노엘 프레이르와 합류한 뒤 스리나가르와 카슈미르를 거쳐 1715년 라다크의 레에 도착했으며, 티베트 위창 지방을 향해 이동한 다음, 1706년 라싸에 당도한 뒤 본격적인 티베트 생활이 시작됐다.

▲ 노란 색 부분이 티베트.  

 

낯선 이국의 땅이었지만, 온갖 고생을 무릅쓰고 오직 사명하나만을 생각하면서 선교의 길을 걸은 것이다. 미국과 한국의 개신교 선교사들이 활약하기 전에는 가톨릭선교사들이 선교업무를 수행했다. 지금은 개신교 선교사들이 대부분이다. 한국 기독교 해외선교사가 3만 명이 넘는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엄청난 숫자이다. 미국 다음으로 많은 수이다. 다른 것은 모르겠으나, 현지에서 불교도와의 충돌이 가끔 일어나는 것을 보고 있다.

 

불교문화를 배운다는 것보다는 공격적 선교를 한다. 한국에서도 보면, 평화나 종교간 대화를 전면에 내세우고 서로 교류를 하는데 저변에는 선교라는 목적이 깔려 있다. 이런 선교의 목적 실현만을 위해서라면 오래 가지 못해서 교류는 그치고 마는 것이다. 진정으로 세계평화를 위해서 종교간 화합과 대화를 통한 공동 모색이 필요하지 자신의 종교나 교파의 우월성을 내세워 불교도를 선교하겠다는 전략은 어딘지 잘못된 전도라고 본다. 이런 맥락에서 본다면 낯선 티베트 땅에 기독교 선교를 위해서 파견되었지만, 일단은 언어와 문화 종교를 알아야 했기에 티베트 불교를 진정성 있게 수업한 이폴리토 데시데리 선교사의 태도는 겸손하고 종교간 교류의 모범이라고 할 것이다.

▲ 티베트 6대 겔륵파 사원 중 하나인 세라사원.    

  

그는 라싸에 정착한 뒤, 티베트를 지배하고 있던 몽골의 라장 칸의 배려로 거주할 집을 구했고 기독교를 포교할 수 있는 권한을 부여받았다. 그는 선교를 위해서는 티베트어와 티베트 불교를 학습할 필요성을 느꼈다. 그래서 티베트 겔륵파 6대 사원 가운데 하나인 세라 사원에 들어가서 겔룩파 라마(승려)들과 함께 공부하며 다양한 주제를 가지고 격의 없이 토론했다. 중가르 칸 국의 침략으로 정세가 불안하자 라싸를 떠났으며, 1721까지 티베트 중남부 지방에 있는 카푸친 작은형제회 수도원에 머물면서 기독교 선교 목적으로 다섯 권의 책을 저술하였다.

 

사실, 지금도 남방 불교국가에 가보면 외국인 승려들이 많이 있는데, 기독교 신부나 목사는 없다. 이미 각 나라 불교가 서양에 많이 알려져 있기 때문에 굳이 불교 승려로서 출가하여 수행생활을 할 필요성을 느끼지는 않은 것 같다. 다만 가톨릭이나 개신교 목사 가운데서는 저변의 목적이야 어디에 있던지 불교 공부를 하는 분들이 제법 된다. 차라리 이렇게 불교 공부라도 하면서 종교 간의 대화를 하려는 시도는 긍정적이지만, 무조건 불교를 부정하면서 공격적 선교를 하려는 분들을 볼 때는 참으로 민망하고 난처할 때가 많다.

 

이폴리토 데시데리 선교사는 부득이 1721년 작은형제회에 티베트의 선교에 대한 권리를 넘겨주면서 16년간 정들었던 티베트를 떠났으며, 1722년 아그라로 돌아온 뒤 푸두체리 등지에서 선교 사업을 행하다가 1727년 프랑스에 도착, 루이 15세를 접견한 뒤 1728년 로마로 복귀하게 되었다.

 

유럽으로 돌아온 이후 티베트에 대한 기록사(Notizie Istoriche del Tibet)를 편찬해 당시 유럽에서 접할 수 있었던 유일한 티베트 역사에 대한 기록물을 남겼으나, 인류복음화성에서 서적의 출판을 금지해 예수회 기록 보관소에 방치되어 있었다가 개인 소장품으로 넘겨진 뒤 20세기에 완전판이 출간되었다.

▲ 이폴리토 데시데리 신부의 티베트 선교.  

 

▲ 이폴리토 데시데리 선교사 기념우표.    

 

예수회 출신 선교사가 우여곡절의 어려움을 무릅쓰고 히말라야 고원에 있는 티베트까지 가서 선교를 하겠다는 사명감과 책임감으로 사역을 했지만, 몇 사람이나 기독교인으로 개종을 시켰는지는 자세히 모르겠으나, 티베트어를 배우고 문화를 이해하고 불교 공부를 했다는 점은 높이 평가할 수 있을 것이다. 선교를 목적으로 티베트 불교를 배웠다고 할지라도 이것은 정말 높이 평가해 주어야할 태도라고 본다. 현대에 이르러서는 불교 공부도 하지 않고 무조건 불교를 폄하하고 훼불(毁佛)하는 비종교인의 작태가 번번이 일어나고 있으며 종교 간의 갈등을 조장하고 있기 때문이다. 종교인들간에 서로 배우는 자세가 중요하다고 본다.

 

비록 선교를 목적으로 티베트에 대한 기록사를 저술했을망정, 이 책은 결국 티베트문화 불교를 서방세계에 알려주는 좋은 정보가 된 것이다. 티베트의 정신적 지도자 달라이 라마가 1959년 인도로 망명하였는데, 서방에서는 달라이 라마라고 하는 티베트 국가 왕이며 불교의 수장으로서의 위상을 알고 있었던 것이다. 어떻게 보면 달라이 라마는 바티칸의 교황처럼 막강한 종교지도자임을 인식하게 된 것이다. 서방에 티베트와 티베트 불교 그리고 달라이 라마란 존재를 몰랐다면 달라이 라마가 인도로 망명했을 때, 서방 세계에서 그렇게 열광했겠는가. 이런 사전 정보가 있었기에 가능했던 것이다.

▲ 달라이 라마로부터 강의를 듣고 기념 촬영하는 서양의 젊은 지성인들.    

  

불교 지도자 가운데 가장 지명도가 큰 분이 바로 달라이 라마이다. 노벨 평화상 까지 수상했고, 세계 평화를 위해서 지금도 활동하고 있다. 우리는 여기서 무엇을 생각할 것인가. 예수회 선교사들의 아시아 선교가 없었다면 서양인들이 인도 중국 일본 티베트 불교에 대한 지식을 어떻게 알 수 있었겠는가. 기독교 교리 전파가 목적이었지만, 역으로 생각한다면 결과적으로는 서양인들이 불교를 이해하는데 일조를 했다는 생각이 되는 것이다. 지금 서양에서 불교연구는 매우 인기가 있으며 오히려 동양에서보다도 학술적인 면에서는 수준이 더 높다고 평가를 받고 있을 정도이다. 인도에서 불교가 거의 사라지고 중국에서 꽃을 피웠듯이, 이젠 서양에 서 불교가 꽃을 피우고 열매를 맺으려고 한다.

 

아시아 선교를 하면서 불교라는 종교를 만나서 불교를 서양에 소개한 것이 결국은 서양불교를 탄생하게 하는 계기가 되었다.

보검<세계불교네트워크 코리아 대표> 

▲ 필자 보검스님이 인도 오리사 주 아소카 대왕 칼링가 승전 기념 탑 앞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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