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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양문화와 불교-㉟ 예수회 선교사 알레산드로 발리냐노, 도요토미 히데요시와 담판

보검 이치란 스님 | 기사입력 2021/08/23 [08:30]
일본 근대화에 촉매 역할을 한 예수회 선교사들의 활약

서양문화와 불교-㉟ 예수회 선교사 알레산드로 발리냐노, 도요토미 히데요시와 담판

일본 근대화에 촉매 역할을 한 예수회 선교사들의 활약

보검 이치란 스님 | 입력 : 2021/08/23 [08:30]

일본 근대화에 촉매 역할을 한 예수회 선교사들의 활약,

후쿠자와 유키치 통해 김옥균 박영효에도 영향 미처

 

요즘 아프가니스탄 탈출 사태를 보면서 만감이 교차한다. 한 때 아프가니스탄은 불교가 왕성했던 곳이다. 아프가니스탄에는 바미안 대불이 있다. 바미안 석불은 아프가니스탄 바미안주의 힌두쿠시 산맥의 절벽 한 면을 파서 세워져 있었던 석불들이다. 이곳은 한 때 불교 센터였다. 탈레반은 국제사회의 강력한 반대에도 200138일과 39일 로켓탄으로 파괴하고 말았다. 탈레반은 이슬람 원리주의를 내세우는 정권이다. 앞으로 그나마 남아 있는 불교 유적을 어떻게 할지 모를 일이다. 종교도 권력의 힘이 없으면 이런 무참한 꼴을 당하고 마는 것이다. 바미안 석불은 유네스코를 비롯한 국제 사회의 지원을 받아 복원 중이었지만, 향후 어떤 운명을 맞이할지 알 수 없는 일이 되었다.

▲ 도요토미 히데요시를 만나 담판을 벌인 예수회 선교사 알레산드로 발리냐노. 

 

다시 예수회 선교이야기로 화제를 돌리자. 얼마나 어려움을 무릅쓰고 선교를 했는가. 한 종교의 전파는 그냥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다. 한국은 개신교가 가톨릭 보다 도 더 많은 신도 수를 갖고 있지만, 개신교가 한국에 자리 잡기 전에는 가톨릭 선교가 먼저 이루어졌다. 전회에서도 살펴보았지만, 예수회는 아시아 선교에 전력투구했다. 체계적으로 그리고 단계적으로 선교사들을 아시아에 파견한 것이다.

▲ 도요토미 히데요시     

 

알레산드로 발리냐노(1539~1606)는 이탈리아 출신의 예수회 소속 기독교 선교사이자 사제이다. 그는 부단히 동양에 로마 가톨릭교회를 알리려 노력하였다. 발리냐노 신부는 동방선교를 157496일부터 시작했는데 32년간 3차례나 일본을 방문하면서 선교에 열중했으나, 불행히도 1606년 마카오에서 병사했다.

 

일본은 불교를 받아들인 다음, 서양의 기독교에 대해서는 별로 흥미를 느끼지 못했다. 사실 지금도 일본에 가보면 교회를 별로 찾아 볼 수 없다. 한국과는 전연 다른 모습이다. 도요토미 히데요시는 원래 오다 노부나가의 정책을 계승, 기독교 전도를 용인하는 입장에 있었다. 그가 특별하게 기독교 전도에 크게 반대하지 않은 증거는 1586년 음력 316일에는 오사카 성에서 예수회 선교사 일본 총책임자였던 가스파르 코엘료를 접견하였으며, 예수회의 포교에 대한 허가증을 발급해줄 정도였다.

 

그러나 규슈 평정을 마친 뒤 지쿠젠의 하코자키에 체제하고 있던 히데요시는 나가사키에 예수회 깃발이 세워진 것을 알게 되었다. 이에 놀란 히데요시는 덴쇼 15618일 각서(天正十五年六月十八日付覚)에 이어, 다음날에는 포르투갈 측 통상책임자인 도밍고스 몬테로와 선교사 코엘료가 나가사키에서 히데요시를 알현하던 무렵, 선교사 퇴거와 교역의 자유를 선언한 문서를 전하고 기독교 선교의 제한을 표명하였다.

▲ 1586년 독일 아우구스부르크에서 인쇄된 덴쇼 사절단의 초상화. 제목은 '일본섬에서 온 소식'이라고 적혀 있다. 교토대학도서관 소장.  

 

이 때 발리냐노는 예수회의 동인도 순찰사였다. 그는 어떻게 하던지 히데요시의 추방령이 무효가 되도록 분주하게 움직였다. 그는 1590(덴쇼 18), 귀국한 덴쇼 소년사절단과 함께 인도 총독의 대사 자격으로 히데요시와 회견했다. 여기서 덴쇼 소년사절단이란 무엇인가. 덴쇼 소년사절단(天正遣欧少年使節)1582년 아즈치모모야마 시대의 일본 규슈의 기리시탄 다이묘인 오토모 요시시게(大友義鎮), 오무라 스미타다(大村純忠), 아리마 하루노부(有馬晴信) 등이 조정을 대신하여 교황을 알현하기 위해 파견한 4명의 소년을 중심으로 한 기독교 사절단이다. 아즈치모모야마 시대(安土桃山時代)는 오다 노부나가와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정권을 장악한 시대를 말한다. 연도상으로 따지면 1568년에서 1603년까지를 가리킨다.

▲ 기독교를 믿었던 오토모 요시시게. 센고쿠 시대의 무장, 분고의 센고쿠 다이묘.  

 

예수회의 알레산드로 발리냐노 선교사는 일본에서 기독교로 개종한 소년들에게 서구 문물을 견학시키고 교황을 알현하도록 일본 기독교소년단을 구성해서, 교황을 접견하고 1590년에 귀국하도록 한 것이다. 발리냐노 선교사는 일본에서 인도 고아까지만 수행하였고, 이후로 로마까지는 다른 신부가 수행하였다. 이 사절단에 의해 당시 황금의 나라 지팡구 등 서양세계에 환상적으로만 알려져 있던 일본의 존재가 확실히 알려지게 되었으며, 이들이 가져온 구텐베르크 인쇄기에 의해 일본은 동아시아 최초로 서양 활판기술을 도입하여 책을 찍게 되었던 것이다.

 

이런 상황에서 덴쇼 각서사건은 엄청난 파장을 불러 왔으며, 그동안 닦아놓은 일본 전도의 꿈이 물거품이 되려는 위기상황에 직면했다. 발리냐노 선교사는 덴쇼 소년단과 함께 급히 일본으로 돌아와서 히데요시에게 황금장식을 붙인 매우 아름답고 훌륭한 밀라노산 백색 갑주 2, 모두 은으로 된 매우 훌륭한 장식이 붙은 커다란 검 두 자루, 진귀한 두 자루의 총포, 야전용 천막 한 세트, 유화, 아라비아산 말 두 마리 등을 선물로 바쳤다. 보답으로 히데요시는 발리냐노에게 커다란 쟁반 두개를 주었는데 하나에는 은 100, 다른 쟁반에는 솜을 둔 비단 옷 4벌이 들어있었다. 또 그를 수행한 예수회 사제들에게도 똑같이 은과 비단 옷을 선물했다.

▲ 고니시 유키나가(小西 行長) 일본 상인(商人) 출신의 무장으로 세례명은 아우렐리우스 아우구스티누스 히포넨시스.   

 

이 무렵 히데요시는 자신의 권력과 힘이 최고조에 달해 있었다. 그는 나가사키에서 예수회 깃발을 게양한 가스파르 코엘료 선교사의 태도를 격렬하게 비난했다. 가스파르 코엘료는 포르투갈 예수회 선교사였다. 이러한 히데요시의 분노를 억제하기 위해서 결국 발리냐노는 히데요시의 조선 출병(임진왜란)에 전면 협력을 할 수 밖에 없게 되었다는 설이 설득력을 얻고 있는데, 실제로 조선에 출병한 대부분이 고니시 유키나가를 비롯한 크리스천 영주들이었기 때문이다.

▲ 일본 근대화의 출발점이 된 ‘난학사시’  


일본이 근대화를 하기 전에 서양학문은 나가사키를 통해서였다. 난학(蘭学)은 에도 시대 네덜란드를 통해서 들어온 유럽의 학문, 기술, 문화 등을 통칭해서 이르는 말이다. 쇄국 이전에는 나가사키를 통해 유입된 서양학문은 남만학(南蛮学)이라고 하며, 막말 네덜란드 이외 서양 국가의 학문을 양학(洋学)이라 하여 난학과 구별하기도 하지만, 넓은 의미에서 난학, 만학, 양학 모두를 통틀어서 양학이라고 한다. 스기타 겐파쿠는 <난학사시(蘭學事始)>를 저술했다. 난학이란 네덜란드어와 그 언어를 통한 서양의 과학기술 공부를 뜻한다. 사시는 글자 그대로 일의 시작을 뜻한다. 난학이 일본 사회에 널리 퍼지자 자신의 공이라고 내세우는 사람이 많아졌고 그러자 스기타가 주위의 권유를 받아 난학의 출발점이 된 <타펠 아나토미아> 번역 과정을 적어 1814년에 남긴 책이 <난학사시>.

▲ 스기타 겐파쿠(杉田 玄白, 1733년~1817년). 에도시대 '네덜란드 의학'(和蘭醫學)을 시술한 의사.   


누구보다 <난학사시>에 감동한 인물이 후쿠자와 유키치(福澤諭吉·1835~1901). 후쿠자와 유키치는 누구인가. 일본의 최고액권 만엔짜리 지폐에 살아있는 인물이다. 서양사정이라는 책을 저술했고, 김옥균과 박영효 같은 조선 개화파의 스승이었다. 후쿠자와는 21세부터 26세까지 5년 동안 난학에 매진한 뒤 영학(英學)에 뛰어들었다. 후쿠자와는 스기타의 대항해기(大航海記)를 다음과 같이 읽었다고 술회한다.

▲ 미국에 방문한 카린 마루 일행 (1860년 12월), 맨 오른쪽에 앉은 이가 후쿠자와 유키치.

 

우리들은 선배들의 고통을 직접 눈으로 보는 듯했고, 그 강단과 용기에 놀랐으며, 그 성심성의에 감동해 감격의 눈물을 흘렸습니다. 나는 별세한 미쓰쿠리 슈헤이와 교제가 가장 깊었는데, 당시 이 사본을 둘이 앉아 몇 번이고 반복해서 읽었습니다. 그리고 앞에서 언급한 부분에 이르면 우리 둘은 또 다시 감격의 눈물을 흘렸고 할 말을 잊었습니다. 더 이상 책을 읽을 수 없었습니다. <난학사시>서문

 

발리냐노는 일본 근대화 이전에 일본에서 서양학문과 문물을 소개하는 역할을 하면서 기독교를 전도했다. 그는 수학, 물리, 철학, 신학을 공부한 지식인 선교사였다. 그는 인도에서 일본에 이르는 예수회 전 교구 사무를 주관하는 시찰원 겸 부주교이기도 했다.

보검스님<세계불교네트워크 코리아대표>

▲ 보검스님이 한 불교국제행사에 참석 캄보디아 불교대학 교수 스님과 함께 <베트남 하노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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